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삶을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를 읽고 에세이

2기 <14화> 작가 - 니나 리그스

by 박진권


[담담하게 일상을 채워가는 것이 삶에 대한 예의다]

<슬픔의 잿빛을 닮은 무언가>

[1] 나는 나쁜 소식을 미리 알아챌 수 없는 사람이다. 더욱이 그 소식을 접했을 때 내용을 정확히 헤아릴 수 있는 능력도 없다. 부정적인 일들이 태풍처럼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난 후에야 겨우 알아챌 정도로 둔하다. 그렇게 부정의 바다에서 익사할 때쯤 누군가 나를 꺼내 주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다시금 나약함을 표출한다.




[2] 문제를 조금 더 크게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지나고 나면 별 것 아닌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매번 과잉대응을 한다. 나를 지키고자 스스로를 과하게 보호한다. 의도적으로 타인과의 교류를 제한하고 거리를 두는 게 일상이다. 쉽게 가까워지고, 수월하게 멀어진다. 그것을 반복하며 관계를 이어나간다. 그렇게 인식될 문제 자체를 만들지 않으려 발버둥 친다. 그럼에도 문제는 발생한다.




[3] 문득문득 슬픔이 스쳐갈 때가 있다. 순간 아련함도 밀려온다. 하던 일을 계속해서 진행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그럴 때 장소의 특혜를 받아 감정을 억지로라도 억누를 수 있다면 행운이다. 그렇게 강제로 억누르고 그날 해야 할 일을 이어갈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스쳐가는 슬픔을 그냥 지나치게 둘 수가 없다. 매번 낚아채 품에 꼭 안고는 눈물을 짜낸다. 가슴을 치며 진정하려 애쓰지만 당연히 쉽지 않다. 다행히도 나는 눈물 용량이 적다. 사무치게 그립고 슬퍼도 다 짜낸 후엔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아직 더 울고 싶은데 눈물이 말라버리는 것이다. 그에 따라 슬픔도 말라버린다. 나에게 스며드는 슬픔은 눈물을 비워내라는 몸의 신호일지도 모른다. 눈물을 버리기 위해 작위적인 슬픔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4] 모든 극복의 행위는 숭고한 예술이다. 사소한 일에 대한 극복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극복보다 쉬운 것은 회피다. 어떤 일이 있든 내게 피해가 적은 방향으로 냅다 도망가는 게 훨씬 쉽다. 그렇게 누구나 할 수 있는 수월한 방법을 버려둔 채 어느 누구도 쉽게 할 수 없는 극복으로 방향 전환을 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 극복의 일대기를 듣고, 읽고, 볼 때마다 느낀다. 이것이 예술이 아니라면, 이 세상에 예술은 없다고 말이다.




[5] 조금 강하게 말하자면, 나는 아주 잘못된 방식으로 살아내고 있다. 남들과 다른 방향으로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특별하다거나, 특이한 것은 아니다. 내가 삶의 주체가 되는 것은 사실이나 선민의식은 절대 없다. 남들을 낮게 보는 행위의 절멸을 바라는 사람이다. 선민의식에 찌들고 돈에 미친 사람들이 말하는 모든 부정적인 말을 부정한다.


돈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돈에 미쳐 선민의식을 선하게 의식하는 게 싫고, 그것을 원하지 않는 남에게 강요하는 것을 증오한다. 나는 원하지 않는 것을 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그것에 대한 권리를 감히 누가 관여할 수 있을까. 내 삶은 내 손에 달렸고, 오롯이 나의 것이다.




<'플리즈'라는 마법의 단어>

[1] 노력 없이 얻는 것의 달콤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때문에 최대한 노력을 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 단 10년이라도 노력하지 않기 위해 현재 노력을 빼면 시체인 삶을 살아간다. 대략적으로 90년간 열심히 글을 쓰고, 나머지 10년 동안 아무것도 쓰지 않는 것이 목표다. 인생의 9할은 글을 쓰고 1할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을 위해 살아간다.




[2] 어떤 사람들은 명령어를 남용한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절대 통용되지 않는다. 즉, 본인에게는 부탁하길 희망한다. 그들이 타인에게 던지는 말은 명령이고, 강압이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돌아오는 말은 예의에서 한치도 어긋나지 않은 정중한 부탁이길 바란다.




