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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국어교사 김지씨 Dec 27. 2023

에코사이드, 수업의 새로운 지향점을 제시하다.

김지씨의 대학원 레포트 (2) - '침묵의 범죄 에코사이드'를 읽고

1. 출생률 0.78의 이유     


이번 학기 고등학교 1학년 국어 수업을 진행하면서, 국어 과목의 여러 영역 – 말하기, 듣기, 쓰기, 읽기, 문학, 문법 – 을 가르칠 때 될 수 있으면 오늘날 첨예한 문제로 대두되는 사회적 현상들을 다루어 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최근 수업은 매체와 관련된 것인데, 첫 번째 시간에는 이른바 레거시 미디어, 즉 신문, 방송, 잡지 등의 전통적 대중매체를 통해 전달되는 기사를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두 번째 시간에는 뉴미디어, 즉 SNS를 기반으로 한 다양한 쌍방향 미디어의 문제점 분석과 주체적 활용에 대해 이야기하는 수업이었다. 


그런데 첫 번째 시간에 다룰 신문 기사 – 이 기사는 교과서에 실려 있는 것이라 개인적인 선택과는 무관했다 – 의 주제가 한국 사회의 고령화 문제였다. 물론 이 기사는 고령화 속도를 늦출 방안에 대해서는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았으며, ‘여성 인력의 활용’, ‘우수한 외국 인적 자원의 유치’, ‘고령층의 노동력 재활용’ 등 그야말로 기업이나 국가의 입장에서 인간을 인적 자원으로만 이해하는 저급한 수준의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기에, 결국 눈 밝은 학생들에 의해 난도질을 당하는 운명에 처했다. 


고령화 문제야말로 저출생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일 것이다. 그래서 최근에 20~30대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다른 기사를 교차 검토 차원에서 제시하였다. 이 기사에서는 이민과 같은 새로운 인구 유입보다는 젊은 세대들에게 보육과 일자리 보장과 같은 사회 복지를 확대하는 것이 고령화의 가장 중요한 해결책이라는 입장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지금 교실에 있는 학생들의 생각도 궁금해졌다. 나중에 아이를 낳고 싶은 학생들이 몇 명이나 될까? 손을 들어보라고 했더니, 학생들의 반응은 반별로 조금씩 달랐지만, 전체적으로 절반을 넘지 않는 수의 학생들이 손을 들었다. 낳지 않겠다고 하는 학생들이나 낳겠다는 학생들의 이유가 궁금했다. 학생들은 자신의 생각을 진솔하게 이야기해주었는데, 낳지 않겠다는 쪽은 경력 단절, 경제적 부담 등의 이유가 우세했다. 또 많은 학생이 자신이 지금 겪고 있는 이 삭막한 입시 경쟁을 또 내 아이가 겪게 하고 싶지 않다고 대답했는데, 학생들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비극적이고 안타까운 답이었다. 


그런데 어떤 반에서 한 학생이 또 하나의 충격적인 답을 내놓았다. 20년 정도 후에 아이를 낳는다고 치면, 그때는 아마 그 아이가 살아갈 지구의 기후 위기가 심각해질 것이고 그런 상황을 살아가도록 방치하는 것이 너무 비참하지 않겠냐며, 그래서 자신은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말했다. 만약 올해 ‘인권과 민주주의’ 수업을 듣지 않았었고, 『침묵의 범죄 에코사이드』라는 책을 주의 깊게 읽지 않았다면, 아마도 이 학생이 지나치게 민감하거나, 너무 비관적이라고 은연중에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수업 시간에 보았던 평균기온 상승 그래프가 순간 스쳐 지나가면서, 이 학생의 걱정스러운 반응이 어쩌면 가장 현명한 답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용 위기, 보육 시스템 부재 등의 사회적 복지가 부족한 것도 문제지만,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이 지구라는 공간 자체가 파괴되어 가고 있다는 불안감은 젊은 세대들에게 심각한 위협으로 느껴지는 듯했다. 


