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씨의 대학원 레포트 (3)
1837년 표트르 대제의 강력한 의지로 건설된 인공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 궁전’이 큰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 화재는 단순한 화재로 치부해버릴 수 없는, 문화사적으로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사건이었다. 목재로 지어진 지하실에서 시작된 화재는 위층으로 번져 궁전 전체를 태워버렸는데, 이 화재의 진행 과정이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묵시록적 신화에 근거해 건설된 도시에서 이 화재는 상징적 의미가 있었다. 즉 구 러시아가 복수를 한 것이었다. 저택마다 큰 응접실 밑엔 ‘목재로 된 러시아’가 있었다. 파운틴 하우스의 화려한 흰색 무도실에서 비밀 유리문을 통해 빠져나가 계단을 통해 종복들이 있는 지역과 또 다른 세계로 내려갈 수 었었다. 그곳엔 무방비 상태의 불길이 하루종일 일렁이고 농민들의 수레가 농작물을 배달하는 안뜰의 창고, 마차 보관소, 대장장이의 일터, 작업실, 마굿간, 외양간, 조류 사육장, 대형 온실, 세탁실과 사우나인 목재 바냐banya나 목욕실이 있었다.
(올란도 파이지스, 체계병 역, 『나타샤 댄스』, 이카루스미디어, p.95.)
러시아인들의 오랜 관습인 사우나실 바냐는 러시아 전통을 대표하는 시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목재로 지어진 바냐가 위치한 지하실에서 시작된 화재가 서구풍의 위층 석재 건물을 모두 불태워버린 이 사건은 이식된 서구 문화가 지배하던 황제의 도시에, 오래된 러시아 문화가 빈틈을 뚫고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 징후적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18세기 ‘유럽을 향해 열린 창’을 꿈꾸었던 표트르 대제의 강력한 의지로 만들어진 이 도시는 러시아의 유럽화를 상징하는 도시였다. 표트르 대제의 의지에 부응하듯 당시 최고위층 귀족들은 프랑스어로 대변되는 서구적 문화를 기본적인 문화적 취향으로 갖추고 있었다. 그들에게 서구 유럽은 단순한 지리적 위치가 아니라 그들의 종교와 태도를 통해 그들이 거주하고 있는 마음의 고향으로 받아들여졌다.
러시아의 유럽화는 근대적 교육체계와 문화적 교양 수준이 높아진 19세기 초에 들어와 더욱 활성화되었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유럽에 대한 갖가지 정보가 대량 소개되어 러시아는 유럽에 대해 좀 더 넓은 시야를 갖게 되었으며, 러시아의 유럽화에 가속도가 붙은 것이다.
(정윤수, 『클래식 시대를 듣다』, 너머북스, p.262.)
하지만 서구주의와 대립항으로서 존재하는 슬라브주의 또한 만만치 않았다. 거의 천년동안 대립해 왔던 서구주의와 슬라브주의는 19세기에 이르러 그 긴장감이 더욱 고조되었다. 이로 인해 표트르 대제의 열정이 낳은 이 도시는 ‘이질적인 것들이 서로 충돌하고 모든 것이 뒤섞이면서 혼란스럽고 그로테스크한 분위기가 연출되는 연극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특히 1812년의 보로디노 전투는 막연하게 서구를 숭앙하던 러시아 지식인 계층에게 엄청난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을 결정적으로 막아낸 1812년의 이 전투는 프랑스어로 대변되는 서구 문화에 대한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자리매김한다.
