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매뉴얼

by 김아인

한 2년전쯤의 일이다.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현재 기온을 확인하고 부랴부랴 두꺼운 옷을 찾았다. 두꺼운 청바지에 안감까지 갖춰입은 바람막이, 신발도 신발장에 있던 가을-겨울용으로 꺼내 신었다. 그 날 저녁, 대학원 수업을 듣는데 문득 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온통 푸른계열의 색들이다. 파란색 바람막이에 청바지, 보라색과 파란색 그 어디 중간쯤 색깔의 신발, 가방과 보조 가방 모두 푸른계열의 군청색이었다. 심지어 그 순간에 들고있던 연필도 하늘색, 핸드폰 케이스도 하늘색이다. 나는 푸른 계열의 옷과 소품들로 무장하고 있었다.


IMG_20170109_130943.jpg 파란색으로 무정한 나, 대충 이런모습이었다.


최근들어 누가 좋아하는 색을 물어오면 항상 '초록색'이라고 답해왔다. 사실 특별히 선호하는 색깔이 있었던 것은 아닌데, 초록색이 심신을 안정시켜주고 눈의 피로를 풀어준다는 말을 듣고 나서부터 그렇게 대답한 것 같다. 정작 실제로는 푸른색의 소품들로 둘러싸여 있으면서 말이다. 비슷한 사례가 또 있었다. 어릴 적 누군가 좋아하는 과일을 물어보면 '사과'라고 답했다. 그러면서도 누군가 사과를 권하거나 집에 사과가 썩어가고 있어도 그 신맛을 잘 먹지 못해 즐겨먹지 않았다. 아마 가장 익숙하고 '예쁘다'는 이미지 때문에 사과라고 답한 것 같다. 어느 날 바나나를 먹으면서 깨달았다. '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은 바나나구나.' 나는 한자리에서 바나나 2~3개를 금방 까서 먹고는 했던 것이다.


이석원의 에세이 '보통인간'에 '매뉴얼 쓰기'라는 것이 나온다. 여기에서 작가는 자신만의 매뉴얼을 소개한다. 자신이 겪었던 실수를 기록하여 반복하지 않기 위해, 다시 같은 상황에 대면했을 때의 자세에 대해 조언하는 것이다. 이 글을 접한 후 나는 나에게 맞는 매뉴얼을 작성하기로 했다. 내가 알고 있거나 누군가가 말해주는 나의 특징, 매번 반복하는 실수들, 아쉬움들, 기억해 놓으면 좋을 것들을 작성했다. 이런 기록들은 계속해서 상기할 수 있어서 좋고, 무엇보다 쓰면서 나를 관찰할 수 있어서 좋았다. 나 스스로가 업그레이드되는 느낌이 들었다. 이후로 매 해, 새 다이어리는 메뉴얼을 쓰는 것으로 시작한다. 언제나 첫 구절은 ‘나는 기억력이 좋지 않다. 메모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이다.


나 관찰하기


매뉴얼 작성에 가장 필요한 것은 나를 관찰하는 일이다.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서라면 그 사람의 취향, 좋아하는 것, 심지어 글씨체까지 알아내면서 정작 나를 관찰하는 것에는 인색하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인데 말이다.

예를 들어 주변을 보면 ‘특기와 취미’를 쓰는 것을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굉장히 자주 접하게 되는 질문임에도 불구하고,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뭘 잘하지?’, ‘내가 즐거워하는 것은 무엇이지?’하고 혼란스러워 한다. 이 혼란이 비록 심각한 것은 아닐지라도, 이렇게 흔하게 접하게 되는 질문이나 나에 관한 것을 기록해 놓으면 혼란과 시간낭비를 줄일 수 있다. 물론 ‘나 관찰하기’가 선행되어야 한다.


‘나 관찰하기’에 대해서는 나 또한 반성한다. 이제 서야 내가 좋아하는 색깔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이제 매뉴얼에 한 줄이 추가될 것이다. ‘나는 파란색을 좋아해서 파란색 소품이 많다. 다른 색깔의 소품에도 눈을 돌려보자!’ 라고. 아무리 파란색을 좋아한다고 해도 온 몸을 파란색으로 치장하고 있는 것은 개성이 없어 보이는 법이다.

페이스북 창시자 마크 주커버그가 어느 강연에서, “왜 맨날 같은 옷을 입느냐”는 질문에 “뭘 먹을지, 뭘 입을지 등 사소한 결정들은 사람을 지치게 하고 에너지를 소모시킨다”며 “최고의 상품과 서비스를 구축하는데 그 에너지를 쏟아 붓고 싶다”고 했다.

사실 백프로 동의하는 말은 아니지만, 다만 저 대답을 인용하여 이야기 해주고 싶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나의 장점이 무엇인지,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 몰라 때마다 고민하는 것은 때때로 나를 지치게 한다. 이미 있는 것은 매뉴얼을 통해 참고하고, 새로운 것을 관찰하고 알아가는 데 에너지를 쏟아 붓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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