이런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이와 같은 새로운 세대들과 함께 국어 수업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지향점을 가져야 할까라는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수업들을 되돌아보면서 에코사이드라는 관점에서 수업을 재구성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성찰해보려고 했다. 많은 수업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인상적인 수업 두 가지를 재구성하면서 이 책에 대한 나의 솔직한 생각을 적어보려고 한다.           


2. 에코사이드로 재구성한 두 가지 수업 장면   


(1) 시의 해석과 공동체의 범위     


첫 번째는 시의 해석과 관련된 수업이다. 다음의 시를 한 번 읽어보자.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한데 

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 있는 것 같다.     

말은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 있는데 

몸 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이 한 움큼씩 뽑혀 나오도록 울어 보지만 

말은 눈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수천만 년 말을 가두어 두고 

그저 끔벅거리고만 있는

오, 저렇게도 순하고 동그란 감옥이여.     

어찌해 볼 도리가 없어서 

소는 여러 번 씹었던 풀줄기를 배에서 꺼내어

다시 씹어 짓이기고 삼켰다간 또 꺼내어 짓이긴다.

                                                               김기택, 「소」     


지금까지 이 시를 수업 시간에 해석하면서 ‘소’는 한 번도 ‘소’ 자체로 등장한 적이 없었다. 인간과 함께 수천만 년(?)을 살아온 ‘소’가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기보다는, ‘소’는 일종의 비유적 대상으로서 자신의 언어로 삶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어떤 인간 집단을 표상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사회적으로 소외된 계층에 대한 비유로서 ‘소’를 해석했다. 이런 해석이 익숙했던 이유를 굳이 변명하자면 기존에 동물을 소재로 한 시들이 대부분 이런 맥락에서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발표된 동물시들은 대체로 동물을 소재로 삼거나 풍경에 등장시키는 경우, 그리고 동물을 인간 주체의 내면을 대변하는 비유나 상징으로 삼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 시들에서 동물은 동물의 존재 자체보다는 인간화된 의미를 담지하는 매개물로 활용되거나 의인화된 표상에 지나지 않았다.    

(나희덕, 「인간-동물의 관계론적 사유와 시적 감수성」, 『문명의 바깥으로』, 창비, p.53.)


하지만 이런 설명은 작품의 본질을 크게 훼손하는 것이었다. 이 작품의 연작으로 이어진 「소 2」라는 작품만 제대로 읽어보았더라도 앞의 설명은 상당한 오류가 있다는 것을 금방 깨달을 수 있다.     


