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22학년도 대입 수능의 생명과학Ⅱ 20번 문항과 관련된 논란은 우리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수능 직후, 수험생들은 문항의 오류성으로 인해 정답이 나올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여 이의를 제기했으나, 교육과정평가원은 정답을 그대로 유지했다. 평가원이 제시한 정답 유지의 근거는 “이 문항의 조건이 완전하지 않지만, 교육과정 학업 성취 기준을 변별하기 위한 평가 문항으로서의 타당성은 유지된다”는 것이다. 이에 92명의 수험생이 평가원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했고, 법원은 최종적으로 정답 취소 처분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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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문항의 문제는 집단의 개체 수를 구하는 계산 과정에서 특정 조건에 실재할 수 없는 모순이 존재한다. 그러나 평가원은 문제에 등장하는 7개의 조건 중 1개의 조건이 오류이나, 이 1개의 조건을 굳이 살피지 않더라도 정답을 구할 수 있다고 변명했다. 그러면서 재판부에 “정상적인 학생들이 어떤 풀이 방식으로 접근하는지 잘 판단해달라”고 했다. 평가원이 생각하는 ‘정상적인 학생들의 방법’, 곧 모든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신속하게 보기만 판단하고 넘어가는 방법을 따랐다면 정답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평가원의 이런 답변은 현 수능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깊고 넓은 사고력을 요하기보다 짧은 시간 내에 신속하게 정답을 골라내야 하는 시험인 것이다. 30년 전에 사라진 학력고사와 사실상 다를 게 없다. ‘수학(修學)능력시험’, ‘K-SAT(Scholastic Aptitude Test’라는 명칭이 무색하다.
필자의 고교 시절에는 수업 시간에 교과서 대신 EBS 기출문제집을 해설하며 반복 풀이했던 기억이 있다. 2010년부터는‘사교육 경감’을 이유로 수능‧EBS 연계율이 대폭 향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입안자들의 의도대로 사교육 참여율이 줄지도 않았을뿐더러, 학교 현장에서도 학생과 교사 모두 EBS 문제 풀이 기계가 되어 공교육의 질마저 저하되었다.
게다가 수능 문제가 날로 쉬워지니, 소위 ‘함정’을 숨겨놓은 ‘킬러 문항’으로 변별력을 높였다. 학생에게는 교과 지식에 더해 신속한 풀이 속도를 내면서도 함정에 낚이지 않는 기술이 필요하다. 제한 시간 내에 빠르고 정확한 손기술을 겨루는 플래시 게임 같은 현 대입 시험 체계 속에서는 역량 중심 교육, 고교학점제 등 이런저런 개혁으로도 무언가 크게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가 어렵다.
우리나라의 수능은 대학을 넘어 사회적 선발을 위한 변별성이 최고의 가치로 여겨졌고, 시간이 갈수록 이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이 과정에서 학생의 사고력 향상은 물론이고, 시험의 취지였던 학업 수행능력조차 변별성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게 고려되었다. 다양성과 창의력도 전혀 허용되지 않았다. 위에서 언급한 생명과학Ⅱ 사태는 이러한 문제가 쌓여 터질 것이 터진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교육에 있어서 평가가 그 본질대로 학생의 성취도를 측정하고 더 성장할 수 있는 지표가 되려면 무엇보다 성적을 대학 입학과 사회적 성공의 티켓쯤으로 생각하는 사회적 인식의 변화가 필요해 보인다. 인식의 변화가 없다면, 고교학점제에 맞추어 변화되는 대학입시제도도 현상의 연장에 그칠 것이다.
글을 맺기에 앞서, 문제를 들쑤신 책임감으로 한 가지 바라는 모습을 얕게나마 제시해본다. 아래의 문장은 IB(국제 바칼로레아)라는 국제 공인 교육과정에서 출제한 대입 자격시험의 문항이다. 우리가 익숙해진 객관식 일변도의 시험문제와는 확연히 다르며, 적어도 단순 문제풀이보다 사고력을 기르는데 집중할 수 있겠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시험 문제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생각한다.
# 영어 시험 (시) : 빛과 어둠, 시골과 도시, 자부심과 겸손함. 이것들과 같은 대조는 시인들이 사상이나 감정의 표현을 날카롭게 하기 위해 사용해 왔다. 당신이 공부한 적어도 두 명의 시인들의 작품에서, 특정한 효과를 얻기 위해 대비가 사용된 방법을 탐구하라.
# 역사 시험 (사회, 경제) : 사회적, 경제적 변화의 원인으로서 기근과 질병의 중요성을 평가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