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 민주주의는 없다

소멸한 정의

by 박진권

대한민국에

민주주의는 없다


솔제니친은 스탈린의 공포정치와 흐루시초프의 반동 정치 시대 아래 정치적으로 억압받는 삶을 살았다. 그는 20세기 중반, 2차세계대전을 겪으며 군사 심의관 회의에서 복권되기까지 대략 11년간 유형지를 돌며 강제노동수용소를 전전한다. 대부분 수용소를 배경으로 한 책들을 집필했고, 노벨문학상 부문에 오르기도 한다. 하나, 서구에서 정치적 목적으로 솔제니친을 선정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불거지며 반대파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더욱이 소련에서도 외면받기까지 하며 그의 작품 대부분은 외국에서 발표되었다. 그는 결국 20세기 말 소련에서 추방되어 서구와 미주 지역에서 오랜 기간 망명 생활을 했으며, 21세기까지 러시아의 민주주의를 위한 정치활동을 지속하다 2008년 9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제호: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저자: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서평: 박진권, 번역: 이영의 , 출판: 민음사




*반동주의(反動主義, reaction ism)는 과거의 체제나 질서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정치 이념으로서, 진보주의에 대한 정반대의 개념이다. 수구주의나 보수주의와 동일한 개념으로 취급되는 예도 있다.


소멸한 정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에는 정치적으로 완전한 백색인 슈호프가 등장한다. 그 순백의 도화지에 구정물과 다름없는 검고 탁한 강제노동수용소를 칠함으로써 당시의 혹독함을 표현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악의 축 페추코프와 수용소의 간부들조차 스탈린의 노예이자 정치적 희생물이다. 보통 소설에서 등장하는 악당은 개인의 비뚤어진 신념을 관철하기 위해 악행을 자행하지만, 이들은 그렇지 않다. 주인공인 슈호프와 반장 추린 그리고 영화감독 체자리를 포함한 악당들 모두 정치적인 신념이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백색의 도화지가 더럽혀져도 본인을 인지하려 노력하는 사람과 본인을 놓아버린 사람 두 부류로 나뉠 뿐이다. 소설은 참혹함을 담담하게 풀어낸다. 수용소의 평범한 하루를 나직하게 그려나갔기 때문이다. 평범하다 못해 안온한 하루에 잔잔하게 녹아있는 비극은 독자들이 탄식을 뱉어내게 만든다.


이와 비교했을 때 대한민국도 신체적 자유를 제외하면 크게 다르지 않다. 내 편이 아니면 적으로 간주하는 이분법적 사고가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동조하지 않으면 공산주의자나 친일파로 낙인찍는다. 사실상 허울뿐인 민주주의 국가라고 봐도 무방하다. 조지 오웰의 《1984》, 《동물농장》, 조셉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을 보면 알 수 있듯 양극단은 똑 닮아있다. 이렇듯 맞닿은 자들의 편향은 결국 비극을 불러온다. 과한 자유는 혼란을 일으키고, 심한 억압은 개인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


분단 될수록 나라는 점차 시들어 간다. 남과 북으로 나뉜 나라에서, 친중과 친일로 또 갈라진다. 거기에서도 남자와 여자가 반목하고, 세대 간의 불화가 끊이질 않는다. 지식인들과 정치가들은 이 행태를 말리기보다 부추기기까지 한다. 우리나라에서 평화는 사라진 지 오래다. ‘내가 맞고, 너는 틀렸다.’, ‘우리가 정의고, 너희는 악이다.’라는 신문은 종이 아까운 줄 모르고 끊임없이 생산된다. 어떤 이즘의 정확한 정의도 모른 채 맹목적으로 믿고 따른다. 밖으로 나온 선택은 숭고하고, 나오지 않은 사람은 비난한다. 양극단으로 치우친 인간들이 나라의 뿌리를 좀먹는 벌레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들의 바람대로 한쪽이 완전하게 사라지면 우리나라에 평화가 올까? 평화와 번영은 그런 그릇된 이상에서 찾아오지 않는다.


213쪽, 이러한 정치권력이 한 무고한 개인에 대해 자행하는 학대와 희생의 요구는 비단 스탈린 시대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상 끊임없이 반복되어 자행되어 왔다는 점과 지금까지도 그것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이 작품은 모든 억압하는 지배권력에 대한 고발이며, 약자 개인 개인에 대한 숭고한 인간애를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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