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통의 언어
나는 추상적인 개념을 빠르게 파악한다. 그것을 내면화해서 복합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것을 즐기는 것이다. 철학적 사유를 담은 내 글에선 긴 문장 구조와 은유 그리고 관념적 표현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또한 세계를 파편이 아닌 하나의 구조로 인식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니까, 산문과 소설 그리고 시를 넘나들 때 의미의 구조를 조립하듯 글을 쓴다. 종교와 철학 그리고 개인의 정체성과 감정을 세부적으로 분리하지 않고 하나의 내면 구조 안에 통합하려고 한다. 그 시도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꽤 많아, 스스로 왜 이렇게 쓰게 됐는지, 독자에게 어떻게 전달될지를 매번 질문하곤 한다. 비판은 겸허히, 비난은 부분적으로 받아들일 뿐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진 못한다. 평론가들이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글 박진권
대부분의 크고 작은 사건을 직관과 사고를 중심으로 판단하고 해결하려고 한다. 다만 특정 문제에선 감정의 함의를 끝내 무시하진 못한다. 기술적 문제는 대단히 빠르게 결정하고 행동하지만, 미학적·관계적·정체성과 관련한 선택은 신중하다 못해 회피하기도 한다. 세상에 완벽한 정답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받아들이지만, 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 나는 거의 항상 가능한 대안 모두를 검토한다. 결국 불완전한 채택이라는 것을 알면서 그것을 지혜라고 착각한다. 단기 쾌락보다 장기적 가치와 성과를 추구하는 경향이 분명하지만, 때로는 완전하게 방전되어 누구보다 단기적 쾌락에 몸을 맡긴다. 그러면서 입으로는 성실과 노력을 뱉어낸다.
어쩌면 나는 완성도 높은 것만 의미 있다는 전제를 깔아두고 글을 쓰는지도 모르겠다. 독자와 세상의 시선을 인식하지만, 그것을 의식하고 있는 자신을 문제로 여기고 검열한다. 어떤 지인은 나의 그런 성향 때문에 절제되고 깊은 글이 나온다고 했지만, 시를 쓰는 너는 타자를 넘어 외부와의 상호작용에서 힘을 잃는다는 첨언도 남겼다. 나의 시는 새로운 언어와 같다. 물론 그 언어가 타인과 얼마나 통할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은 적다. 언어는 결국 누군가와 통해야만 언어로서 존재할 수 있기에 고민은 깊어만 간다. 지혜로운 사람의 조언을 듣고도 고뇌만 거듭할 뿐 크게 바뀌는 것은 없다. 결국 타자와의 연결보다 나만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독자와 소통하는 작가의 꿈을 안은 인간이 소통 불가능성의 독창성을 갈구하는 참으로 역설적인 상황이다. 그렇기에 지혜로운 조언을 머금은 채 살아가려 노력한다.
원래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들은 독수리처럼 높은 곳에 홀로 둥지를 트는 법이다. -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