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남부 여행기 1
레몬 사탕과 비긴어게인
"저기, 레몬 사탕!"
모던하우스 계산대에 줄을 서고 있다가 발견한 노란 레몬 사탕. 포장지에 ‘Positano’ 글자가 보인다. 반가운 마음에 작은 포장으로 하나 골라 담는다. 계산 후 얼른 하나를 깨무니 입안 가득 레몬의 상큼함이 퍼진다. 그리고 포지타노와 아말피의 푸른 바다가 떠오르고, JTBC 프로그램인 ‘비긴어게인’ 노래들도 생각난다.
비긴어게인 이탈리아 버스킹
비긴어게인은 내가 즐겨보았던 음악 프로그램이다. 윤도현, 이소라가 영국과 아일랜드의 길거리에서 버스킹을 하던 첫 시즌부터 시청했다. 그 후로 여러 시즌이 있었지만 가장 즐겨본 것은 박정현, 하림, 헨리, 수현이 함께 했던 포르투갈 편과 이탈리아편이다. 그들 스스로 ‘패밀리밴드’라 부르던 가족 같은 캐미와 화음도 참 좋았다. 특히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박정현이 불렀던 ‘Someone like you(아델)’, 이탈리아 베로나 버스킹에서 부른 ‘샹들리에(시아)’는 유튜브에서 여러 차례 다시 듣기를 했다.
비긴어게인은 좋아하는 가수들의 노래를 라이브로 듣는 재미뿐만 아니라, 영상미가 뛰어나서 유럽 도시들의 아름다운 풍경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특히 드론 카메라로 찍은 도시 야경과 해변의 풍경은 내가 마치 그곳에 가 있는 느낌을 주었다. 버스킹 하는 지역의 풍경과 문화도 소개해 주어서 여행을 떠나고 싶게 만들었다. 노래하는 가수 뒤로 보이는 포르투의 멋진 다리 야경을 보고 포르투갈 여행을 꿈꾸게 되었고, 밀라노 두오모 앞 버스킹을 보면서 이탈리아에 가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이탈리아 여행을 꿈꾸게 만든 결정적인 공연은 바로 이탈리아 남부지방 아말피 버스킹이었다.
아말피와 라벨로 공연을 위해 패밀리밴드가 나폴리에서 출발해서 아말피 해안 도로를 달리는 모습이 방송에 나왔다. 화면은 깎아지는 듯한 절벽과 파란 지중해 바다로 가득 찼다. 멤버들은 감탄사를 연신 쏟아냈다. 그 아름다운 풍경을 화면으로 보던 나는 소파에서 내려와 텔레비전 앞에 다가가 앉았다. 아말피 해안 도로는 소렌토에서 살레르노로 이어진 50km의 해안 도로로 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유산이라는 자막이 화면에 지나갔다.
그들을 태운 버스는 절벽 위 작은 휴게소 같은 곳에 멈췄다. 생과일로 슬러시를 만드는 수레를 발견한 막내 수현이가 멤버들에게 레몬 슬러시를 한 턱 쐈다. 생레몬의 상큼함을 맛본 그들은 전망대로 다가갔다. 파란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바다와 절벽 위에 층층이 들어선 파스텔톤의 집들이 화면에 잡혔다. 이탈리아의 지상낙원으로 불리는 포지타노라고 한다. 멤버들은 아름다운 풍경에 감탄하며 노래와 춤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기분이 좋아진 수현이 ‘아말피 송’을 즉석에서 창작하여 신나게 부르던 장면도 나왔다. 내 마음도 덩달아 상큼해졌다.
푸른빛 바다의 아말피
햇빛에 물들은 아말피
사랑이 머물다 간 아말피
우리는 멀리서 여기까지 왔죠
바닷가를 함께 걸으며
수평선을 바라보네
아아아아 아말피
아말피 날 잊지 말아요
그날 기억하게 된 지명 포지타노와 아말피.
