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창비시선
삶
먼 과거에 떨어진 과일은 지나가는 배고픈 이에게 조금의 생명력을 나누는 일이었을 것이다. 아이에게는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높은 과일이 저절로 떨어짐으로써 어떤 희망의 틈새를 엿볼 기회가 되었을 수도 있다.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사과가 나무가 될 확률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사과를 먹고 씨앗을 발견한 사람이 좋은 땅에 심었을 때, 열에 아홉 번은 발아한다. 작은 생명을 나누고, 또 다른 큰 생명이 탄생하는 것. 끝없는 선순환의 굴레. 의도에 의해서든, 외부 요인 때문이든 결국 종착역은 배려이자 구원이다. 이기심이 만연한 현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귀한 일이다. 겨우 떨어진 과일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까닭이다.
인간은 언제부터 서로를 미워했을까. 근원을 알 수 없는 감정. 종교적으로는 부족한 믿음에 깃든 악마 때문에, 과학적으로는 진화 사회 심리학적 또는 신경 과학적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적군과 아군을 식별하고, 내집단과 외집단 편향에 사로잡힌다. 아니면 애초에 호르몬 불균형으로 뇌가 아픈 걸지도 모른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무슨 이유 때문일까. 그들에게 정말 어떤 큰 잘못이 존재하는가. 나는 그토록 선하고 완전무결한 인간인가? 그들을, 심판할 자격이 우리에게 있을까. 근원을 알 수 없는 감정, 근거가 필요 없는 감정, 현재의 대한민국에 가장 백해무익한 감정.
새롭게 마주한 오늘, 나는 어제를 기다린다. 버티기 힘들었던 어제를, 고통스러웠던 어제를, 행복하고 단란했던, 끝이 없을 거라 믿었던, 평생 함께할 줄 알았던, 겁이 없었던, 겁이 많았지만 잘 이겨냈던, 눈물 흘렸던, 슬픔에 사무쳤던, 내일이 기다려지지 않았던 그러한 어제들을 버텨낸 나를 기다린다. 오늘의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서, 오늘을 잘 연소하고 싶어서. 저 불안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이 어제의 나이기를, 그 용기가 끊이지 않기를 기원하며, 나는 오늘도 어제의 나를 기대한다.
한 번 떠난 고향으로 돌아간들 그 당시의 정취를 재현할 수 없다. 개발되지 않은 지역이라 하더라도 시간의 흐름으로 인간의 눈은 뿌예지고, 생각은 탁해지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인간이 고향을 찾는 이유는, 이미 펼쳐진 미래 즉 운명을 거스르기 위함이다. 고된 하루, 한 달, 일 년의 보상이 물질이 아님을 알게 된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고향을 찾는다. 그곳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어쩌면 부활을 위해.
낙과(落果)
내가 땅에 떨어진다는 것은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햇빛에 대하여
바람에 대하여
또는 인간의 눈빛에 대하여
내가 지상에 떨어진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다
내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그동안의 모든 기다림에 대하여
견딜 수 없었던
폭풍우의 폭력에 대하여
내가 책임을 다한다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책임을 지는 것이므로
내가 하늘에서 땅으로 툭 떨어짐으로써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