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씨의 대학원 레포트 (1)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종교생활의 원초적 형태』에서 호주의 토테미즘 연구를 바탕으로, 종교의 기원과 사회적 역할에 대해 심층적인 탐구를 진행했다. 뒤르켐의 이 연구는 종교 자체의 내용적 특징을 다루기보다는 종교라는 사회적 제도가 가지는 사회적 통합 기능을 밝히는 데 주력한다. 종교는 신 혹은 성스러운 것에 대한 ‘신념들의 덩어리’라기보다는 ‘잘 규정된 의식 관행들과 제도적 형식들’로 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사회적 통합을 이룰 수 있다는 점이 종교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라고 강조한다.
이러한 종교의 사회 통합적 기능은 과거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데, 앞서 『분업론』에서 밝힌 바 있듯이 뒤르켐은 ‘개인 예찬’이 강조되는 근대사회에서도 도덕률에 근거한 사회적 통합이 존재한다는 점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아무리 ‘개인 예찬’의 영향력이 커진다 하더라도 인간은 사회의 틀 안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유기적 연대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회적 통합을 통해서 삶을 영위할 수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통합의 성격이 바뀌었을 뿐이지, 통합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현대 한국 사회를 생각해 보면 이러한 뒤르켐의 주장이 과연 현실정합성이 있는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유기적 연대’라는 뒤르켐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일 수도 있겠지만, 과연 2023년 한국 사회에 어떤 식의 ‘유기적 연대’가 작동하고 있는지 의구심이 생긴다. 특히 뒤르켐은 사회 통합을 이끌어 내는 종교적 의례(儀禮, ritual, 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심지어 ‘의례가 없다면 사회가 없을 것 (no ritual, no society)’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도덕적 이기주의’가 극단화되어 공동체 구성원들이 파편화되어 버린 현대 한국 사회에서 어떤 종류의 사회 통합적 의례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을까? 오늘날 나타나는 광범위한 ‘의례의 종말’에 대해 철학자 한병철은 이것은 한국 사회의 문제만이 아니며 자본주의가 극단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현대사회의 보편적인 문제라고 지적한다.
연대의 매체로 기능하는 상징은 오늘날 점점 더 사라져간다. 탈상징화와 탈리추얼화는 서로의 조건이다. 사회인류학자 메리 더글러스는 놀라움을 표하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우리 시대의 가장 심각한 문제들 중 하나는 공통의 상징을 통한 결합이 소멸되고 있다는 것이다 […] ‘리추얼(ritual)’은 거부감을 일으키는 단어, 공허한 순응주의의 표현이 되었다. 우리는 모든 유형의 형식주의에 대한, 심지어 무릇 ‘형식’에 대한 보편적 반란을 목격하고 있다. (한병철, 전대호 역, <리추얼의 종말>, 2022, p.15)
‘견고하고 녹슨 모든 관계들은 오래되고 존귀한 생각들 및 의견과 함께 해체되고 새롭게 형성된 것으로 모두 자리를 잡기도 전에 낡은 것이 되어 버린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처럼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를 막기 위한 자본주의의 끊임없는 기술 혁신과 ‘생산 강제’로 인해, 현대인들은 반복적인 의례를 ‘형식주의’로 치부하고 집착적으로 새로운 정보에 접속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미디어의 발달로 인한 매체 중독 현상들은 더욱 이러한 경향을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 한병철의 비관적인 입장이다.
그렇다고 해도 한국 사회가 아직까지 구성원들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의례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국가적 스포츠 행사와 같은 적극적 의식(의례)들을 통해 주기적으로 공동체적 연대감을 확인하거나, 국가적 재난에 맞서 슬픔을 공동체적 차원에서 공유하는 추모 행위, 즉 속죄적 의식(의례)들이 남아 있다는 측면에서 그 통합의 근거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념적, 정치적 대립으로 의례의 성격과 중요성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쉽사리 이뤄지지는 않고 있지만.
