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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국어교사 김지씨 Mar 13. 2023

암기에 대하여

대학원 수업 단상 (1)

교직에 처음 진출하였을 때 새로운 수업을 시도하려는 의지를 번번이 좌절시키는 한 선생님이 계셨다. 만든 지 10년이 넘는 교재를 경전처럼 받들면서, 거기에 담긴 내용들을 성직자처럼 경건하게 전달하라는 지상명령을 엄숙하게 전파하는 것이 자신의 가장 중요한 책무라고 생각하시는 분이었다. 자신의 명령을 전달하면서, 그분은 요즘 아이들은 기본적인 개념이 학습되어 있지 않은 학생들이니 중요한 개념을 암기할 수 있도록 충실하게 전달하고 확인하는 학습을 철저하게 하라고 항상 강조하셨다. 그런데 그 명령의 대상이 되는 학생들은 모의고사와 같은 입시와 관련된 학업 성취도로 따지면 당시 전국에서 가장 탁월한 성취도를 자랑하고 있던 15년 전 외고 학생들이었다. 그때 나는 궁금증이 생겼다. 이런 일방적인 전달 학습이 필요 없는 아이들은 도대체 전국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조금 극단적으로 말해서 ‘요즘 아이들에게는 암기가 필요하다’라는 명제는 인류 역사와 함께 하는 유구한 전통을 가진 명제가 아닐까 한다. ‘외워서 잊지 아니함’이라는 뜻의 암기는 교육의 필수적인 요소라고 볼 수 있다. 교육이라는 것이 더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에게서 적은 지식을 가진 사람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전달된 지식을 효율적으로 전파하고, 학습자가 그것을 ‘외워서 잊지 아니하였는지’ 확인하는 과정은 교사에게 꼭 필요한 절차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암기의 방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이냐는 데 있다. 

보통 ‘암기가 중요하다’라고 이야기했을 때 떠올리는 암기의 방식은 교사의 일방적인 전달과 그 내용에 대한 반복 학습이라는 과정으로 구성되는 것 같다. 많은 양의 정보를 교사는 효율적으로 전달하고, 그 정보를 학생들은 충실하게 반복, 습득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암기 학습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봐야 할 문제는 암기라는 것은 그렇게 일방적인 방식만으로 이루어지는 정신적 활동이냐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토의나 토론을 할 때에도 수많은 정보가 오고 가며, 그 속에서 엄청난 양의 지식들이 전달되고 학습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 대해서는 사람들은 보통 ‘암기’라는 표현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교과서의 내용을 외우는 것은 지독히 싫어하면서도 아이돌 그룹에 대한 지식을 달달 외우는 학생들의 학습 과정을 한 번 생각해보자. 그들은 어떤 과정을 통해 지식을 암기하게 되는 것일까? 아이돌 관련 교사가 있어서 그 정보를 집중적으로 전달하고 외우게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거기에는 일방적인 전달이 아닌 적극적인 탐색과 다방면의 교류가 있을 뿐이다. 개인적인 체험 하나를 들어볼 수도 있다. 교사가 되기 위해 배워야 할 지식들 중 상당수는 어디서 습득한 것일까? 질적으로 수준 높은 정보들은 다른 교사들 혹은 교수들과의 대화와 교류를 바탕으로 습득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사범 대학을 다닐 때 교수들에게 수업 시간에 전달받은 지식보다도 훨씬 낫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암기 교육이라는 것의 정의를 좀 더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암기 교육’은 정확히 말해서 ‘독백형’ 암기 교육이다. 여기에 대비되는 암기 교육은 ‘대화형’ 암기 교육일 것이다. 러시아 문학이론가 바흐친의 용어를 빌린다면 ‘단성적(單聲的)’ 암기 교육 vs ‘다성적(多聲的)’ 암기 교육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다성성(多聲性)은 단순히 반대되는 목소리와 관념들이 병치되어 있거나 연속적으로 표현되는 현상 이상의 것을 가리킨다. 이 음악적 메타포는 동일한 말을 서로 다르게 표현하는 다양한 목소리들이 동시에 들리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동일한 말은 동시에 서로 상이한 가치와 <음의 고저> 그리고 <리듬>을 보여준다. 작품을 창작하는 동안 그런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관현악 작곡가 – 소설가 –는 반복될 수 없는 각각의 발화의 특수성이 공명되도록 만들 수 있다. 