<엄마, 나의 엄마>

[1] 행복은 나누면 배가 된다고 하는데, 왜 불행은 반으로 줄어든다고 말하는 것일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불행 또한 나눌수록 배가 된다. 스스로 잘 견디고 이겨낼 수 있는 일들을 모두 나누기 시작하면 주변 사람들 또한 끝나지 않는 고통을 짊어지게 된다. 그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주변인들에게 고통을 전이시키는 행위는 스스로를 암세포로 만드는 행위다.




[2] 무엇으로 살고, 무엇으로 사라질 것인가. 평생 고찰해도 해답을 찾아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 어떤 문제보다 어렵다. 무엇으로 살고, 무엇으로 사라질 것인지를 생각하면 다른 크고 작은 고난들은 역경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끝이 있는 고민은 아니지만, 짧은 식견으로 내린 결론은 이렇다.


'나는 예술가로 살아내고, 예술가로서 증발한다.'




[3]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 무차별적으로 아무 글이나 써내려 간 적이 있다. 물론 똥과 비교해도 손색없을 더러운 산문을 싸질렀다. 그렇다고 무의미한 행동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내가 써 내려간 백 줄의 글 중 단 한 줄이라도 마음에 든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보다 좋은 일은 아직 없다.




[4] 서로 맞잡은 손은 기적이다.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그 어떤 것 보다 값지다. 그런 행운은 쉽게 찾아오지 않지만, 오만한 태도로 인해 쉽게 떠나간다. 함부로 다정할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이었는지 생각할 때는 대부분 이미 늦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게 전부다. 그렇게 다시금 손을 맞잡을 수 있기를 바란다.




<순례자>

[1] 자연 속에 온 몸을 내던지고 싶다. 날씨는 상관없다. 겨울은 살을 에는 추위가 있어야 겨울이고, 여름 또한 찌는듯한 더위가 있어야 여름이다. 물론 여름은 끔찍하다. 그래도, 그래야 여름이다. 자연 속에는 치유가 있고, 깨달음이 존재한다. 자연 덕분에 가장 큰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었고, 스스로의 성장을 맛보았다. 자연을 통해 지금 당장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행복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게 되었다.




[2]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에 적응하지 않고 스스로의 주관대로 살아가는 삶을 꿈꾼다. 그것은 예술에 중점을 둔 삶이다. 그 예술을 실천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것이 도태된 삶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도태됨을 희망한다. 도태된 나를 사랑한다. 그런 내가 행복하다. 그러니 타인의 궤변 따위에 더 이상 귀를 더럽힐 이유는 없다.




[3]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삶을 연습한다. 예견하지 않고, 바라지 않는 삶을 말이다. 꿈은 있으나, 그것에 맹목적이진 않으려고 한다. 이루어지면 좋고, 아니어도 어쩔 수 없다. 내가 꿈을 꾸는 이유는, 그곳으로 향하는 내가 좋기 때문이다. 그 꿈이 달성할 수 없는 목표라 할지라도 말이다.




[4] 삶을 버텨내는 게 두렵다. 언제까지 견뎌야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유가 있기에 앞으로 나아간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다. 남들과 비교해 뒤처지고 멍청해 보이는 것은 관심도 없다. 오히려 그렇게 보이고 싶다.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하루라도 빨리 걸러내고 두려운 삶을 마저 이겨내고 살아가야 하니까.




<지난한 검사가 시작되다>

[1] 내가 겪어보지 못한 일에 대한 평론은 무의미하다. 보고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직접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멀리서 어렴풋이 아는 것과 직접 피부로 느끼는 것의 차이는 극명하다. 그렇기에 타인의 삶을 어림짐작 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짓거리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2] 타인의 의중을 파악하려 하는 게 독이 될 때가 있다. 상대는 아무 의미 없이 한 말을 제멋대로 유추한 후 혼자 분노하거나, 상처받는 것이다. 그렇기에 타인을 판단하지 않고, 이해하지 않는 게 훨씬 더 긍정적일 때가 많다. 장점을 파악할 땐 필연적으로 단점도 따라오는데, 나는 단점을 더욱 극대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단점에 가려진 장점은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아주 작은 점이 된다.