그런데 여전히 존재하는 한국 사회의 사회적 통합 의례들을 하나씩 탐색해보면서, 필자는 한국 사회의 가장 중요한 의례 한 가지가 공동체 구성원에게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여러 가지 의례 중에서 ‘성년 의례’ 혹은 ‘입문 의례’의 측면에서 한국 사회는 ‘대학 입시’라는 결정적인 의례를 근대사회 형성 이후부터 꾸준히 치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통과 의례’를 연구한 아놀드 반 제넵은 ‘입문 의례’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 예식들 가운데 어떤 예식들에서 신입자는 죽은 사람처럼 여겨지고, 입문식 내내 죽은 것처럼 생각된다. 그 예식은 어느 정도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이루어지며, 신입자를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약화시키는데, 그것은 아마 유아 시절의 삶의 모든 기억들을 잃어버리게 하려는 것 같다. 그 다음에 긍정적인 훈련이 시작된다 : 부족의 법규를 가르치고, 신입자 앞에서 토템 예식들을 거행하며, 신화 이야기를 들려주는 등 교육이 천천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 그것은 그 부족의 성인 집단의 영원한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여하려는 것이다.
(아놀드 반 제넵, 김성민 역, <통과의례>, 달을 긷는 우물, 2021. p.92)
원칙적으로 한국 사회는 일정 연령에 도달하기만 하면 성인으로서 공적인 지위를 획득할 수 있다. 그러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나이가 찬다는 것만으로 어른이 될 수 없음을 잘 알 수 있다. 그 과정에서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대학 입시라는 기나긴 입문 의식이다. 중학교, 심지어는 초등학교에서부터 준비하기 시작하는 이 기나긴 입문의식은 한국 사회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다. 신입자들을 ‘죽은 사람’처럼 여기고,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약화’시키는 과정이라는 측면에서 ‘입시 제도’는 입문 의식의 중요한 특징을 제대로 구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사회의 온전한 구성원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 입시라는 ‘입문 의식’을 거친다는 것은 각각의 구성원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 원래 입문 의식을 거치는 신입자들은 다음과 같은 심리적 변화를 겪게 된다.
그들은 마치 새로워지기 위해서 획일적인 조건으로 변화되기를 강요당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한 인생의 새로운 정황에 자신을 적응하게 하는 새로운 힘을 전수 받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수련자들 사이에는 강한 동료의식과 평등의식이 신장되기 마련이다. 서열이라든가 신분이라는 세속적인 식별의식은 사라지거나 동질화된다. (빅터 터너, 박근원 역, <의례의 과정>, 한국심리치료연구소, 2005. p.146.)
자신이 그전까지 어떤 지위에 있었건 간에 동시대의 다른 입문자들과 함께 고통스런 입문 의식을 견뎌내면서, 공동체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의 무거운 의미와 다른 이들에 대한 존중과 연대의 감정을 깨닫게 되는 것이 입문 의식의 가장 중요한 의의이다. 그런데 한국의 ‘입시 제도’라는 ‘입문 의식’은 어떠할까?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은 같이 의식에 참여한 공동체 구성원들을 단 한 명이라도 더 밟고 일어서야 한다는 극단적인 경쟁 의식을 장시간에 걸쳐 경험하게 될 뿐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 사회의 거의 모든 구성원들은 뒤르켐이 말한 의례를 통해 ‘극단적 경쟁 의식’이라는 사회 구성원리를 체득하게 된 셈이다.
수능 한 문제, 내신 0.1등급 차이로 대학의 이름이 달라지는 지독한 경쟁을 경험한 오늘날의 학생들에게 입시는 동료의식보다는 세상의 악을 제일 먼저 접하게 되는 결정적 순간이 되어 가고 있다. 입시라는 의례에 참여하는 구성원들은 협력과 공존이라는 개념보다는 갈등과 경쟁이라는 개념에 점점 더 익숙해진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는 새로운 구성원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타인을 제치고, 자신의 삶을 확보하는 무한 경쟁’이라는 원체험을 습득하는 성년의례를 바탕으로 구성된 사회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그나마 ‘군대’라는 공간이 또 다른 성년의례의 공간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남성들만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면서, 폭력적 권위주의를 내면화하는 공간이기에 이 또한 공동체를 위한 적절한 성년의례라고 보기 어렵다. 공동체에 들어오는 과정에서부터 이런 경험을 습득한 이들에게 ‘타인에 대한 환대 / 배려’의 정신을 요구하는 것은 모순적인 일이다. 사회학자 뒤르켐이 만약 오늘날의 한국 사회를 구체적으로 살펴본다면, 아마도 비뚤어진 ‘성년의례’부터 바로 잡는 것이 가장 필요한 일이라고 충고하지 않을까 싶다.
뒤르켐이 현대 한국에 와서 거대한 쇠 철문이 되어 서 있는 서울대학교 배지를 본다면 학벌이라는 토템 숭배의 문양이 가장 가시적으로 나타난 모습을 보고 찬탄(또는 탄식)했을 것이다.
(민혜숙의 『서울대 시지푸스』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