몸무게가 되기 위하여 물이 살 속으로 들어온다 

살과 뼈와 핏줄 사이 가볍고 푹신한 빈큼들을

힘센 무게들이 빽빽하게 채워 버린다 

차에 매달아 한 시간이나 끌고 다니며 만든

갈증 속으로 물은 끊임없이 들어오고 있다 

음매에 슬픈 울음 속 떨림의 사이사이

깊고 가는 빈틈으로 물이 채워진다 

이윽고 울음에서 떨림이 없어지고

헉헉거리며 울음에서 공기가 모두 빠져나가고 

목구멍을 틀어막은 완강한 힘이 울음을 채운다

울음은 이제 형식적으로 입만 크게 벌리고 있다 

부룩 부루룩 물 사이로 빠져나온 공기로 숨을 쉬며

뱃가죽에서 규칙적으로 불어났다 꺼졌다 하고 있다 

크고 단단한 무거움 속에 조용히 정지하여 있으니

보인다 가죽 속에 

우연히 들어와 무게가 된 한 줄기 바람

이제 고기가 되어 버린 한 방울 물 한 모금 공기 

무거움의 밖에서는 또 다른 한 떼의 공기들이

파리들처럼 날렵하게 날아다니며 혀를 간지르고 있다 

마시려 하면 앵앵거리며 순식간에 흩어지고

힘들여 마신 한 호흡의 공기마저 

목구멍에서 찰랑거리던 물이 기어코 밀어낸다

눈알 가득 앉은 간지러운 파리 떼를 

이젠 눈을 끔벅거려 날려보낼 수 없다

아무리 많은 눈물로 씻어내도 날려보낼 수 없다 

                                                                  김기택, 「소 2」     


이 작품은 도축장에서 소의 무게를 늘리기 위해 물을 억지로 먹이는 장면을 인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소에게 물을 먹여 결국에는 질식시키고야 마는 이 비극적 장면을 통해 시인이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는 비교적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인간 중심의 축산업 시스템에 대해 시인은 강력한 문제 제기를 하고 있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소」에서 ‘마음이 한 움큼씩 뽑혀 나오도록 울’고 있는 소의 심정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볼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이 시를 설명하는 맥락을 다른 방향으로 설정할 필요가 있다. 즉 동물권의 문제로 이 시의 해석은 확대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동물권을 인정한다는 말은 그들에게 선거권이나 종교자유와 같은 ‘인권’을 인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 각자의 종적 생존에 적합한 권리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조효제, 『침묵의 범죄 에코사이드』, 창비, p.193.)     


이런 지향점을 중심으로 수업을 재구성한다면 어떤 방향이 가능할까? 현재 2022 교육과정에 따른 ‘문학’ 과목 교과서를 집필하고 있는 중인데, 2022 교육과정의 성취기준 - 학습목표에 해당되는 개념 – 에 ‘공동체’와 관련된 부분이 있다. 그 성취기준은 다음과 같다.     


[12문학01-11] 문학을 통해 공동체가 처한 여러 문제들을 이해하고 문제 해결에 참여하는 태도를 지닌다.     


이 성취기준과 관련된 단원을 집필하면서 김기택의 「소」가 떠올랐다. 물론 이 단원에서 중심적으로 다루는 작품은 고정희 시인의 「우리 동네 구자명씨」이다. 버스 안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한 여인의 모습을 보고, 그녀가 겪고 있는 삶의 고통을 공감하면서, 여성의 삶을 제약하고 있는 사회 현실을 비판하고 있는 작품이다. 공동체의 구성원 중에서 소외되고 핍박받는 이들에 대한 공감과 연대의 관점을 환기시키기 위해 이 작품을 선정하였다. 오늘날 여전히 심각한 갈등 양상을 빚고 있는 젠더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기 위한 출발점으로 이 작품은 의미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단원의 학습활동에 김기택의 「소」를 추가하려고 했다. 인간 중심의 공동체를 확대시켜 ‘천성산 도롱뇽’까지 공동체의 범위를 확대시킬 수 있는 감각을 기르기 위해서이다. ‘시적 대상의 차이점을 찾고, 그것이 공동체의 범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말해보자.’와 같은 학습활동을 함께 제시하면 의도가 조금 더 명확해질 것 같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공동체가 처한 여러 문제 중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만큼이나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고 있는 동물권의 문제를 함께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이 문제들이 결코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이해시키는 차원에서 의미 있는 활동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발상의 전환은 에코사이드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면 아마도 떠올리기 어려웠을 것이 분명하다.


           

 (2) 제노사이드(genocide)에서 에코사이드(ecocide)로     


두 번째 수업은 영화와 함께 한 수업이다. 학생들과 함께 영화를 보고 그 영화의 주제에 대해 토론 수업을 한동안 진행한 적이 있다. 그 수업의 결과물을 하나의 단행본으로 엮어 출간하기도 했다. 그 책에서 인상적으로 다루었던 영화 한 편이 있다. 그 작품은 제노사이드의 끔찍함을 담아낸 〈호텔 르완다〉라는 영화이다. 르완다의 후투족과 투치족 사이에 벌어졌던 끔찍한 제노사이드는 이 영화말고도 〈4월의 어느 날 Sometimes In April〉이라는 영화를 통해 좀 더 핍진하게 다루어진 적이 있으며, 최근에는 〈트리 오브 피스 Trees of Peace〉라는 영화로 다루어졌다고 한다.


