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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쇠가 남긴 통 큰 선물, 더 게티 센터

캘리포니아 미술의 숲을 거닐다(더 게티 미술관 2)

by 새벽강

https://brunch.co.kr/@ethipia/29


대성당 앞에서 만난 여인들

미술 책에서 본 그림 중에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는가? 게티센터에서는 미술 시간에 배운 낯익은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폴 세잔의 <사과가 있는 정물>과, 모네의 <건초 더미>와 같은 인상파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세잔의 <사과가 있는 정물>(좌), 모네의 <건초더미>(가운데), 모네의 <아침의 루앙 대성당>(우)

빛에 따라 달라지는 색채를 담아내고자 했던 인상파의 대표작, 모네의 <아침의 루앙 대성당>도 만날 수 있다. 그는 1890년대 프랑스 북부 도시인 루앙에 머물면서 대성당을 여러 차례 그렸다.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성당의 빛과 색채를 담은 연작 중, 아침햇살을 받은 이 그림이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대성당 그림 맞은편에는 마네의 <봄>이 걸려 있다. 봄을 상징하는 이 아름다운 여인은 2014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6,510만 달러에 게티 품에 안겼다. 이 작품은 1882년 파리의 살롱에서 처음 공개되었을 당시부터 호평을 받았다. 꽃무늬 드레스를 입고 양산을 들고 있는 세련된 여성은 실제 유명 여배우였던 잔느 드 마르시이다. 이 여배우를 봄의 화신으로 표현한 것이다. 배경의 초록빛 식물과 파란 하늘에서 봄을 느낄 수도 있으나, 양산을 들고 있는 매혹적인 여인을 보고 있으면 마음에 봄바람이 살랑거린다.

마네의 <봄>


이날 나의 눈에 들어온 또 다른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으니, 그 여인은 바로 ‘레오닐라’이다. 초상화로 유명한 독일화가 빈터할터가 1843년에 그린 그림이다. 독일 귀족에게 시집온 러시아 공주 레오닐라는 우아하고 평온한 눈빛으로 관람객들을 나른하게 바라보고 있다. 이 미술관 건물의 특징인 천정에서 내려온 빛이 줄지어 이 여인을 비추고 있어서 더욱 신비롭다.

빈터할터의 <레오닐라의 초상>


아메리카에서 이탈리아를 만나다

웨스트파빌리온을 걷다 보면 곳곳에서 이탈리아를 만날 수 있다. 눈에 띈 대표적 작품은 윌리엄 터너의 <모던 로마 캄포 바치노>이다. 영국 풍경화가인 터너가 그린 로마 풍경에는 포로로마노의 대리석 기둥 너머로 콜로세움과 성당 두오모가 뿌옇게 서 있다.

그리고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이탈리아 풍경은 바로 베네치아이다. 유럽 귀족 자제들의 ‘그랜드 투어’에 늘 포함되는 베네치아는 같은 유럽 안에서도 그 풍광이 예술가들에게 특별했나 보다. 많은 화가의 손길로 다시 살아난 옛날의 베네치아가 여기저기 보인다. 대운하뿐만 아니라 산마르코 광장도 보여서 반갑다.

게티에서 만난 이탈리아 풍경(베네치아, 폼페이, 포로로마노)

폼페이 유적도 정말 사실적인 그림으로 만날 수 있다. 화가 쾨브케가 그린 <멀리 베수비오산이 보이는 폼페이 포럼>이다. 햇살이 비치는 폼페이 유적과 베수비오 화산, 그리고 그 앞에 나뒹굴고 있는 이오니아식 기둥과 잡초들이 발견 당시 폼페이 풍경을 보여준다. 아메리카 대륙 서부의 미술관에서 이탈리아를 조우하는 기쁨을 누린다.


테라스인가 전망대인가

다음 전시실로 이동하다가 바깥 공간이 보이길래 자연스레 문을 밀고 테라스로 나갔다. 아, 거기에도 거대한 풍경화가 있다. 실제 아름다운 캘리포니아 풍경이 파노라마 뷰로 펼쳐져 있다. 정말 명화가 따로 없다. 미술관 남쪽으로 선인장정원이 케이프(곶)처럼 튀어나와 있고, 그 뒤로 LA 시가지 풍경과 저 멀리 말리부 해안과 태평양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미국에 온 이후로 가장 미국 답고 아름다운 풍경이다. 눈도 마음도 시원해지는 기분이다. 그림을 보는 속도 차이에 따라 어느새 멀리 떨어진 일행을 찾아 이곳에서 사진을 남긴다. 좋은 건 함께 나눌 때 더 좋다.

LA 전망이 일품인 더 게티의 테라스

사실 이 미술관은 산타모니카 산맥이 지나가는 해발 270m 정상에 있다. 그래서 등산하지 않아도 멋진 전망을 만날 수 있다. 이런 지형적 특징으로 건축가도 아크로폴리스를 떠올렸겠지만, 그는 전시관 사이를 이동할 때 창밖에 보이는 풍경조차 하나의 작품으로 설계해 두었다. 그중에서도 웨스트파빌리온 테라스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가장 압권이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위대함을 표현하기에 인간의 언어는 늘 부족하다. 첨단 스마트폰 카메라로도 그 아름다움을 다 담을 수 없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눈과 마음에 최대한 저장!


