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보다는 행동, 일을 사랑하는 나
누군가 나한테 나 자신이 좋냐고 물어보면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다. 그렇다고. 나는 내가 좋다. 나의 끈질김이나, 성실함이나, 추진력이 좋다. 자기 일을 사랑하는 모습이 좋다. 말로만 하지 않고 행동으로 하는 모습이 좋다. 발전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좋다. 살면서 내가 느꼈던 "자기 효능감"을 통해서 나는 내가 더 좋아졌다. 20대에 내가 나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크게 세 가지의 에피소드가 있다.
개발자가 되고 처음엔 많이 불안했다. 일을 하다 보니, 경력 개발자들은 떠났고 사수 없이 혼자 개발을 해야 했던 나에겐 매일이 물음표였다. 잘하고 있는 걸까? 잘할 수 있을까? 뒤쳐지는 게 아닐까? 이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꾼 순간은 내가 처음으로 플레이스토어에 앱을 게시하고, 한 달 뒤였다. 경력이 만 1년도 안된 내가 설계부터 기획, 디자인, 앱 개발까지 모든 일을 맡아서 했다. 당시에 코드리뷰를 받고 싶어서, 크몽에서 강의를 하는 개발자분께 연락해서 리뷰를 받기도했다. 우여곡절 끝에 출시를 하고 나서도, 발견하지 못했던 오류에 대한 피드백으로 고곤분투 했었다. 그렇게 한달정도 지나니 정말 실감이 났다. 내가 만든 앱이 플레이스토어에 올라갔구나. 실제 서비스도 하고 있고 사용자들의 피드백도 받고 있구나. 이 일을 계기로 나는 좋은 개발자가 되기 위해 온힘을 다하기로 결심했다. 누군가의 삶을 조금 더 나아지는 앱을 만들겠다고. 이게 나의 사명이라고.
살면서 혼자 여행을 한 적이 딱 두 번이 있다. 그중에 나의 의지로 한 홀로 여행은 국토종주가 유일했다. 시작은 순례자의 길을 걷던 길 위에서였다. 지구 반대편에서 1,000 km 가 되는 거리를 걷고 있는데, 정작 우리나라의 길을 이렇게 걸어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걷는 것은 해봤고, 한국에 가면 이런 긴 시간의 여유는 없을 것이니 자전거로 국토종주를 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전 여행에서 다짐했던 것을 2년 뒤, 이 꿈을 이루고 첫 번째 휴가 때, 할 수 있게 됐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국토종주를 할 계획을 세우고 출발 첫날 비가 왔다. 혼자 하는 여행이고, 계획이야 언제든 바꿀 수 있었지만, 왠지 오늘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집 앞에서 힘껏 첫 페달을 밟았다. 비는, 정말 쉬지 않고 많이 왔다. 8월의 폭염을 걱정했던 나는 비 오는 도로를 달리며, 감기를 걱정했다. 그 와중에 자전거 바퀴가 터져서 멈추고, 입술은 파래졌다. 장대비에 숙소마저 찾기 어려웠다. 그렇게 첫날 라이딩에 목표한 곳에 도착했을 때, 나에게 박수를 쳐줬다. 사실 이 이후에도 순탄한 라이딩은 없었다. 일정을 맞추기 위해 계획에도 없는 야간 라이딩을 했을 때는 정말이지 너무 무서워서 죽을 것 같았다. 국도라 가로등 하나 없었고, 심지어 핸드폰 배터리까지 얼마 남지 않아, 체력을 다 끓어 모아 달렸던 그 두 시간의 공포는 여전히 잊히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착했던 길 끝에는, 가슴 벅찬 뿌듯함이 있었다. 내가 나여서, 해내서, 포기하지 않아서, 결국 이 도착점에 서있는 내가 못 견디게 좋았다.
조선소에서 설계 엔지니어로 있을 때 나는 시추선이라는 해양플랜트의 기계 설계를 맡았었다. 이전에 설계라는 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는데 일을 하면서, 오히려 그 반대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설계를 할 때, 이미 계약 단계에서 정해진 "스펙"이라는 것이 있다. 이 스펙에는 장비의 사양, 가격, 테스트 방법 등이 명시되어 있다. 내가 맡은 장비 중에는 "C&K Manifold"라는 장비가 있었는데 시추선에 들어가는 안전 장비 중 가장 중요하고, 비싼 장비였다. 이 장비는 시추선에 설치되고 테스트하는 과정을 항상 거쳤는데 그 비용이 어마어마했다. 그런데 이 장비가 출고될 때 필수적으로 테스트를 하고 필드에 도착했다. 그렇다면, 설치가 된 이후에 테스트해야 할 이유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나는 테스트 필수사항 안내와 승인을 해주는 DNV 선급의 룰북을 샅샅이 뒤졌다. 추가로 다른 선급의 룰북, 내가 맡은 호선이 아닌 다른 호선들의 스펙도 함께 검토했다. 며칠 밤낮을 새우며 검토한 결과 그 어디에도 설치 이후에 이 장비에 대한 테스트가 "필수"라는 사항은 없었다. 단지 관례처럼 "스펙"에 이 내용이 포함이 되어 있었을 뿐이다. 나는 검토한 사항을 사수님께 보고했고, 다시 체크한 결과 이 사항이 필수가 아님을 확인받았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문서에 "필요하지 않다"라는 내용이 명확히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단지, 필수사항에 해당 내용이 없을 뿐이었다. 그래서 이를 선급에 확인받기 위해 지속적으로 연락을 취했고, 메일, 전화 회의 등을 통해 근거를 마련해갔다. 이후에 미국 휴스턴 파견을 갔을 때, 따로 DNV 선급과 연락을 취해 혼자서 미팅에 참석했었다. 이때 선급의 검사관을 만나 해당 내용에 대한 견해를 듣고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검사관마저도 당연한 사항인 줄 알았던 부분을 나로 인해 다시 한번 검토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동안 고생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 서면 한장은 내가 회사 생활 중 제일 잘했고, 기억에 남는 일이었다.
당연하다는 생각에 회사의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고 지나갔던 일을 끈질기게 파고든 끝에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고, 갑이라고 할 수 있는 선주와 협상 시 사용할 수 있는 카드까지 얻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문서 검토뿐만 아니라, 선급에 직접 찾아가 해당 사항이 필수가 아니라는 서명까지 받아 공신력도 얻을 수 있었다. 내가 다니는 회사가 아주 크고, 내가 하나의 부속품 같을 지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소중한 경험을 얻었다. 이렇게 설계는 정해진 룰 안에서, 비용을 절감하고, 필요 없는 내용을 빼고, 위험을 없애는 유에서 무로 가는 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