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짐을 바리바리 싸고 출발하려는 순간부터 비가 내렸다. 출발하기 전에도 100번은 넘게 고민했다. 그런데 이럴 땐 나의 무모함이, 추진력이 도움이 된다. 신으려던 운동화를 가방에 넣고, 샌들을 신고 자전거의 페달을 밟았다. 8월이니까 날씨 걱정은 딱히 안 했는데, 비가 오다 보니 체온이 떨어져서 추웠다. 그리고 바퀴가 터졌다. 처음 바퀴가 터져서 패치로 메운후에 다시 출발했는데, 제대로 안됐는지 다시 바람이 새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울고 싶은 순간이었다. 비가 오니 사람도 없고, 날도 춥고, 돌아가지 않고 계속 가는 게 용할 지경이었다. 만약에 이 여행을 시작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면, 그 이유를 반대로 핑계를 대서 돌아올 수 있지 않았을까? 오히려 특별한 이유 없이 떠났기 때문에 반박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냥 내 성격대로 밀어붙였다. 시작했음 끝을 보자.
오늘 출발해야 하나? 내일 출발해야 하나? 아니 내일 출발하면 일정이 꼬일 텐데...
그런데 또 출발 안 하면 시작도 안 할 것 같은데...
그럼 언제 시작할 수 있지?
팔당대교에 가면 라이더들에게 유명한 초계 국숫집이 있다. 나는 몸도 추웠고, 감기 걸릴까 걱정이 돼서 닭칼국수를 먹었는데 진짜 뭔가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서울을 벗어나면서, 아 여기까지만 가면 더 갈 수 있을 것 같다 속으로 생각하면서 달린 보람이 있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라이딩하다 온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서 신기했다. 나처럼 이 빗속을 뚫고 달리는 분들도 계시는구나 하는 묘한 동질감과 안도감이 느껴지니 자신감도 생겼다. 그렇게 든든히 배를 채우고 다시 달리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 다른 난관에 봉착했다. 작은 하천이었을 도로가 비가 많이 온탓에 물에 잠겨가고 있었다. 당황해서 이리저리 루트를 찾아봤지만 앞에 하천을 건너지 않으면 한참을 돌아가야 했다. 앞에 서있길 한참, 여기서 더 지체하면 진짜 건널 수 없다는 생각에 자전거를 끌고 하천을 건넜다. 바퀴 정도까지 물이 찼고, 꽤 급한 물살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온 정신을 집중했다. 그때 아저씨 한분이 다가왔다. 아유 이 빗속을 뚫고 여길 건너면 어떻게 하냐고, 위험하다며 하천 건너기를 도와주셨다. 정말 감사했다.
어떻게 가다 보니 강천보에 있는 강천보 게스트하우스까지 도착했다. 그때 저녁에 뭘 먹었는지 어떻게 하루가 지나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도 선명히 기억에 남는 건, 그날 그 갈등 속에서도 출발했던 나. 서울을 벗어나자 빗소리와 빨간색 길과, 푸른색 풀과 평소와 달리 싱그러웠던 비 내음이다. 빗속을 뚫고 손님이 없을 거라 생각하셨던 주인아주머니가 반겨주던 모습들도 따뜻했던 기억이다. 그래도 이렇게 뭔가를 했기에 추억하고 뿌듯해할 수 있어서 참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페달을 내디뎠던 나에게 고맙다. 오늘을 추억할 수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