어쨌거나 2004년에 제작된 〈호텔 르완다〉는 폴 루세사바기나라는 실제 인물의 영웅적인 일대기를 다루고 있는 영화로, 상업 영화 특유의 극적인 장면 전개와 선악의 뚜렷한 구분 등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당시 르완다의 비참한 상황을 나름대로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어서 학생들과 함께 보기에 괜찮은 영화라고 생각했다. 특히 주인공이 갇혀 있던 호텔로 다시 돌아가다가 길거리에 널린 시체로 인해 차를 더는 움직일 수 없게 되는 장면에서 학생들은 제노사이드의 비극을 끔찍하고,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이 영화를 함께 본 뒤에 이런 비극이 발생된 이유와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 학생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연히 제노사이드라는 개념 또한 충분히 설명하려고 했다. 그리고 이 비극을 발생시킨 가장 중요한 요인인 제국주의 침략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지씨는 증오의 악순환을 시작한 그 뿌리에 ‘벨기에의 식민 통치’가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했다. 식민 통치는 기본적으로 소수의 인원으로 다수의 식민지 사람들을 다스려야 하는 어려움을 안고 출발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식민지 내부에서 식민 통치에 우호적인 집단을 찾고 그들에게 특권을 주어, 그들이 나머지를 통치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전략을 쓰곤 한다. 그런데 르완다를 지배한 벨기에는 종족 간의 차별을 통해 내부의 질서를 확립하려고 했던 것이다.     

(김병섭, 김지운, 『국어시간에 영화읽기』, 휴머니스트, p.42.)


르완다에서 엄청난 학살이 벌어진 배경에는 종족 간의 증오 감정을 부추긴 제국주의 지배라는 역사적 사건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를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 수업을 바탕으로 한국 사회 또한 일제강점기라는 제국주의 지배를 받은 바 있고, 한국은 종족 간의 갈등 대신에 계급 갈등이 제국주의 지배의 핵심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인종적 차이를 갖고 있지 않았던 한국인들에 대한 일본의 식민 지배 전략은 계급적 모순을 활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은 전통적인 한국의 지배 계급인 지주 계급을 온존시켰다. 물론 일본은 한국에 와서 땅을 빼앗아 그것을 일본인들에게 넘겨 일본인 지주 계급을 성장시켰지만, 그들이 빼앗은 것은 대체로 소유권이 분명한 한국인 지주들의 땅이 아니었다. (중략) 식민 시대 한국 사회의 모순은 민족 모순 못지않게 계급 모순이었고, 일본의 식민 지배는 이를 극대 활용한 전략 위에 서 있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삼성, 『20세기의 문명과 야만』, 한길사, 김병섭, 김지운, 앞의 책, p.42에서 재인용.)


〈호텔 르완다〉를 통해 기존의 수업에서 강조하고 싶었던 점은 아프리카 르완다에서 벌어진 학살의 비극이 오늘날 우리 역사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 수업에서 간과하고 있었던 점은 벨기에가 왜 르완다를 지배하려고 했으냐라는 것이다. 제국주의 침략이 일어난 근본적인 원인, 즉 아프리카의 자원을 수탈하기 위한 전략적 침략이었음을 밝힐 필요가 있다. 


