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고독할 필요가 있다]를 읽고 에세이 1부

<15화> 다섯 번째 지리산 명상 - 구영회 지음.

by 박진권



[구도자의 오답노트]

[1] 책을 보며 내가 향할 길과 비슷한 미래를 유추한다. 책 속에는 선지자들이 즐비하다. 그들을 보고 읽으며 존경과 동시에 경쟁의식을 갖는다. '나와 비슷한 길을 향하는 저들도 극복하고 성취했는데, 내가 못 할 이유는 없다.'라는 생각이다. 비슷하지만, 확연하게 다른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데 그들의 힘은 생각 이상으로 큰 도움이 된다. 이래서 독서를 멈출 수가 없다.


책 속에는 늘 예상치 못한 보물이 숨겨져 있다. 명쾌한 해답은 아닐지라도 매번 내 머릿속에 있는 뇌관을 살짝이나마 건드릴 정도의 타격은 항상 존재했다.




[2] 버림받는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아무리 경험에 미친 나라고 해도 자주 하고 싶은 일은 아니다. 물론 생각보다 나쁘기만 한 일도 아니다. 자신을 재정비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고, 생각보다 많은 변화가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인연들과의 헤어짐은 그 자체로 큰 가치가 있다.


나는 간혹 이런 말을 듣는다. "너무 냉정해.", "기계 같아.", "네게도 마음이라는 게 있어?" 물론. 나도 사람이다. 그렇기에 마음이 있고, 연민도 있다. '놀랍게, 상처도 받는다.' 내 속에 들어와 본 사람이라면 위의 말들에 절대 공감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에게 나는 웬만한 개보다도 더 애정에 목말라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까.




[3] 고독도, 외로움도, 그리움도 모두 좋다. 꽤 오랜 시간 혼자였다면 외로움이 찾아오는 게 당연하다. 그 외로움을 현명하게 이겨낸 후 마음을 다 잡는 순간에 고독이 찾아온다. 그렇게 평온하고 자발성이 짙은 단신이 되었을 때 그리움이 밀려온다. 마침내 고독과 외로움 그리고 그리움이 하나가 되었을 때 우리는 다시금 사랑을 할 수 있게 된다.






[머리글 - 서어나무숲에서]

[1] 무엇이든 한 가지만 특출 나게 튀어나오는 것은 위험신호일 가능성이 크다. 그 위험신호 중 하나는 바로 외로움이다. 고독과 그리움 그리고 여타 긍정적인 감정들이 결여된 상태로 외로움에 매몰되어 세상을 음산하게만 살게 되면, 좋은 인연들 또한 나를 피해 가기 마련이다. 그렇게 부정의 늪에 빠져 부정적인 사람들만 꼬이게 된다. 전방위로 칙칙한 사람으로서 고독한 사람을 표방한 외로운 사람으로 변모하게 되는 것이다.




[2] 성격의 장단점은 분명하지만, 나는 내 성격이 싫다. 평소 성격이 아닌, 비뚤어졌을 때 나오는 그 직설적인 화법부터 시작해서 타인을 폄하할 때 나오는 비범한 어휘력 그리고 상대가 꼬리를 말았을 때 그 꼬리 자체를 잘라버리는 단호함이 역겹다. 그게 본성이라 해도 딱히 변명할 생각은 없다.


어떤 사람에게 나는 단호함의 대명사였다. 하고 싶은 말은 전부 하는 사람이었고, 부당함을 참지 못하고 열변을 토로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도가 지나쳤고, 단호한 사람이 아닌 그저 이기적이고 예의 없는 사람일 뿐이었다.


자신만의 틀에 갇혀 옳고 그름을 흑백논리로 무장한 채 타인의 의견을 받아들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옳다고 믿었다. 염세적인 태도가 기저에 깔린 지적 능력이 우수한 사람들을 존경했고, 동경했다. 그렇게 비뚤어진 지적 허영심이 가득 채워졌다. 타인들은 완전히 배제한 채 말이다.




