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의 복수는 누구보다 명확하다

비극의 시작

by 박진권

군자의 복수는

누구보다 명확하다


복수를 위한 계획에 오점이 하나도 없다면 실행해도 좋다. 그 계획이 누가 봐도 완벽하며, 복수하는 당사자에게 어떤 피해도 없다면 말이다. 그게 진정한 복수다. 흔한 ‘아버지의 복수’를 하는 아들이 복수 중 사망에 이른다면, 그것은 올바른 복수라고 할 수 없다. 반대편의 ‘악당’은 결국 아버지와 아들 두 목숨을 앗아갔기 때문이다. 대를 끊은 살인극을 성공한 악당은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다. 그렇기에 복수는, 치밀한 계획 끝에 나에게 조금의 피해도 없이 완료되어야 한다.


서평: 박진권, 제호: 햄릿, 저자: 윌리엄 셰익스피어, 출판: 민음사




비극의 시작

햄릿의 복수는 늦어도 너무 늦었다. 군자처럼 계획했다기엔, 그저 미쳐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적에게 그만큼 오랜 시간을 살게 해준 자비와 다름없다. To be or not to be는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로 해석하면 햄릿은 우유부단하고, 고뇌밖에 할 줄 모르는 멍청하고 유약한 왕자가 된다. 심지어 레어티즈와의 결투에서 우연이 클로디오스를 죽인 것도 본인의 계책은 아니었다. 바다 넘어 사지로 향하는 것을 알아채고 흉계를 꾸민 클로디오스의 심복들을 도리어 죽게 만든 것과 연극을 제외하면 햄릿의 계략은 찾아볼 수 없다. 높은 지적 수준에 대비해서 어린아이와 같은 정신의 햄릿은 그저 말장난만 할 뿐이다. 복수도 차일피일 미루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 또한 그리스도의 핑계로 이행하지 못하는 머저리다. 서른 살이 넘은 덴마크 왕자를 머저리로 만들 계획이 아니라면 위의 번역은 다소 아쉽다고 볼 수 있다.


p.87 햄릿: 맙소사, 그걸 감수해야지. 왜냐면 난 간은 콩알만 하고, 탄압을 쓰게 느낄 쓸개가 빠진 놈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아니라면, 옛날에 그 뒈질 놈의 창자로 하늘이 모든 솔개를 살찌워야 했었다. 잔인하고 음탕한 악당! 잔혹과 배신의 호색하고 비정한 악당! 아니, 이 무슨 못난이란 말인가! 거, 참으로 장하다. 고귀한 부친이 살해당한 아들, 천국과 지옥으로부터 복수를 재촉받은 내가 창녀처럼 말로만 내 가슴을 비우고, 순 잡년 잡놈처럼 저주를 퍼붓다니! 역겹구나! 퉤! 머리를 굴려봐. -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


하나,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로 해석하면 햄릿은 완전하게 다른 사람이 된다. 존재 자체의 고뇌를 따짐은 햄릿의 깊이를 보여준다. 만일 죄를 부여해야 할 사람이 클로디오스 한 사람이라면 햄릿의 복수는 더욱 명확했을 것이다. 생모인 거트루드의 추후 거처와 현 왕의 심복이자 사랑하는 여인의 아버지 폴로니어스, 그의 딸 오필리아와 햄릿을 존경하는 시민들, 현 왕을 살해한 직후의 나라 정세까지. 그의 머릿속은 수많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복잡하게 섞여 혼란 그 자체였을 것이다. 삶과 죽음만을 따지는 멍청하고 우유부단한 햄릿보다 존재 자체를 거듭 고뇌하며 고통스러워하는 햄릿이 훨씬 입체적으로 보인다.