2020년 벨기에의 필리프 국왕은 콩고민주공화국에 식민 지배에 대한 사과의 뜻을 전했다. 1800년대 후반 아프리카 중부를 식민지로 개척해 가혹하게 통치했던 레오폴 2세의 만행에 대해 간접적인 사과를 서한을 통해 전한 것이다. 레오폴 2세는 당시 비싼 가격에 거래되던 상아와 고무 채취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특히 세계적인 고무 붐을 타고 원주민들에 대한 가혹한 노동력 수탈을 근간으로 광범위한 고무 재배를 진행하였다. 특히 원주민들에 대한 처벌로 한쪽 손을 잘랐던 끔찍한 행위는 지탄의 대상으로 널리 알려지기도 했으며, 최대 1000만명의 콩고인이 희생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바로 에코사이드와 제노사이드를 연결할 가능성이 발생한다. 단순히 콩고나 르완다에서 벌어졌던 학살을 ‘일반적 제노사이드’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구조적 제노사이드’로 이해하면서, 이것이 식민 지배의 역사적 유산으로 인해 제노사이드와 에코사이드가 밀접하게 연관된 사건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상아와 고무와 같은 자원 채취를 위해 무차별적인 지배를 감행한 제국주의 세력의 만행으로 인해 이 나라들이 아직까지도 고통받고 있다는 점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사실 이 수업과 별개로 학생들과 〈블러드 다이아몬드〉라는 영화를 보고 수업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 다이아몬드 채취를 둘러싸고 시에라리온이라는 나라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사건을 고발한 영화였다. 반군 지도자들은 자신의 정치적 세력을 유지하고 경제적 수입을 올리기 위해, 서방 선진국에서 비싸게 거래되는 다이아몬드를 채취에 열을 올린다. 그 과정에서 무차별적으로 환경을 파괴하고, 주민들을 잔혹하게 동원하여 자연과 인간이 모두 비극적인 상황으로 치닫게 된다. 


이전까지는 〈호텔 르완다〉와 〈블러드 다이아몬드〉를 같은 맥락에서 다루어 볼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침묵의 범죄 에코사이드』를 읽으면서 이 두 작품을 반드시 같은 맥락에서 조명할 필요가 있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또한 오늘날 콩고 동북부 비지 광산에서 콜탄이라는 자원과 관련된 사례들은 한국의 기업들과도 밀접한 연관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할 필요가 있다.       


기후-생태위기를 맞아 ‘에코사이드와 제노사이드가 얽히면서 인간과 지구행성에 가하는 폭력’이 인권과 환경의 핵심 주제로 떠올랐다. 이것을 ‘에코사이드-제노사이드 연계’라고 한다. 이 책에서는 ‘연계’nexus를 직선적 인과관계가 아니라, 시공을 가로질러 얽혀 있는 상관관계의 실타래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조효제, 『침묵의 범죄 에코사이드』, 창비, p.193.) 

    

19세기 후반 아프리카라는 시공간이 21세기 한국이라는 시공간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으며, 이를 잇는 개념이 바로 ‘에코사이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수업은 다시 또 새로운 지향점을 찾을 수 있게 된 것 같다.           



3. 토끼전과 에코사이드     


고전소설 〈토끼전〉은 거의 모든 한국 사람들이 알고 있는 소설이지만, 한편으로는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는 신기한 소설이다. 이런 상황에 발생하게 된 이유는 고전소설의 유통이 상당히 특이한 방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고전소설들은 오늘날처럼 저작권 개념이 없었으며, 필사하는 사람이나 목판으로 새겨서 인쇄하는 사람의 의도가 가미된 여러 버전의 소설들이 난립하는 형태로 유통되었다. 그러다보니 〈토끼전〉만 하더라도 59개 정도의 이본(異本)이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토끼전〉의 경우 그 결말 내용이 소설마다 각기 다르게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 여기까지 읽고 잠깐 멈춰서 생각해보자. 과연 소설의 마지막에 ‘자라’는 어떤 운명을 맞이했을까? 이 경우 소설은 필사자 혹은 출판업자의 의도에 따라 다양한 결말로 구성된다. 자라의 충성심을 강조하는 버전은 토끼도 잃고 간도 잃은 자라 앞에 화타 혹은 신선이 나타나 용왕을 구할 약을 주고 사라지는 결말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자라가 실의 빠져 좌절하다가 바다 위 절벽에서 몸을 던져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토끼전〉의 결말이 이렇게 다양하게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 소설에서 ‘용왕’ / ‘자라’ / ‘토끼’가 각각 상징하는 대상이 역사적인 맥락을 가지고 있고, 역사적 맥락에 대한 저자들(?)의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용왕이 걸린 병을 유심히 보면 알겠지만, 용왕은 정사를 내팽개치고 음주가무에 몰입하다 간이 나빠져서 토끼의 간을 원한다. 즉 조선 후기의 맥락에서 보면 용왕은 민중을 억압하는 부조리한 봉건 지배계층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반대로 ‘토끼’는 이런 지배에 저항하는 민중을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어느 쪽의 손을 들어주느냐에 따라 소설의 결말을 극과 극으로 치닫는다. 