[3] 혼자만의 시간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할 때 오는 공허함과 허탈함은 그 어떤 고통보다도 더 괴롭게 다가온다. 오늘도 스스로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에 우울함도 같이 밀려온다. 그 모든 감정을 뒤로하고 주먹을 꽉 쥔다. 그리고 할 수 있다는 자기 암시를 통해 다시금 책상 앞에 다가가 앉는다. 그리고 억지로라도 읽으며 쓰기 시작한다. 그렇게 다시 혼자가 되어가는 방법을 깨우친다. 아마도 이런 고생은 평생 이어질 테다. 그렇기에 기대되고, 행복하다. 같은 상황이라 해도, 전체는 다를 테니까.






[마침내 고독이 싹트다]

[1] 에세이를 쓰기 시작한 여러 이유 중 하나는 털어놓을 사람이 없어서이다.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은 생각은 간절하나, 대상이 없었다. 내 감정을 받아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생각에 글로 뱉어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차츰 고독이 밀려왔고, 이내 평온함이 나를 감싸 안았다.


인지하지 못한 고독은 어느새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고, 그로 인해 다시금 따뜻함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완벽한 혼자가 되었을 때 이타심도 발현되어 타인을 도울 수 있게 된다. 내게 고독은 선물이자 완벽한 치유 제다.






[결국 고독을 맞닥뜨리다]

[1] 절실함으로 인해 변화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타인의 절실함도 쉽게 알아챌 수 있다. 물론 그 종류가 나와 비슷한 고통에서 온 절실함인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그들이 어떤 방향으로 걸어갈지, 어떤 시행착오를 겪을지 조금은 유추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들을 안내할 수 있는 위치는 아니다. 나와 비슷한 그들이 덜 아플 수 있게 인도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내공이 부족하다. 아직 간절하기만 하지 어떻게 그 간절함을 얻어낼 수 있는지는 잘 모르기 때문이다. 하여 옆에서 같이 나아가는 수 말고는 달리 방도가 없다. 같이 걷는 게 최선의 방법이다.






[고독이 더 주어지기를]

[1] 혼자 하는 산책은 참으로 귀한 휴식 행위다. 그 시간에 하는 사색은 괴롭지 않고, 그때 찍은 사진은 아름답다. 오늘 하루를 더 이상 아프지 않고 예쁘게 마감할 수 있게 도와준다. 내게 있어서 산책은 그저 걷기만 하는 것이 아닌 치유라고 볼 수 있겠다. 또 내일을 살아갈 원동력을 만들어주는 틈이다.






[고독을 원하는 사람들]

[1] 눈앞에 문이 있다.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열면 정면에 큰 통유리 창이 보인다. 그곳은 작업실이다. 좁지 않은 작업실은 생기 있게 꾸며져 있다. 바닥재와 천장재 그리고 벽면은 모두 원목이다. 곳곳에 직접 그린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고, 한쪽 구석에는 선홍색과 초록색의 다육식물들이 즐비하다.


시선을 떨어뜨리면 바로 앞에 원목 책상이 배치되어있다. 그곳에는 여러 권의 책과 독서대 그리고 노트북이 놓여있다. 방의 한가운데에는 구식 턴테이블이 자리해 있는데, 낡은 LP가 올려져 있다. 조금 쌓인 먼지를 입으로 후 불고 음악을 재생시킨다. 연결된 스피커의 음량을 조절 후 서서히 통유리 앞으로 걸어간다.


유리 바로 앞에는 쉴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그곳엔 원목으로 된 소파와 흔들의자가 있다. 흔들의자를 툭 치고 소파로 몸을 던져 푹 잠긴다. 슬슬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만끽하고, 감미로운 음악을 음미하며 눈을 감는다.




[2] 고독이 내게 보내는 신호를 애써 부정하고 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게 정말 나에게 이득이 될지 확신이 서질 않는다. 나를 돌아보는 계기는 될 수 있어도 이 지독한 외로움이 사라지진 않을 것 같은 의심이 싹튼다. 그럼에도 매번 혼자서 하는 여행의 마지막엔 후련함이 밀려온다. 더 이상 슬플 필요가 없는 나를 마주한다.