이 1812년의 역사적 승리를 표현한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차이코프스키의 <1812년 서곡>이다. 차이코프스키는 1880년 알렉산드르 2세의 의뢰로 모스크바 그리스도 구세주 대성당의 완공에 맞춰 거행될 기념식에 쓰일 곡으로 <1812년 서곡>을 작곡한다.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로 인해 1882년 초연된 이 곡이야말로 러시아적인 것이 유럽적인 것을 몰아내는 역사적 장면을 시간적인 순서로 재현한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와 러시아 민요 선율에 근거한 주제부가 교차하는 가운데, 차츰차츰 <라 마르세예즈>의 존재감을 없애가며 위대한 러시아의 승리를 드러내고 있는 이 작품은 실제 포성과 사원의 종소리까지 동원하여 역사적 승리의 기억을 현재화하기 위해 분투한 노력이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가장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느낄 수 있었던 1812년 서곡
https://youtu.be/1KzF1KgaREo?si=3Pzy-zWbFdyhHikB
그러나 차이코프스키가 장엄하게 묘사했던 1812년의 역사적 현장은 러시아 제국의 역사적 승리라는 의미 이외에 또 다른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의 침략 전투에 맞서 싸우기 위해 앞장섰던 많은 귀족 계층의 청년 장교들은 이 전투를 통해 러시아 민족과 동포라는 개념을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가장 후진적이고 전근대적이라고 평가받던 러시아가 혁명 프랑스의 이념을 똘똘 뭉친 프랑스 국민군과 맞닥뜨린 이 전투에서 러시아 귀족과 농노들은 계급적 차이와는 무관하게 ‘조국 러시아’라는 관념 하에 하나가 되어 전쟁에 나섰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농노들은 민족국가를 구성하는 새로운 구성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정도의 놀라운 투쟁심과 충성심을 보여주었으며, 차르 정권조차도 러시아를 향한 대규모의 대중적 헌신에 의존할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19세기 전체에 걸쳐 1812년의 이 두 가지 이미지 – 일종의 민족 해방 혹은 제국의 구원으로서 – 가 계속해서 전쟁의 공식적인 의미로써 경합하고 있다. 한편으로 귀족과 농노의 관점에서 그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는 진정한 민족적 드라마인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 러시아 제국의 힘을 과시하는 호화로운 ‘제국 양식’으로 개선문과 승리의 석조 기념물들 혹은 차이코프스키의 <1812년 서곡>에서의 그 모든 대포의 소리가 있다. (올란도 파이지스, 앞의 책, p.220.)
『전쟁과 평화』에서 ‘안드레이 볼콘스키’의 모델이 되었던 세르게이 볼콘스키 공작은 이 전쟁에 참여한 농노들 속에서 미래 국가 시민의 자질을 발견하게 된다. 니콜라이 1세와 어린 시절부터 가까운 사이일 정도로 최상층 귀족이었던 볼콘스키 공작은 전쟁에 참전함으로써 프랑스에 우호적이었던 태도를 버리고, 러시아를 새롭게 발견하였으며, 민중의 미덕에 기반한 민족적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볼콘스키와 같이 새로운 정치적 경험을 하게 된 청년 귀족 장교들은 차르 체제에 신음하는 기층 민중들을 구원하기 위한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1825년 청년 장교들은 입헌군주제와 농노제 폐지 등의 자유주의 사상에 근거한 저항 운동인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하지만 어설픈 준비과정으로 인해 어이없을 정도로 반란은 쉽게 진압되고 주요 인물들은 사형되거나 시베리아 유배의 길을 떠나게 된다. 그런데 유럽 지향적인 문화적 태도를 버리고, 러시아 민족을 재발견한 시점에서 청년 장교들의 저항 운동이 서구의 자유민주주의 사상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은 상당히 아이러니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민족주의 운동의 동력학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에릭 홉스봄에 따르면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근대 민족은 또다른 점에서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부분이다. 자유와 평등이 형제애와 연관이 되듯, 근대 민족은 논리적 필연성이 아니라 긴 연관에 의해 위대한 자유주의의 여타 슬로건과 연결되었다. 다시 말하면, 민족 자체는 역사적으로 새로운 현상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 보수주의자나 전통주의자들은 반대했으며 따라서 이는 그 반대편에게는 매력적인 것이었다.
(E. J. 홉스봄, 강명세 역, 『1780년 이후의 민족과 민족주의』, 창작과비평사, p.61.)
뿐만 아니라 민족주의의 형성과정을 ‘상상된 공동체’라는 용어를 통해 구체적으로 설명한 바 있는 베네딕트 앤더슨은 19세기 초반 아메리카의 민족 해방 운동을 바탕으로 한 민족주의 운동의 모델이 형성되었으며, 이것이 인쇄자본주의를 기반으로 전세계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그 운동의 근저에는 자유주의적 관념들이 녹아 있다고 주장한다.