아름다웠다. 언젠가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알고 보니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선정한 ‘죽기 전에 가봐야 할 여행지’ 낙원 부문 1위에 포지타노가, BBC에서 선정한 여행지 1위로 아말피 해안 도로가 선정되었다고 한다. 한국인이 직접 투표해서 국내 항공사가 책으로 펴낸 ‘내가 사랑한 유럽 TOP 10’ 달리고 싶은 유럽 1위에 아말피 오픈카 투어가 실렸다. 언제쯤 저기에 가볼 수 있을까?
소렌토에서 ‘오 솔레미오’ 라이브로 듣기
이탈리아 남부 지방 관광을 흔히 한국에서는 나폼소 투어라고 한다. 세계적인 미항 나폴리, 고대 화산 유적지 폼페이, ‘돌아오라 소렌토로’의 소렌토, 이 세 지역을 돌아보는 코스이다. 이탈리아는 수많은 중세 도시들이 모여 하나의 근대 국가가 되었다. 그래서 하나의 나라라고는 해도 지역마다 자연환경과 지역적 특색도 다르고, 경제적인 격차도 크다. 대체로 르네상스와 산업화의 중심지였던 밀라노 등 북부 지역은 경제가 발전하였다. 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농업 위주의 남부는 밝은 지중해 햇살과 푸른 바다가 있는 휴양지의 이미지가 강하다. 드디어 나에게도 이탈리아 남부의 밝은 햇살 속을 거닐 수 있는 날이 왔다.
1월 5일, 이탈리아 여행 4일 차. 우리 일행이 탄 차는 로마에서 나폴리로 향하는 고속도로로 들어선다. 이탈리아 남부로 향하는 고속도로는 거의 직선이다. 아침 안개가 자욱한 도로를 빠른 속도로 질주한다. 점차 날이 밝아지고 안개가 사라진 풍경은 북부지방과는 사뭇 다르다. 보이는 집들은 대체로 낡았고, 빨래가 건물 밖에 펄럭거린다.
버스는 휴게소에 한 번 들른 후 나폴리 외곽으로 들어선다. 마침 축구 국가대표인 김민재 선수가 튀르키예에서 나폴리로 팀을 옮겨 뛰고 있는 시즌이다. 그래서 나폴리 사람들이 한국에 대해 관심이 많아지고 한국 관광객들도 더 늘어났다고 한다. 아쉽지만 아말피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기 위해서 나폴리는 원경만 바라보면서 그냥 지나간다. 나폴리 피자, 나폴리 커피도 같이 멀어지고 있다.
버스는 소렌토 초입의 전망 좋은 해안 절벽 도로가에 잠시 멈췄다. 소렌토 시내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떠난 연인에게 다시 소렌토로 돌아와 달라는 가사의 ‘돌아오라 소렌토로’는 1902년 소렌토에 휴가차 이탈리아 총리가 왔을 때, 호텔 사장이자 소렌토 시장이 친구인 작곡가 데 쿠르티스에게 곡을 부탁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이 노래로 소렌토는 더 유명한 휴양지가 되었다고 한다. 이 아름다운 휴양지의 이름을 딴 한국의 자동차 ‘소렌토’가 전 세계를 누비고 있기도 하다. 문화와 콘텐츠의 힘이 크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기념사진을 찍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차에 올랐다. 현지 가이드는 차에서 파바로티가 부른 '돌아오라 소렌토로'를 들려주었다. 또 산레모가요제 출신인 안드레아 보첼리, 일 볼로 등의 노래도 들려주었다. 그 사이 창밖에는 가로수들이 노란 레몬을 주렁주렁 달고 있다.
차는 이제 방향을 왼쪽으로 바꾸어 점점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다시 오른쪽으로 코너를 돌아서니 이제 아말피 해안 도로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성악을 전공한 현지 가이드는 이제 유명 가수의 노래를 유튜브로 틀어주는 것이 아니라, 직접 라이브로 '오! 솔레미오'를 불러주었다. 흥이 오른 가이드의 목소리가 지중해 밝은 햇살만큼 밝고 열정적이다. 이탈리아에 오래 살고 있는 사람이라 발음이야 말할 것도 없고. 내가 앉은 버스 맨 앞자리가 갑자기 공연장 1열로 바뀐다.
“브라보~!”
