나는 왜 까칠하지 못할까

by 김아인

2017년 7월의 글, 이 글은 여전히 나에게 유효하다.


사람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학습 혹은 트라우마

매우 동감하는 문장이다.

어디서 봤는지, 누가 말했는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저 문장만은 잊지 않고 있다.

내가 어렸을 적부터 길들여진 학습 혹은 트라우마는 싫은 소리를 듣거나 혼나기 싫다는 것이다.


친구는 내가 소심해서 그렇다고 했다. 소심한 사람들이 착하다고. 남에게 싫은 소리 듣기 싫어서 싫은 소리 안 하고, 남이 뭐라고 하기 전에 먼저 굽히고, 하고 싶은 말을 꾹 참는 그런 것들. 착한 척하는 것이 아니라 소심해서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했다.


누군가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 정제된 언어와 설득할 수 있는 말들, 상대방이 자신의 잘못을 느낄 수 있는 말을 찾아야 한다고 했지만, 나에겐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을 말할 용기가 필요했다.

그 말은 나쁜 말이에요, 누군가를 대상화하는 말이에요, 그런 말은 쓰지 말아야 해요, 왜 제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시죠? 불쾌한 말이네요 라는 이 말들을 나는 속으로만 삼킬 뿐 하지 못했다. 주로 이런 말들은 상대방이 가지는 위계에 짓눌린다. 나보다 높은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서 싫은 소리, 혼나는 소리를 듣기 싫다는 두려움.


그런 상황에 처해질수록 드는 생각은 나는 왜 좀 더 까칠하지 못할까, 나는 왜 좀 더 싸가지없지 못할까 하는 자책이었다. 상대방의 잘못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로 잡지 못하는 나를 탓하게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학습된 이 트라우마들은 대학시절까지 이어졌고, 우울증 증세까지 보였던 적이 있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내 모든 것을 쏟았던 집단에서 뛰쳐나왔다. 그 무엇보다, 혼나기 싫다는 마음 그리고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이유로 끝없이 괴로워했던 시간들, 혼나기 싫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시절을 벗어나 맘 편하게 살고 싶다는 간절함으로 나는 뛰쳐나왔다. 그리고,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혼냈던 그 사람과는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우연히라도 마주치고 싶지 않고, 비슷한 사람만 봐도 여전히 가슴이 철렁거린다. 그렇게 당신은 지독한 트라우마로 나에게 남았다.


어떻게 해야 나는 더 까칠해지고,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게 될까.

우리가 대단히 착각하는 것 중 하나는, 사람이 변할 수 있다는 믿음이라고 했다.

분명 변할 수 없을 것이다. 평생 소심한 성격을 가지고 착한 사람 콤플렉스를 간직하며 살아갈 것이다. 다만, 거기서 아주 살짝, 까칠해져하고 싶은 말은 하고 살아도 될 것 같은데, 나는 도무지 방법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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