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이 결여된 삶, 인간에 대한 불신

공감 없는 사람의 변론

by 박진권

감정이 결여된 삶,

인간에 대한 불신


동물은 말썽 피우지만,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평생 보살펴야 할 존재가 확실하지만, 배신은 못 하는 것이다. 무지개다리를 건너는 것을 제외하면 그들로 인한 상처는 단 한 줄도 없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나는 인간 본성에 불신을 품고 있다. 그럼에도 관계를 지속하는 이유는, 결국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는 것을 아주 잘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살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감정 결여에 관련된 것이었다. 옅게는 ‘무뚝뚝하다.’, 진하게는 ‘감정이라는 게 있느냐.’는 부정 섞인 말이었다. 나는 무심하고 감정의 동요가 적은 편은 맞다. 슬픈 영화를 봐도 눈물이 나오지 않고, 타인의 고통은 누구나 겪는 개인적인 시련이라고 생각한다. 고통 없는 삶은 없기에 자조적인 표현을 자주 뱉어내는 사람은 최대한 멀리한다.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것이 타인의 헛소리고, 세상에서 가장 혐오하는 것은 그 헛소리를 믿고 외치는 고성이다. 보편적인 상황을 제외한 무분별한 공감과 공감 없는 억지 공감을 악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이들을 굉장히 편협하고, 단편적으로 시선으로 관조하며 해석하고 결론짓는다.


박진권




존재와 소리 없는 사랑

문학 관련 글을 쓸 때면 잔잔하던 감정이 크게 동요하고 소모된다. 마치 누군가와 감정적으로 크게 다툰 직후처럼 심장이 두근거리고, 어쩐지 진기가 쇠해진 게 느껴질 정도다. 특히, 호흡이 짧은 글일수록 그 증상이 더욱 도드라진다. 장편 소설은 호흡도 길어서 잔잔한 동요 정도로 끝난다. 그러나 강렬한 단편 소설은 그 여운이 한참 동안 지속되기도 한다. 시는 말할 것도 없이 서너 편 정도 작성하면 가슴을 직접 타격당한 것처럼, 신음이 새어 나오기도 한다.


중·장편 소설을 창작할 땐 호흡이 여러 번 끊기기도 한다. 어쩌면 감정의 동요가 적고, 그것을 길게 이끌어가지 못하는 집중력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미흡한 실력 탓이다. 반면 단편 소설의 호흡 같은 경우는 상당히 오래간다. 작문 중에도 작문 후에도 그 감정의 여운이 쉽게 휘발되지 않는다. 완전히 다른 작품으로 넘어가기 전까진 작품 속에 푹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시는, 완전히 다른 장르라고 봐도 무방하다. 천외천, 문학 위의 문학 같은 느낌이다. 시로 인한 감정을 툭 건드리면, 며칠이 지나도 빠져나오지 못하는 상황이 허다하다. 겨우 100~200자 내외의 글을 작성하고 일주일을 허우적거렸다, 나도 믿지 못할 경험을 마주했다. 일하다가도 문득문득 떠오르고, 꿈에서도 재현되었다. 은은한 고통을 다시금 마주하니, 스스로 아직 덜 자랐다는 것을 실감했다. 내면에 숨어있던 아이는 성장하지 못한 채 아주 오랫동안 갇힌 것이다. 그 녀석을 언제, 어떻게 성장시킬지 눈앞이 캄캄해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시를 등지고 살았다.


최근 다시금 시에 푹 빠지고 말았다. 여전히 감정이 요동치지만, 나름 성장한 탓에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일과 사적인 감정의 영역은 거의 완전하게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내면까지 무심한 어른이 된 것 같기도 해서 시원섭섭하다. 긍정적인 부분으로는 감정적 사유 공간이 좁아진 건 아니라는 것이다. 깊어져도 괜찮은 특정 장소와 시간엔 과거의 미숙한 때보다 더욱 깊게 빠져든다. 그저 탈출할 방법을 터득한 것뿐이다. 과거엔 한 달에 한 권 읽기도 힘들었던 시를 이제는 열네 권을 독파한다. 단 몇 줄만 쓰고도 부족한 재능에 한탄했던 내가 이제는 하루에 한 편에서 최대 네 편 정도의 시를 토해낸다. 책의 권수로 단단해진 내면을 표현하는 것은 너무 원초적일지도 모르겠다. 내 마음속 어항은 책을 한 권만 들여도 매번 넘쳐흘렀다. 그 넘친 물을 닦아내는 것만 한나절이 걸려 곤욕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어항의 크기도 커졌고, 들이는 책의 무게도 핵심을 제외한 부산물을 덜어내 대폭 줄어들었다. 만약 넘칠 것 같으면 배수로를 통해 바깥으로 시원하게 배출할 수단도 생겼다. 넘치는 감정을 나름대로 조절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전히 가족을 제외한 타인의 감정엔 공감하기 어렵다. 인도에 볼록 솟아있는 돌부리 같은, 발에 걸리면 불편한 현상 정도로 인식한다. 그들과 벽돌을 구분하지 않음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사랑하는 사람과 소중한 친구가 곁에 머물고 있다. 어느날 계속해서 신경 쓰이는 돌부리를 자세히 관찰하니 원석이었다. 사람이라면, 원석에 관심이 생기는 게 당연했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사실 그것은 원석이 아닌 그 자체로 다이아몬드, 루비, 에메랄드였고, 내 눈에 씐 편견의 막이 벗겨질 만큼 아름답고 반짝였다. 소중한 사람을 만난 경험 덕분에 사람에 대한 불신이 옅어지기도 했다. 이따금 타인에게 마음을 열어볼 생각도 하게 됐다. 어떠한가, 아직도 나에게서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가.


어떠한 성격을 지닌 사람도 자기 자신에게 그냥 맡겨 두고 전적으로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누구든 개념과 원칙에 의한 지도가 필요하다. -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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