<한 무리의 코끼리>

[1]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거절할 수도 없다. 아무리 벗어나려 애를 써도 발 밑에 걸리고 손 끝에 닿는다. 그것에게 대항하려 하는 나의 의지는 말랑한 순두부와 다를 바 없다. 내 인내심에는 처음부터 강직도라는 게 없었던 것처럼 속절없이 으깨지고, 산산조각 흩어진다. 그렇게 원하지 않는 수긍을 받아들인다.




[2] 감정이 미친 듯이 요동치다 갑자기 잔잔하게 가라앉는다. 분명 슬픔이 맞는데, 무엇 때문인지는 모른다. 내가 왜 슬픈 건지, 지금 흘리는 눈물이 슬픔 때문은 맞는지 의아하다. 슬픈 감정의 근원지를 찾아보려 깊게 생각을 해봐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실체 없는 감정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해도 최소한의 이유는 있을 테다. 실체 없는 감정을 만들어낸 이유 말이다. 그 이유를 여전히 알 수가 없다.




<벼랑 끝을 정찰하다>

[1] 나는 모든 것을 책으로 대체하려는 경향이 있다. 말을 잘하는 방법도, 반대로 말을 하지 않고 들어주는 방법도 전부 책을 통해 배웠다. 심지어 병원에 가야 하는 우울증 또한 책으로 극복하려 애썼고 이것은 현재 진행형이다. 정말 위급하면 병원을 찾아야겠지만, 아직은 책으로도 충분하다고 느낀다.


사실 시급한 사안은 따로 있다. 바로, 사람까지도 책으로 대신하려 한다는 것이다. 사람을 만나는 시간보다는 책을 읽는 게 더 좋다. 누군가와 대화하는 시간에 책을 한자라도 더 읽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훌륭한 작가들을 만나는데 주어진 시간은 항상 터무니없이 짧다. 그런데 타인과의 약속이라니, 어림도 없다.


우물 밖 괴물이 되느니, 우물 안 겁쟁이가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고립은 겁쟁이 앞에 불쑥 나타났다.




[2] 에세이를 쓰다 보니, 나를 더 모르겠다. 내가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은 온전한 내가 한 게 맞는지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글쓰기를 하고 있는 동안에도 매 순간 내가 어떤 사람인지 느껴졌고, 다 쓴 글을 읽는 동안에는 또 다른 나를 알 수 있었다. 다른 행위들을 하면 할수록 새로운 나를 알아가게 되었고, 혼란스러웠다. 과연, 몇 개의 내가 존재할까. 그 모든 내가, 진정한 내가 맞을까.




[3] 2022년 나는 서른 살이 되었다. 생각했던 그대로 달라진 것은 없다. 그저 '보편적인 죽음에 더 가까워졌구나.' 하고 생각할 뿐이다. 스무 살의 나는 서른 살의 나보다 유약했다. 50kg으로 깡마르기도 했고, 우울했다. 공황장애를 앓고 있었으며 정상적인 사람과의 교류가 불가능했다. 우울증 모임에 나간 것처럼 주변인들 모두 우울한 사람들뿐이었다.


반면 서른 살의 나는 75kg으로 비교적 건장해졌다. 미약한 우울증은 존재하나 공황장애는 없다. 주변 사람들은 분에 넘치게 선하며, 총명한 사람들뿐이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긍정적인 상황이 연출되었고, 주변에는 선한 사람들만 남게 되어 과분하기만 했다. 서른 살이 된 나는 아무런 감흥이 없다. 그저 모든 상황에, 사람에 감사할 따름이다.




[4] 나는 제대로 쉬는 방법을 모른다. 나태한 하루 일정에 맞춰 바삐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제대로 쉬지도 못한다. 조금 쉬어볼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면 스스로의 무능력함을 자책하기 바쁘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족쇄를 걸어놓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바보가 된다.




<베니의 소원>

[1] 글을 쓰는 사람들은 쓰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불행하다. 그리고 더 행복해한다. 그들은 작은 불씨로도 큰 산불로 만들어낼 수 있고, 작은 글자만으로도 큰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은 큰 아픔을 겪었고, 계속해서 겪고 있다. 그리고 작은 우울증을 꼬리표처럼 평생 매달고 다닌다. 그럼에도 쓰지 않는 사람보다 깊이 웃고, 깊게 사랑한다.




