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연, 창비시선
겨울에 반바지 입고 모래사장에 맨발을 올려둔다고 여름이 되진 않는다. 마찬가지로 여름에 연인과 헤어지고 눈물 콧물을 쏟아내며 길거리를 멍청하게 걷는다고 가을이 왔다고 말할 수는 없다. 꽃이 보인다고 무조건 봄이라는 말은 동백꽃을 슬픔에 잠기게 한다. 다이소 입구 평대나 매대에 선크림이 최상단으로 올라오면 여름이라는데, 사실 겨울 자외선이 더 위협적이다. 아, 이건 맥락에 어긋난다. 어쨌거나, 단락을 나누지 않았다고 시가 아니라는 판단은 조금 더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회한, 극심한 궁금증에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 한 걸음 옮기고, 다시금 뒤를 살피는 행동을 반복한다. 얽히고설킨 타자들의 손, 네 개의 발자국, 같은 곳이라 믿는 목적지. 문제가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을 때 다시금 뒤를 돌아본다. 시선은 저 먼 꽃밭에 얹혔는데, 마음은 아직도 덥고 추운 모래밭이다. 싱싱한 사과를 집어 든다. 양손을 이용해 반으로 쪼개 건넨다. 반쪽짜리 사과는 씨앗조차 돌아오지 않는다.
완전무결, 국내산이면 모든 게 해결되는가. 방목한다고 해서 고품질이라는 것, 입에 들어와 어떻게 씹히고, 무슨 맛을 자아내든 비싸면 그만. 모든 게 다 물질로 해결된다고 믿으면서 부자를 혐오하는 사람. 돈을 따라야 한다면서 성공한 사람을 마주하면 은은한 시기와 질투의 아우라를 감추지 못하는 짐승. 본인과 다른 타인은 무조건 믿지 않는 미물. 그런 인간들 사이에 글감이 부족한 쥐새끼 한 마리가 숨어있다.
서재 한 가운데서 책장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시선을 거두고 자리에 앉아 글을 쓴다. 세상의 부조리, 누군가의 악행, 선한 사람, 짐승, 미물까지. 지켜보면 안다는 속 좋은 말, 실상 끝까지 바라보는 사람은 없다. 의심을 확신할 수 없을 때 초점은 심지를 잃고 청각은 달팽이를 잃으니까. 그들이 원하지 않는 길로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오해의 손길이, 곡해의 눈길이 따라온다. 조급해진 나는 다시금 책장에 시야를 걸어 둔다.
어둠은 둘이서 견디기 좋은 추위야
그는 침대 그림자 속에 몸을 밀어 넣는다
맺히는 것들이 모두 비상구로 보여
그는 너무 쉽게 회개하네
나를 향한 광채를 보여줄 듯 말 듯
벽 뒤로 사라진 그는
나더러 죄목을 만들어 붙이는 취미를 가졌대
얼음을 깨물어 먹으면
손 닿지 않는 들판에서 내 늑골이 만져진다
용서한 적도 없는데 편안한 얼굴
뻔뻔스럽게 드러나는 창밖의 눈발들
그를 향해 침을 뱉으면
꼭 내게서 침 냄새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