아메리카의 뒤범벅된 덩어리로부터 민족국가들, 공화제들, 공민권들, 인민주권, 국기(國旗)들과 국가(國歌)들 등등의 상상된 현실들이 출현하는 한편, 이들의 개념적 대립물들인 왕조 제국들, 군주제들, 절대주의들, 신민성(subjecthood)들, 세습 귀족제들, 농노제들, 게토들 등은 청산되었다. (…) 요컨대 적어도 1810년대가 되자 독립된 민족적 국가라는 ‘그’ 모델은 해적판으로 만들어질 수 있도록 시중에 나와 있었다.
(베네딕트 앤더슨, 서지원 역, 『상상된 공동체, 민족주의의 기원과 보급에 대한 고찰』, 길, p.131.)
베네딕트 앤더슨에 의하면 아메리카 대륙의 국가 형성과정에서 이미 민족국가 형성의 모델이 갖추어지게 되었으며, 새롭게 민족국가를 구성하려고 시도하던 운동 세력들은 이 모델을 바탕으로 전세계 곳곳에서 자신의 상황에 맞는 해적판을 만들어내고 있었다고 한다.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을 일으켰던 러시아의 젊은 장교들 또한 새로운 해적판을 만들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민족국가 개념에 기반한 새로운 러시아를 만들기 위해 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이고자 노력했지만, 차르 체제의 강고한 저항 앞에 무릎을 꿇고, 결국에는 사형을 당하거나 저 먼 유형지로 떠나게 된 것이다. 세르게이 볼콘스키 공작은 바로 이런 인물 중에 대표 격인 인물이었다.
세르게이 볼콘스키는 반란의 주모자로 찍혀 제정 러시아에서 자신이 누리던 모든 특권을 박탈당한 채 시베리아로 유배의 길을 떠나게 된다. 놀랍게도 결혼한 지 채 1년밖에 되지 않았던 그의 아내 마리아 볼콘스키도 함께 시베리아의 이르쿠츠크로 떠나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마리아 말고도 남편과 함께 했던 데카브리스트의 아내들은 더 있었다. 농노들이 해주던 허드렛일들을 스스로 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귀족 출신인 그녀들에게 엄청난 고통으로 다가왔지만, 그녀들은 강인한 태도로 이 모든 난관을 돌파해나갔다. 이 ‘죄수 가족’들은 시베리아의 중심 도시 이르쿠츠크에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면서 톨스토이가 꿈꾸었을 법한 평등주의적 농민 공동 생활체를 꾸려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의 모습에 감동한 이르쿠츠크의 여론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데카브리스트 유배자들에 대해 공개적으로 호의를 표명하며 시베리아 발전을 위한 지식 세력으로 그들을 존경하던 신임 지방관 무라비예프-아무르스키는 이들의 대표자격인 마리아 볼콘스키를 사교모임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결국 그녀는 이르쿠츠크 지역의 사교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학교, 고아원, 극장을 설립하는 등 문화 사업에 힘을 쏟게 되었다. 또한 세르게이 볼콘스키는 민중들과 함께 하는 ‘농민 공작’으로서 독특한 명성을 쌓기 시작한다. 그들의 노력으로 인해 이르쿠츠크는 ‘시베리아의 파리’라는 명성까지 얻게 된다.
볼콘스키와 같은 데카브리스트들은 시베리아의 가능성에 주목하였다. 마치 초기 아메리카가 그러했던 것처럼 시베리아가 재생할 수 있는 독립 정신과 풍부한 자원, 억압되지 않은 농민들의 젊은 에너지를 발견하였다. 벨라 바르토크가 헝가리 민요 수집에 나서면서 자신의 음악 세계를 구축했던 것처럼, 그들은 시베리아의 설화와 역사 연구에 몰두하였으며, 학교를 설립하고, 직업을 갖거나 직접 토지를 경작하면서 민중들의 세계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비극으로 끝날 줄 알았던 유형지에서 그들은 새로운 가치관을 발견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와 같은 러시아적 가치에 대한 관심은 1812년 이후 러시아 문화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한다. 1831년 발표된 고골의 『디칸카 근교 야화』와 같은 작품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의 민속 설화에 근거한 그의 작품은 이른바 ‘러시아적’인 것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으며, 음악적으로도 영향을 미쳐 민족주의 음악의 중심에 서 있던 러시아 5인조에게 영향을 주게 된다. 이렇게 탄생한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무소르그스키의 <민둥산의 하룻밤>이다. 1867년 무소르그스키가 작곡한 곡을 나중에 림스키 코르사코프가 편곡하여 완성한 이 곡은, 러시아의 전통적 민속문화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었던 ‘바바야가’와 같은 온갖 악령들을 민둥산에 불러들인 혼란스럽고도 매력적인 곡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둠의 왕 ‘체르노보그’의 출현을 중심으로 각종 어둠의 정령들이 활개치는 민둥산의 장엄한 풍경 묘사는 ‘러시아적’인 것들이 문화의 중심에 자리잡았음을 공표하는 하나의 선언문으로도 볼 수 있다.