                                                       김욱동 편, 『바흐친과 대화주의』, 나남 (1990), p.73.   

   

다성성은 바흐친이 문학의 일반 이론을 정립하기 위해 제시한 개념이기는 하지만, 위의 인용문이 말하는 ‘동일한 말에 대한 다양한 목소리’들이 교차하는 상황은 학습이 벌어지는 토론과 대화의 공간에 대한 일반적인 묘사라고 말해도 크게 어긋남이 없는 듯하다. 이런 상황을 경험할 때 학습자들은 개념을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암기’의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좀 더 많은 대화 상황에 학습자들을 노출시켜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해방적 교육학의 대표적 실천가인 파울로 프레이리 또한 지식에 대한 정적인 개념 즉, ‘은행저금식 교육’을 명시적으로 거부하면서, 자신이 상파울로의 교육감으로 재직할 때 추진한 교육 개혁의 한 가운데에 ‘인터 프로젝트’를 정초하였다. 다학제적 접근에 근거한 ‘인터 프로젝트’는 현실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을 실천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생성적 주제’를 교육 현장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중요한 의제 중 하나로 제시한다. 교육과정이 구분된 교과 영역으로 지식을 나누어서는 안 되며, 모든 지식은 서로 관련되어 있다는 개념에서 기인한 ‘인터 프로젝트’는 교사-학생 간 상호작용을 통한 ‘대화적 접근’을 강조한다. 즉 “학생의 소외된 담론에서 계속되는 실수를 읽어 내는 것이 아니라, 글에서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각자의 가치와 다양한 말의 환영들이 복잡하게 표현되고 있음을 읽어내도록 한다.” (필라르 오카디즈 외, 유성상 역, 『교육과 민주주의』, 살림터, p.151) 고 이야기한다. 

그런 측면에서 보았을 때 지나치게 많은 양의 정보를 제시하고, 이를 주어진 시간 안에 빠르게 처리하는 학습 활동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의 고등학교 교육은 학생들의 능동성을 여전히 저해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지식의 산출 과정에서 조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으며, 그 실수가 자신의 삶에 커다란 장애물이 될 것임을 반복적으로 인식시키는 평가가 중심인 이 살벌한 교육과정은 현실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정보를 집중적으로 탐색하고, 심층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창의적 지적 경험을 구성하려는 교사들의 두려움 또한 배가시키고 있다.

그런데 여전히 교실 안팎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은 기초 학력이 부족한 아이들에 대한 집중적인 지식 교육이 필요하다는 그 문학 선생님의 케케묵은 조언과 한치도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독백적 암기를 통해 차별화된 지식을 수집하여 그것을 은행저축처럼 꼭꼭 담아두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식의 교육이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생각해보자. 지식의 독백적 전달 상황에서는 단 10분도 집중할 수 없는 2023년의 아이들을 상대로도 여전히 암기 교육을 해야 한다면 도대체 어떤 방법이 가능한 것일까?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다. 그냥 인강 수강권이나 선물해 주는 것이 좋은 교육인가? 인강은 차라리 듣고 싶을 때 들을 수 있고, 학생들이 멈추고 싶을 때 멈출 수 있으며, 강의 속도라도 조절할 수 있는 자유가 있으니까 더 좋은 학습 방식이 아닌가 말이다. 거기에다가 치열한 경쟁 속에 단 하나의 일타 강사로 살아남은 이들의 인생에 대한 조언 또한 서비스로 들을 수 있으니 얼마나 더 좋은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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