그나저나 그 사이에 낀 ‘자라’는 굉장히 당혹스러운 처지에 있는 인물이다. 부조리한 지배 계층의 명령을 수행하는 중간 관리자의 입장에 서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과 수업을 할 때는 오히려 이 ‘자라’의 처지에 대해 많이 물어보곤 했다. 부조리한 구조 안에 놓여 있는 개인은 어떤 선택을 해야하느냐라는 질문을 던지고, ‘조선인 BC급 전범’의 비극적인 처지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사례를 제시하면서, ‘무사유성(thoughtlessness)’이 어떤 문제를 불러 일으키는 지에 대해 섬세한 역사적 감각을 길러보려고 했다. 


이 주제를 이야기하면서 학생들과 함께 다루었던 또 하나의 사례가 바로 ‘미나마타병’을 초래했던 신일본질소주식회사의 사례와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영화에 나타난 ‘페놀 오염’ 사건의 두산전자 사례였다. 신일본질소주식회사의 직원들은 회사 이익을 위해 사실을 숨김으로써 사람들의 피해가 더 확산되었지만,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경우에는 반대로 위험을 무릅쓰고 내부 고발을 시도하는 용감한 여성직원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례들을 대조적으로 제시하면서 역사적인 ‘자라들’이 용기 있는 선택을 할 수 있는 사회적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학생들과 함께 공유하곤 했다. 

그런데 문득 〈토끼전〉을 다시 살펴보면서 에코사이드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런 제도적 개선만이 중요한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때 다음과 같은 구절을 접하게 되었다.      


자연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생존과 생계를 위해서, 인간이 저마나 자기의 시점을 지닐 뿐 아니라 다른 생명체들 역시 자기들의 시점을 가지고 그에 따라 행동하고 있음을 예리하게 인식하고 인정하게 된다. 이들에게 애니미즘은 실용적이고 실제적인 문제이다. 물고기나 낙지, 키조개를 잡고 콩과 배추를 심을 때, 인간의 시점에만 의존해서 수확을 거두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지역 생태 환경에서 뭔가를 얻기 위해서는, 그리고 숲에서 바다에서 생계 활동을 하면서 해를 입지 않기 위해서도, 인간적인 것을 훌쩍 넘어서는 다른 존재의 시점에서 내가 어떻게 보일 것인지를 상상하고, 서로 다른 여러 관점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상상함으로써 지역 생태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유기쁨, 『애니미즘과 현대 세계』, 눌민, p.213.)    


앞서 인용한 부분에 제시된 ‘애니미즘’의 맥락에서 조선시대에 〈토끼전〉과 같은 우화소설들이 많이 등장했던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다. 아마도 그들은 자연에 존재하는 동물들이 인간과 같이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는 존재라고 믿었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실용적이고 실제적인 관점에서 ‘다른 존재의 시점에서 내가 어떻게 보일 것인지를 상상’하는 것뿐만 아니라, 〈호질〉과 같은 소설에서 그러했듯이 인간 생활의 여러 가지 맥락들이 다른 동물의 관점으로 설명이 가능하며,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당시 사람들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와 같은 생각의 과정을 거치면서 에코사이드에 대한 감각은 기존에 내가 해왔던 수업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겠다고 느끼게 된다. 또한 앞으로 기후위기를 맞이할 새로운 세대들과 함께 할 국어 수업의 방향을 정립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이정표가 될 수 있겠다고도 느끼게 된다. 이런 점에서 〈인권과 민주주의〉 수업과 『침묵의 범죄 에코사이드』는 앞으로 남은 교직 생활을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해준 소중한 계기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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