[2]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고통에 매몰되지 않고 이겨냈으면 한다. 우울에 목이 졸려 생을 마감하는 일은 일절 없길 염원하며, 세상의 모든 불상사를 물리치길 기원한다. 항상 그들의 성공을, 행복을 진심으로 바란다.




[3] 나는 변화를 극도로 불편해한다. 싫은 것은 아니나, 적응하는 데 남들보다 긴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렇기에 꽤나 오랜 시간 정체된 삶을 살았다. 사실 계속해서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 벌어졌고, 나의 근간이 뒤흔들렸다. 모든 게 송두리째 바뀌었다.


그렇게 모든 변화를 받아들였고, 스스로를 세포부터 재정립하기 시작했다. 물론, 일정 부분은 다시 안주하는 삶으로 돌아왔으나, 전과 비교했을 땐 확연하게 변신한 부분이 있다. 그레고리처럼 방구석에 박혀 완전한 변신을 하지 않았음에 깊이 안도한다.




<애인 구함>

[1] 내가 감내할 수 있는 고통은 보통 내부에서 온다. 스스로가 만들어낸 허상은 충분히 물리칠 수 있다. 그러나 외부에서 온 충격은 쉽게 이겨내기 힘들다. 가령 불의의 사고 같은 것들은 '내가 만들지 않은 고통'이기에 먼저 남 탓을 하기에 바쁘고, 전반적인 삶 전체를 자조한다. 외부에서 오는 시련의 가장 무서운 점은 실제 시련의 크기보다 배는 커다랗게 인식되고, 맞설 엄두도 내지 못하게 끔 만드는 것이다.


반면 외부에서 온 척하는 고통도 있다. 내면이 불안정하면 겉으로도 드러나고, 불안정한 겉면은 타인들의 회피를 자아낸다. 그렇게 혼자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불안정함은 인정하지 않고, 타인들의 부덕함만을 따져 묻는다. 이것은 명백히 내부에서 온 고통이고,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시련이다. 그렇기에 내부 외부 할 것 없이 일단은 맞서고 본다. 혼자가 어려우면 도움을 청하면 되니까.




<튜머 보드>

[1]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포옹은 난로보다 뜨겁고, 이불보다 포근하다. 그렇게 눈을 감으면 마치 아늑한 집에 와 있는 것처럼 스르르 눈이 감긴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냄새는 수면제와 같다. 그 냄새를 맡다 보면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깊은 숙면에 빠질 수 있고, 그 냄새가 다시금 코를 자극할 때쯤 깨어난다. 평생을 불면에 시달린 나에게는 그 향기가 매번 절실하다.




<엄마와의 북클럽>

[1] 잃는다는 것은 잊는 것과 비슷하게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잃기 싫어도 자연의 순리에 따라 잃게 되고, 잊고 싶어도 뇌리에 박힌 생각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잃다와 잊다는 완벽히 다른 단어지만, 비슷한 것은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는 것이다. 물론 잃지 않기 위해 그리고 잊기 위해 노력하며 발버둥 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다.




<자주색 집>

[1] 이이제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따라서 함무라비 법전도 사랑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남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 나에게 해를 가한 사람도 넓은 아량으로 보듬어주는 행위는 테레사 수녀님과 같은 천사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기에 악으로 다른 악을 물리치는 일을 적극적으로 찬성한다.




[2] 불편한 것들은 무조건 외면하며 살았다. 어떤 영웅담처럼 혹은 자주적인 사람들처럼 당당히 맞서지 않고, 무조건 외면했다. 당장 문제에서 도망치는 게 가장 큰 미덕이라 생각했다. 이런 도망의 역사는 열 살 때부터 시작된다. 당시 담임 선생님의 학대를 어머니에게 말하는 대신 몰래 학교를 가지 않고, 집 근처를 배회하는 게 하루 일과의 시작이었다.