[고독 가족]

[1] 셀 수 없이 많은 광휘의 순간을 부분적으로 기억하고, 생각한다. 기억은 과거가 되며 생각은 현재가 된다. 그렇게 추억을 만들어 회상한다. 머릿속에서 상영하는 추억의 영상을 통해 힘을 얻고 매번 절망을 뿌리친다. 이윽고 스스로 만들어낸 행복을 향해 천천히 한걸음 옮긴다. 느리지만 결단 있고 멈춤 없는 걸음을 위해 오늘도 추억을 상기시킨다.






[고독의 달인]

[1] 사라지는 모든 것들은 그 나름대로 아름답다. 사라진 후에 나타나는 것은 더 애틋하다. 그리고 끊어진 후 우연하게 연결되는 것은 나도 모르게 더욱 소중해진다. 그런데, 사라진 후 나타나지 않고 영영 끊어지는 것들도 있다. 물론, 슬퍼할 이유는 없다. 그것을 통해 앞으로 다가올 모든 사라질 수도 있는 것들에 진심을 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라를 움직인 외로움]

[1] 치부가 될까 두려워 속으로만 앓고 있던 마음의 문제가 이내 겉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살기 위해 나를 더 채찍질했고, 웃으며 고통을 가까이했다. 놀지 않고, 먹지 않고, 자지 않는 하루가 끊임없이 이어지며 나를 초췌의 늪으로 인도했다. 살은 13kg이 빠졌고, 행복은 살과 함께 증발했다.


스스로가 치부가 되어 삶의 종영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렇게 외로움에 익숙해지고, 그리움이 옅어졌을 때 비로소 진정한 고독의 신호를 들었다. 그때부터 혼자 산책을 하고, 출사를 떠났다. 모든 여행에는 끝이 있고, 아쉬움이 남기 마련이다. 그런데 혼자 다니는 여행은 끝이 없다. 그렇기에 아쉬움도, 그리움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온전히 혼자를 즐길 수 있게 되었을 때 치부는 사라졌고, 두려움의 존재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독신의 나라가 늘어 간다]

[1] 평생을 불면증에 시달리며 살고 있긴 하지만 유독 잠을 자지 못할 때가 있다. 보통 그럴 때면 대략 이 주 동안 삼일에 한 번 꼴로 잠에 든다. 그 조차도 겨우 세네 시간 정도라 피로감은 끝도 없이 누적되어 가기만 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럴 때마다 책도 더 많이 읽고, 글도 잘 써진다.


한 번은 하루에 10시간씩 읽고 쓰는 게 가능했던 적이 있다. 독서를 하며 에세이를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는 책을 한 달에 한 권 읽기도 버거웠는데, 불면의 밤이 시작된 달에만 무려 세 권의 책과 다섯 개의 에세이가 쏟아져 나왔다. 그래서 그런지 나에게 불면과 우울은 늘 부정적이기만 하진 않다. 우울에서 창의력이 만들어지고, 불면으로부터 작품이 현현하기 때문이다.






[외로움의 정체]

[1] 현대인들은 힘들다. 자신의 시간과 돈을 교환하는 일만 해서는 사회가 정해둔 '정상인'의 범주에 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다. 그래서 자기 계발과 함께 여러 가지 투자에 대해서 공부한다. 그럼에도 끊이지 않는 불안감에 스스로의 정신을 끝없이 갉아먹는다.


그렇게 본질적인 정신건강의 치료는 뒷전으로 두고, 자신의 신체건강을 염려한다. 정신력과 인내심이라는 방패로 자신을 계속해서 채찍질한다. 진정한 자신은 방치해둔 채 승리를 외치며 강해졌다고 굳게 믿는다. 현대인들은 지독하게도 힘들다.




[2] 홀로 있을 때면 때때로 감정 조절에 실패한다. 자신을 다스리고 기분을 헤아려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한다. 그렇게 넘쳐흐르는 감정의 물결을 그대로 방치하는데, 한동안은 그게 정답인 줄 알았다. 설령 명답은 아니라 해도 나에게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오답에 가까웠다.