뭐가 좋은지 몰라서 그냥 링크
https://youtu.be/tu1no7hOlSs?si=ywWAEprF1XUBcY_o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데카브리스트들은 시베리아에서 모스크바로 극적으로 돌아오게 된다. 신임 차르의 사면을 통해 모스크바로 돌아온 볼콘스키는 곧바로 러시아적 지식인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된다. 심지어 그는 당시 지식인 계층에게 러시아의 황야에 나타난 일종의 그리스도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추방자에서 구원자로 돌아온 그는 자신의 못다 이룬 꿈을 실현하기 위해 멈추지 않고 달려간다. 자신을 유형의 길로 이끌었던 데카브리스트들의 꿈인 농노제 폐지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볼콘스키는 농노해방을 위한 토지 계획을 세워 차르의 개혁에 힘을 실었고, 완강한 보수적 귀족들의 반대를 뚫고 온건한 개혁에 이르게 된다.
농노해방령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 볼콘스키 공작은 니스에 있었다. 그날 저녁 그는 러시아 교회에서 추수감사절 예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합창소리에 그는 울음을 터뜨렸다. 후에 그는 그것이 ‘나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올란도 파이지스, 앞의 책, p.231.)
세르게이 볼콘스키 공작은 어쩌면 행복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꿈꾸었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강인한 의지를 가지고 고통스러운 삶을 견뎌왔으며, 그 결과 생전에 자신이 추구한 삶의 가치를 민족 공동체 안에서 인정받았고, 일정한 정치적 변화까지 이루어낸 것을 목도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추방자로서 이런 삶의 결말을 맞이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드문 일이 아닐까 한다. 특히 다음에 보게 될 또 다른 추방자에 비하면 볼콘스키는 행운아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듯하다.
세르게이 볼콘스키처럼 자신의 공동체로부터 추방되었지만, 불운하게도 결국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던 한 음악가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그는 바로 윤이상이다. 음악적 변방에서 태어나 탁월한 역량을 통해 세계 음악의 중심으로 당당히 진입할 수 있었지만, 자신이 사랑하던 그 나라의 정치적 탄압으로 인해 지독한 고통을 받고, 민족 공동체로부터 추방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그 비운의 음악가말이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이루지 못한 채 1995년 타국에서 삶을 마감하게 되는데, 그의 바람은 알고 보면 그리 거창한 것도 아니었다.
성공. 성공이란 무엇일까요. 지나가는 그림자입니다. 내 작품 중 단 하나라도 나보다 오래 살아남을 수 있을지 알 수 있습니까? 또 그렇다고 한들 어쩌겠습니까. 나는 열심히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그리고 어느 날 은퇴해 고향으로 돌아가 그저 조용히 바닷가에 앉아 물고기를 낚고 마음 속으로 음악을 들으면서 그것을 써두려고도 하지 않으며, 위대한 고요함 속에 내 몸을 뉘였으면 하고 생각합니다. 또 나는 그 땅에 묻히고 싶습니다. 내 고향 땅의 온기 속에 말입니다.
(윤이상, 루이제 린저, 『윤이상, 상처 입은 용』, 알에이치코리아, p.21.)