그렇게 며칠 지나지 않아 어머니에게 발각되었고, 원하지 않는 문책이 시작되었다. 당연히 순리대로 선생님은 큰 불이익을 받았고, 어머니는 작은 승리를 얻어냈다. 이후 선생님은 더욱 영악해졌고, 나에게 표면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불이익을 지속적으로 선사했다. 당시 어떻게 버텼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멍한 생각과 확장된 동공으로 등교와 하교를 반복했을 뿐이다.




[3] 내 우울은 치유될 수 있다.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내 목숨을 앗아갈 생각이 전혀 없다. 그렇기에 치유할 방법은 널렸다. 전문가의 상담은 큰 도움이 되고, 그들이 처방한 약도 적당히 먹는다면 괜찮다. 관련 서적들 또한 마찬가지다.


나는 아직 병원에 의존할 정도는 아니다. '사는데 지장 없으니, 그냥 살자'하며 잘 살아내고 있다. 언젠가 다가올 진정한 사랑을 기다리며 열심히 살고 있다.




<마이오피아>

[1] 고통받고, 인내하고, 감내하고, 이겨낸다. 처음에는 이런 큰 고통에 이겨낸 자신이 기특하고 앞으로 올 문제에도 당당히 맞서 싸워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여러 번의 고통, 수백 번의 인내, 수천번의 감내 그리고 의미 없는 승리가 거듭될수록 점점 박약해진다. 그럼에도 약해진 정신과는 다르게 마음의 심지는 굳세지기만 한다. 그렇게 다시금 웃고, 떠들고, 읽고, 쓰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예전과는 다른 조금 더 강해진 사람으로 말이다.




[2] 일부로 감미로운 노래를 듣고 우울해진다. 적당한 우울감이 맴돌 때쯤 노래를 바리톤으로 따라 부르기 시작한다. 솟구쳐 오르는 감정을 억지로 누른다. 한 번은 막아줘야 봇물 터지듯 시원하게 터트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펑펑 운다. 더 이상 속이 시끄럽지 않게 될 때까지 다 쏟아낸다. 나는 슬퍼서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니라, 슬퍼야 하기 때문에 눈물을 흘린다. 웃기게도 눈물을 흘리다 보니 잘 울 수 있는 나만의 방법이 생겼다.


눈물을 쏟아낸 날은 유독 피로하다. 그래서 그런지 불면증에 시달리는 내가 잠도 참 잘 잔다. 잠을 잘 잔 날에는 유독 그 냄새가 그리워진다. 나를 깊은 수면으로 쉽게 인도했던 그 따뜻하고 고소한 향기가.




[3] 우울에 잠겨 아득해진 정신을 붙들고 책상에 앉아 있었다. 몇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를 정도로 오랜 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벽만 바라보고 있었다. 여러 생각에 머릿속이 어지러웠지만 어느새 생각도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공허만 남은 듯 벽지만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꺼졌던 정신의 불이 미약한 빛을 내며 켜졌다. 나는 의자를 뒤로 밀며 일어났다. 더 이상 우울에 나를 맡길 수 없다는 생각에 대충 옷을 걸치고,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현관을 통해 집에서 몸을 빼냈다. 피부에 닿은 공기는 기분 좋게 차가웠고, 겨울 냄새는 산뜻함 그 자체였다.


햇빛은 사진 찍기에 최적의 밝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나는 동네 뒷골목만 골라서 다니며 무작정 사진을 찍었다. 추위에 손의 감각이 사라질 정도로 얼얼해질 때쯤 손을 주머니에 넣고, 발길이 닿는 대로 걸었다. 손이 녹으면 다시금 셔터를 눌렀고, 얼면 다시 정면을 응시하며 걸었다.


이내 언제 밝았냐는 듯이 햇빛은 자취를 감추었고, 누군가 하늘에 홍시를 섞어놨다. 지친 다리를 달래줄 겸 계단에 앉아 노을이 저물어가는 하늘을 감상했다. 사진을 찍어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냥 바라만 보았다. 한참 후 새 하얀 구름이 섞인 파란 하늘과, 태양에게 질 수 없다는 듯 엄청나게 밝은 달이 나타났다.


진정한 밤이 분명한데도 참 밝았다. 다시금 환했다.




노을이 저문 후의 산책로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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