그렇게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은 독으로 다가왔다. 나에게는 외로움을 선사했고, 타인에게는 나의 괴로움을 위탁했다.




[3] 이보다 더 추락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 때 더 큰 절망이 다가온다. 모든 원기를 조금도 남김없이 소모하고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을 때조차 밑바닥의 밑바닥이 드러나고, 그 조차도 저점이 존재한다. 그렇게 한 치 앞도 보고 싶지 않게 되었을 때 비로소 빛이 나타난다.


언제 사라질지 모를 희미한 빛을 향해 걷는다. 점점 커지는 빛을 움켜쥐어 보고, 곁에도 두어본다. 결국 사라질 모든 빛들 중에서 절대 곁에서 떠나지 않을 광명이 나타날 때까지 계속해서 반복한다.




[4] 무거운 생각으로 인해 두통이 밀려온다. 두통이 된 생각은 이내 고체가 되어 실제 머리를 무겁게 만든다. 뒷 목이 뻣뻣해지는 게 느껴지고, 눈 까지 침침해진다. 그럴 때마다 읽기와 쓰기를 멈추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또다시 산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번에는 조금 더 생생하게.


'회색의 아스팔트를 보며 천천히 걷는다. 이내 고개를 들어 좌측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직 신축 빌라들만 보일 뿐 내가 좋아하는 경치는 아니다. 이내 고개를 거두고 다시금 회색의 아스팔트와 검게 변한 껌들의 잔해를 바라본다. '저 바닥에 붙은 오물들은 무슨 기분일까.' 따위의 쓸데없고,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걷는다.


그러다 정면을 응시한다. 차가운 공기를 있는 힘껏 들이마신다. 폐부 깊숙이 들어온 차가운 공기는 마약이 분명하다. 그렇게 겨울 특유의 냄새를 음미한다.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고개를 우측으로 돌린다. 반대편과는 다르게 이쪽에는 낮은 주택들이 즐비하다. 개중에는 넓은 집들이 허물어져 있고, 공사가 한창이다. 역시나 좋아하는 풍경은 아니다.


그렇게 언덕길로 들어선다. 이 언덕길에는 약 열 다섯 걸음 정도면 벗어날 수 있는 짧은 골목이 있다. 골목의 우측에는 외딴섬 같은 3층 주택이 있다. 그 주택의 외부는 나무로 되어 있는데, 갈색과 흰색 그리고 노란색이 매우 쨍하고, 찬란하다. 언뜻 보면 집이 아니라 감성 카페 같은 분위기다.


감성 카페 같은 집을 끼고 우측으로 돌아 계속 올라가면 4차선 도로가 나온다. 인도를 이용해 도로를 따라 걷는다. 주변은 높디높은 아파트들이 즐비한데 이 또한 좋아하는 경관은 아니다. 그렇게 오르막을 한참 걷다 보면 이내 평지가 나온다. 그렇게 조금만 직진하면 우측에 너무 높아서 아득한 계단이 나타나는 데 그곳의 정경이 그야말로 장관이다.


고개를 내렸을 때 보이는 것은 높은 계단에서 내려다보이는 골목 그리고 그 끝에 보이는 철창 너머의 학교다. 우측에는 초록색 담에 똬리를 틀고 피어난 새빨간 동백꽃이 보인다. 이내 고개를 들어야만 보이는 것은 전깃줄이 하나 걸쳐지지 않은 맑은 하늘이 보이는데, 별도 달도 그렇게 가까울 수가 없다.


그렇게 무거웠던 머리는 한결 가벼워지고, 뻣뻣한 뒷목은 야들야들 유연해진다. 덕분에 생각의 폭도 넓어지고, 맑아진다. 그렇게 부정을 몰아내고 다시 걷는다.