여행을 다녀와 책상 위에 올려둔 <아이리스> 기념품 머그


웨스트파빌리온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써 버렸다. 젊은 시절 렘브란트의 ‘웃는 자화상’(1628년)도 아직 보지 못했고,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조각품도 못 본 게 수두룩하다. 가볼 곳은 많지만, 모이는 시간이 다 되어 간다. 일행과 1층의 기념품숍으로 일단 가서 게티센터를 기념할 수 있는 물건을 사기로 했다. 다양한 굿즈를 빠르게 스캔한다. 아이리스 그림을 사고 싶지만, 구기지 않고 한국까지 모셔갈 자신이 없다. 그래서 늘 책상 위에 두고 게티가 떠올려질 머그를 골랐다. 물론 아이리스가 프린팅 되어 있는 머그. 아마도 컵을 쓸 때마다 한동안 지금 여기를 떠오르게 해 줄 것이다.


센트럴가든의 붉은 꽃 우산

로버트 어윈이 설계한 센트럴 가든

남은 시간, 마지막 나의 선택은 센트럴가든이다. 이 아름다운 정원은 로버트 어윈의 작품이다. 500 종류 이상의 꽃과 나무가 자리 잡고 있다고 한다. 둥근 모양의 수변 정원과 경사진 잔디밭으로 이루어진 센트럴가든은 미술관을 방문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인증 사진을 찍는 곳이다. 시간이 없어 잰걸음으로 걷는다. 하지만 나처럼 바쁜 관광객이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도록 설계된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길도 지그재그로 되어 있어서 여유 있게 걷도록 한다.

우산 모양의 붉은 꽃 조형물 세 그루가 나타난다. 저 꽃을 최근 어디에선가 본 듯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제주도 한림공원 열대식물원에 가득 피어 있던 부겐빌리아 꽃이다. 그런데 저런 모양으로 가꾸어 두니 그 아름다움이 배가되고 참신하다.

센트럴가든의 부겐빌리아 꽃 조형물


꽃우산 위쪽으로는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진 작은 계곡과 초록색 잔디 정원이 가꾸어져 있다. 몇몇 사람이 들어가 누워 있다. 사람들이 많이 방문한 사진을 보니 저기에 누워 캘리포니아 햇살로 일광욕도 하고, 도시락을 먹는 사람도 있고, 누구나 자유롭게 들어가서 휴식을 취한다. 처음엔 '이래도 되나?' 싶어 놀랐지만, 바로 그 자유로움이야말로 게티센터가 방문객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처럼 느껴졌다. 센트럴가든에 오게 된다면 자유와 여유를 천천히 만끽하시라!


게티에서 만난 할머니

약속 시간에 늦을까 봐 허겁지겁 어라이벌 플라자로 뛰어왔다. 그런데 아직 일행들이 다 모이지 않았다. 갑자기 생긴 잠깐의 여유. 천천히 주위를 돌아본다. 우리 곁에는 두 명의 할머니가 계신다. 한 분은 백인이고 한 분은 동양인이다. 그들의 이름표 줄에는 수많은 배지가 달려 있다. 아마도 자원봉사 경험을 자랑스레 주렁주렁 매달고 계신 듯하다.


백인 할머니가 먼저 말을 걸어와 아시안 할머니에게 대화의 바통을 넘긴다. 홍콩에서 태어났다는 할머니는 스무 살에 미국으로 와서 60년 동안 살고 있다고 한다. 우리에게 어디에서 왔는지 묻는다. 한국에서 왔다고 대답하니, LA에 며칠 동안 머무르는지 디즈니랜드는 다녀왔는지 등등 질문을 쏟아내신다. 우리 일정에 디즈니는 없고 고등학교 방문이 있다고 했더니, 고등학교는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가 세계 최고라고 한다. 대학 교육은 미국이 우수하지만, 미국 고등학교에 대해서는 엄지손가락을 거꾸로 내리는 동작으로 자신의 의견을 밝힌다.


낯선 미국 할머니와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어 좋았다. 할머니의 의견에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미국이 더 뛰어난 점도 있고 우리보다 못한 점은 반면교사 할 수도 있다. 그래도 나는 무엇보다 이런 미술관이 부러웠다. 시니어들이 이런 멋진 곳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문화환경도 부러웠다. 한국에도 크고 아름다운 미술관이 많이 생기고 있지만, 문화란 하루아침에 꽃피는 것이 아니다.


더 게티 센터에는 하루 종일 관람해도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다양한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구두쇠가 준 통 큰 선물

‘문화유산은 후손에게 전해져야 하는 것이지 돈벌이 수단이 아니다’. 1966년 세계 최고의 부자로 기네스에 실리기도 한 폴 게티 회장은 손자 유괴 사건에서 본 것처럼 지독한 구두쇠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결국 사후에 많은 미국인의 존경을 받게 된 중요한 이유는 바로 게티센터에 있다. 그는 전 재산으로 재단(Getty Trust)을 설립하여 게티센터를 짓고 누구든지 입장료 없이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안타깝게도 그는 완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다양한 미술품들을 한 곳에서 이렇게 편하게 감상할 수 있다.


지금도 게티재단은 13조 원 이상을 보유한 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뮤지엄 재단으로서 전시, 교육, 연구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친절하게도 수많은 언어권에서 온 사람들을 위해 리플릿과 가이드를 제공한다. 물론 한글 리플릿과 앱/가이드도 한국어로 제공하니 고맙다.


삶은 우리에게 예상치 못한 고난을 주기도 하지만,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행운의 선물을 주기도 한다. 오늘 나에게 게티센터는 뜻하지 않게 만난 행운이다. 이런 행운을 준 구두쇠 게티 회장을 보면서 든 생각. 어쩌면 명화 보다 더 진짜 명작은 사람이 아닐까?

센트럴가든으로 내려가는 길에 찍은 나무 열매와 멀리 말리부 해안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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