우리 일행들은 큰 박수와 함성으로 호응했다. 그 덕분인지 노래가 오늘 특히 더 잘 되었다며 혹시 녹화하신 분이 있으면 본인의 카카오톡으로 좀 보내달라고 하셨다. R석(?)에서 직관한 내가 영상을 보내 드렸다.
살다 보니, 라이브로 '오 솔레미오'를 들으면서 햇살 가득한 아말피 해안 도로를 달리는 이런 날이 오기도 하는구나!
떠난 후에야 현실이 되는 꿈의 포지타노
아말피 해안 도로는 좁고 위험하다. 하지만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보존을 위해 도로를 확장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은 큰 버스는 들어가지 못하고 승용차와 소형 버스만 통행할 수 있다. 또 편도 1차로여서 여름만 되면 유럽 각지에서 몰린 차들로 도로는 늘 가득 찬다.
풍경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운전자는 한눈을 절대 팔면 안 된다. 길 바로 옆은 천 길 낭떠러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지인이 운전해 주는 우리 차에서는 다들 모퉁이를 돌 때마다 바뀌는 풍경을 구경하고 사진 찍기 바쁘다. 그만큼 아름다운 길이다.
잠시 쉬고 간다며 차가 멈췄다. 버스에서 내리니 과일주스를 파는 수레가 보인다. 빨간 석류와 노란 레몬이 눈에 익다. 어디서 본 듯한 저 수레.
어, 그러면 이곳은!
맞다! 방송에서 수현이 레몬 슬러시를 사 먹었던 포지타노의 그 절벽, 바로 거기다. 아마도 포지타노를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포인트인가 보다. 포지타노의 풍경은 화면으로 볼 때도 아름다웠지만 실제는 더 아름다웠다. 높은 바위산과 절벽을 타고 올라가듯 지어진 집들이 아름답다. 그 아래 하얀 모래사장과 파란 바다와 요트. 1월의 바다 빛깔로 보기엔 너무 파랗다. 그런데 여름 햇살을 받으면 이 바다는 얼마나 더 푸른 코발트빛이 되려나!
비긴어게인 멤버들이 감탄하며 인생 사진을 찍던 바로 그 자리에서 나도 사진을 찍었다.
일행 몇 사람은 수레에서 석류주스와 레몬주스를 주문하고 있다. 나는 먼저 이 아름다운 풍경을 많이 찍고, 차에 오르기 전에 주스를 마시기로 한다. 멀리 전경 사진도 찍고, 바다와 해변도 찍고, 산과 절벽도 찍고, 주변에 피어있는 꽃도 찍고…. 화분의 빨간 제라늄처럼, 1월인데도 이탈리아 남부 지역에는 꽃이 붉다. 그리고 나무들도 초록색 잎을 가득 달고 있다.
어느새 가이드가 이제 차에 타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지금 착즙하고 있는 주스를 기다리는 한 분을 제외하고는 이미 다 차에 오르는 중이다. 이 상황에서 주스를 주문하는 것은 민폐가 될지 모른다. 바로 차에 올랐다.
그런데 주스가 맛있다는 말이 차 안 여기저기서 들렸다. 맛있는 주스를 아까 열창을 해주신 현지 가이드님께도 한 잔 대접하고, 나도 맛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살짝 아쉽지만 후회는 없다. 아름다운 포지타노 풍경을 카메라에, 그리고 내 눈에 담으면서 충분히 행복한 시간이었으니.
머무를 때는 비현실적이지만 떠난 후에야 현실이 되는 꿈의 장소
<에덴의 동쪽>으로 유명한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존 스타인벡이 포지타노를 표현한 말이다. 나도 그곳에서 풍경을 직접 볼 때는 너무 아름다워서 미처 다 실감하지 못했는데, 여행에서 돌아와 사진을 보며 저 말에 깊이 공감하게 되었다. 돌아와 보니 더 아름답고 또 가보고 싶은 그곳.
신들의 등산길 끝에 있는 지중해의 푸른 보석,
포지타노!
*2편에 아말피 여행이 계속 이어집니다. 다음 주에 또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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