[외톨이 사나이]

[1]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살아가겠다는 선택은 변함이 없다. 그런데 그것이 무서운 인생에 대한 도피인지, 행복한 인생을 위한 계획인지 아직 확신이 없다. 사회의 틀에 스스로를 맞춰내지 못해 조각이 되기를 포기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틀에 맞춰야 할 필요성도, 이유도 없기에 실패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남들과 같이 열풍에 힘입어 주식과 부동산을 공부하고, 그것에 열중하는 게 싫다. 그것이 실패라면 나는 실패하려 한다. 이것이 비겁한 도피라면, 나는 계속해서 비겁할 것이다. 그렇게 요즘 시대에 피어날 수 없는 유일한 꿈의 개화를 위해 살아갈 테다.






[가엾은 외로움]

[1] 누군가에게 연민을 갖는 행위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선민사상에 찌들어 타인을 업신여기는 행동은 정신병이 분명하다. 각기 다른 주체를 자신의 틀 안에 맞추어 바라보고, 이내 강제로 욱여넣는다. 본인의 울타리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쓰레기로 치부하고, 혀를 끌끌 찬다. 마치 자신만이 유일무이한 사람인 것처럼 말이다.


무지한 연민은 타인에게 큰 생채기를 남길 수도 있다.






[비좁은 외로움]

[1] 틀 속에 갇히는 것이 꼭 나쁘기만 하진 않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스스로 만족스럽다면 직접 만들어낸 울타리도 아늑한 보금자리가 될 수 있다.






[가출하는 외로움]

[1] 여러 명 보다 혼자가 낫다. 그렇다고 해서 타인들과의 관계가 싫은 것은 아니다. 인간의 존재 가치는 분명 타인에서 오기 때문이다. 타인들의 인정과 관심을 통해 살아가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게 아니다. 타인이 없다면, 사람은 존재 가치가 없다. 남이 있어야 내가 있다. 그렇기에 관계를 무작정 다 내려놓을 순 없다.


그래도 가끔은 내려놓는 것도 좋다. 관계에서 오는 부정적이고, 소모적인 감정은 그들의 생각을 염탐하지 않고 일정 부분 관심을 두지 않으면 쉽게 해소된다. 그렇게 이따금씩 혼자가 된다면 훨씬 더 원활한 관계를 영위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내 사람일 순 없고, 세상의 연락에 모두 답신을 할 필요는 없다.




[2] 오로지 혼자가 될 수 있는 공간은 많지 않다. 집도, 카페도 항상 타인들의 온기가 느껴진다. 오직 나만의 온기를 채울 수 있는 혼자만의 공간은 좀처럼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 소로에게 월든이 있듯, 나만의 월든을 위해 걷고, 생각하고, 찾아 헤맸다. 당연히 그러한 공간은 없었다.


단순하게 혼자 사는 공간이 독립을 야기하진 않는다. 마음속에 관계를 연신 떠올리며 홀로 있는 것은 외로움의 방증이지 진정한 고독이 아니다. 독립적인 공간에 자립심 깊은 마음이 깃들어야 한다. 혼자여도 쓸쓸하지 않고, 안정된 마음 모두가 부합되어야만 진정한 고독이라 할 수 있고, 그것이 바로 월든일 것이다.






[감추려 애쓰는 외로움]

[1] 타인과 깊이 섞이는 것을 본능적으로 피한다. 그것이 신체 건강에 이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손을 내민다. 절실한 사람의 손 정도는 잡아주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롭기 때문이다. 도움이 필요한 타인을 돕는 것은 나를 구원하는 것과 진배없다.


그럼에도 도움이 필요한 척 손을 내미는 이들에게 지쳤다. 막상 내민 손은 잡지도 않으면서 되려 핀잔을 준다. "네가 뭔데 나를 동정해."와 같은 말을 하며 내 시선에서 숨는 것을 택한다. 그럴 때마다 관계의 나태함이 밀려오고, 이내 단절이 찾아온다. 단절은 외로움을 불러오고 외로움은 결국 우울이 된다.


우울에 매몰된 상태로 부정적인 생각을 되풀이한다. 타인을 구할 수 있다는 선민사상에 흠뻑 취한 것이다. 그들은 구원을 원하지 않았다. 도움이 필요한 것은 오히려 내가 아닌가. 타인보다는 나를 먼저 돕자. 그렇게 자기 위로와 정신승리를 거듭하며, 패배자가 되어가는 나를 발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