‘동백림 사건’이라는 독재 정권의 조작 사건으로 인해 고문을 당하고, 무기 징역까지 선고를 받았으나 국제 사회의 탄원으로 인해 겨우겨우 자유를 얻게 된 윤이상은 결국 자신의 음악적 창작의 원천이 되었던 그 땅으로부터 영원히 추방된다. 물론 그는 추방된 이후에도 현대 음악과 자신의 민족 공동체에서 발견한 음악적 영감들을 결합시켜 새로운 음악의 경지를 열어가는 삶의 고투를 지속한다. 이렇게 창작된 수많은 작품들에 대해 그는 이런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그렇습니다. 당시 나는 일을 하면서 서양의 작곡 기법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어요. 마치 내가 동양인이라는 것을 잊은 것처럼 보였을 겁니다. 하지만 내가 유럽의 새로운 기법을 내 것으로 만들었을 때, 바로 나는 그 기법으로 내 동양적인 관념을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1960년에 쓴 <바라>를 생각해 보세요. 거기서 나는 제례에 쓰이는 승무의 이미지를 이용했습니다. 동양인인 우리는 서양과는 다른 형식 개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윤이상, 앞의 책, p.124)
민족주의 음악가 시벨리우스가 고전주의 음악 전통을 북유럽식으로 해석한 <교향곡 2번>을 작곡했던 것처럼, 당시 현대 음악의 파격적인 형식을 깊이 이해한 윤이상은 이를 바탕으로 동양적 음악 전통을 접목시켜 세계 음악사에 유례를 찾기 어려운 새로운 음악을 탄생시킨다. 그러나 시벨리우스가 <핀란디아>로 핀란드 민족 정신의 상징이 되었다면, 윤이상은 이념적 대립으로 인해 자신의 위대한 음악적 성취를 정작 민족 공동체 내부에서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비극적 디아스포라의 삶을 이어 가게 된다.
결국 그의 사후 10년이 지난 시점인 2006년에야 동백림 사건이 조작된 사건이라는 것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으며, 고향을 떠난 지 49년만인 2018년에 그의 소원대로 유해가 통영으로 비로소 이장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조용히 고향에서 쉬고 싶다는 그의 희망은 실현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이념적 갈등으로 점철된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여전히 그를 둘러싼 논란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생전에 이미 자신의 삶의 가치를 인정받은 볼콘스키에 비한다면, 죽어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윤이상의 처지는 아직도 비극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첼로 협주곡>에서 알 수 있듯이, 윤이상은 완성된 삶을 누리기보다는 ‘상처 입은 용’으로서 도달하기 어려운 목표를 향해 삶의 항해를 지속하는 시지푸스적 면모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음에 인용한 글에서 <첼로 협주곡>의 의미를 살펴보면 그의 삶이 지향하는 바에 대해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윤이상 : 제 첼로 협주곡을 알고 계시죠? 그 끝부분의 옥타브 도약을 한번 떠올려보세요. 그 도약은 자유, 순수, 절대에 대한 욕구와 바람을 뜻합니다. 오케스트라에서는 오보에가 G#음에서 A음으로 글리산도로 올라가고, 이 A음은 트럼펫에 의해 이어집니다. 나에게는 트럼펫의 이 높은 음역이 언제나 신적(神的)이고, 경고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두 개의 트럼펫이 이 A음을 교대로 연주합니다. 첼로는 거기까지 도달하려 하지만 잘 되지 않습니다. 첼로는 글리산도로 G#음보다 4분의 1 정도 높은 곳까지는 올라가지만 그러나 더 이상은 올라가지 못합니다. 첼로는 단념합니다. 이 무한하고 포착하기 어려운 높이 즉, 요컨대 트럼펫의 A음이 마지막까지 남는 것입니다.
루이제 린저 : 이 약간 높은 G#음까지 오는 것 자체가 이미 아주 힘든 일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물론 A음으로 올라가려고 했지만 거기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것은 인생의 지속되는 고통이겠지요. 하지만 사람이 어느 높이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 자기 자신이 정확하게 알 수 있을까요. 더욱이 당신을 창조적으로 만드는 것은 이 절대적인 트림펫이 A음을 향한 긴장이 아닐까요? (윤이상, 앞의 책, p.20)
이처럼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목표인 자유, 순수, 절대를 향한 끊임없는 노력이 그의 음악세계를 상징하고 있기에, 그의 삶은 여전히 현재 한민족 공동체에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공동체의 정치적 미래를 생각해 보았을 때, 막막하고, 절망적인 느낌마저 받게 되는 요즘, 닿을 수 없는 A음을 향해 최선을 다해 달려가는 첼로의 강렬한 노력은 그 울림이 상당히 크다라는 생각마저 든다. 또한 그런 세계를 모색한 음악가가 우리 민족에게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하나의 자부심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래서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오늘 또 한번 윤이상의 <첼로 협주곡>에 귀를 기울여보게 된다.
이게 좋은 건지 심지어 맞는 건지는 모르겠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