p.94 햄릿: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어느 게 더 고귀한가. 난폭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맞는 건가, 아니면 무기 들고 고해와 대항하여 싸우다가 끝장을 내는 건가, 죽는 건 – 자는 것뿐일지니, 잠 한 번에 육신이 불려 받은 가슴앓이와 수천 가지 타고난 갈등이 끝난다 말하면, 그건 간절히 바라야 할 결말이다. 죽는 건, 자는 것. 자는 건 꿈꾸는 것일지도 – 아, 그게 걸림돌이다. 왜냐하면 죽음의 잠 속에서 무슨 꿈이, 우리가 이 삶의 뒤엉킴을 떨쳤을 때 찾아올지 생각하면, 우린 멈출 수밖에 – 그게 바로 불행이 오래오래 살아남는 이유로다. 왜냐면 누가 이 세상의 채찍과 비웃음, 압제자의 잘못, 잘난 자의 불손, 경멸받는 사랑의 고통, 법률의 늑장, 관리들의 무례함, 참을성 있는 양반들이 쓸모없는 자들에게 당하는 발길질을 견딜 건가? 단 한 자루 단검이면 자신을 청산할 수 있을진대, 누가 짐을 지고, 지겨운 한세상을 투덜대며 땀 흘릴까? 국경에서 그 어떤 나그네도 못 돌아온 미지의 나라, 죽음 후의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이 의지력을 교란하고, 우리가 모르는 재난으로 날아가느니, 우리가 아는 재난을 견디게끔 만들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양심 때문에 우리들 모두는 비겁자가 되어버리고, 그럼에 따ᆞ라 결심의 붉은 빛은 창백한 생각으로 병들어 버리고, 천하의 웅대한 계획도 흐름이 끊기면서 행동이란 이름을 잃어버린다. 가만있자, 고운 오필리아! 요정이여, 그대의 기도 가운데 내 모든 죄를 잊지 말아 주소서. - 윌리엄 셰인스피어, 햄릿.


어쨌든 햄릿은 스스로 복수를 이루지 못했다. 클로디오스를 상처 낸 독 묻은 칼조차 레어티즈의 계략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복수의 대상자 한 명을 제대로 응징하지 못하고, 주변 모두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 폴로니어스는 간신이기 때문에 대상자 중 한 명이라고 할지라도 너무도 비겁한 방식으로 척결한다. 그 때문에, 오필리아는 미쳐서 자살하게 되고, 총명한 레어티즈는 복수의 화신이 된다. 햄릿의 미숙한 일 처리에 한 가문이 몰락하고, 왕비와 본인까지 죽음에 이른다.


복수의 가장 좋은 방식은 대상자가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다. 유약한 햄릿은 연극으로서 클로디오스의 양심을 건드리려 했다. 물론, 유령의 말이 사실인지를 명확하게 알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 연극 말고도 방법은 무수히 많다. 복수의 속내를 클로디오스에게 들킨 것이 이 이야기가 비극으로 마무리되는 가장 큰 이유다. 이 부분에서 햄릿이 미쳤다는 게 증명된다. 총명함과 백치를 넘나드는 인간은 미쳤다는 것 말고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폴로니어스는 햄릿의 광증을 정확하게 집어냈다. 물론 그 이유는 완전하게 틀렸지만 말이다. 햄릿과 폴로니어스가 대화하는 장면에서 그의 방백을 빌리자면, “때론 얼마나 의미심장한 말을 하는지 – 이런 재치 있는 응답은 광기에 빠진 사람이 종종 하는 거라고. 이성이나 맑은 정신 가지고는 이렇게 꼭 들어맞는 말을 할 순 없지.”


유약한 햄릿은 미쳤으나, 가끔 총명함이 돌아왔다. 복수를 잊진 않았지만, 어떤 것도 실행할 수 없었고, 존재 자체를 거듭 고뇌했다. 그럴 때마다 유령은 햄릿을 보챘고, 그는 점점 돌아버린 것이다. 이 극은 어쩌면 햄릿이 유령을 마주한 그 시점부터 비극적인 결말이 예고되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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