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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와 재회하다, 더 게티

캘리포니아 미술의 숲을 거닐다(더 게티 미술관 1)

by 새벽강

고흐와의 재회

고흐를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번 LA 여행 일정에 게티 센터(The Getty Center Museum)가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미국 석유 부호 폴 게티(J. Paul Getty)가 세운 세계 최대 규모의 미술관이자, 더 브로드, LACMA와 함께 LA 3대 미술관으로 알려진 곳이다. 고흐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부푼다.


10여 년 전 서울에서 열린 고흐 전시회에 다녀온 적이 있다. 원화가 아닌, 빛을 이용한 미디어아트 전시였다. 요즘엔 이런 전시가 흔하지만 처음 접했을 당시의 신선한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벽 가득 빛으로 채워진 고흐의 그림 속으로 내가 들어온 것 같았다. 사이프러스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고, 밤하늘의 별은 반짝반짝 빛났다. 들판엔 농부가 건초더미에서 일하고, 사람들이 오베르 교회와 노란 집 앞 거리를 걸어 다녔다.

불멸의 화가 반 고흐전(좌) 생트 마리 드 라메르의 전경(우)

올봄 대전 시립미술관에서 ‘불멸의 화가 반 고흐전’도 관람했다. 그의 일생과 작품들이 시기별로 전시되어 있었다. 인상 깊은 작품은 <자화상>이었다. 푸른빛의 불안한 눈동자에서 고흐의 힘겨운 삶이 느껴지는 듯했다.

<생트 마리 드 라메르의 전경>도 기억에 남는다. 라벤더가 심어진 마르세유 근처 시골 마을과 성이 아름다운 색감으로 그려져 있었다. 고흐 특유의 두꺼운 붓터치인 임파스토 기법이 잘 드러나는 ‘씨 뿌리는 사람’ 유화 작품과 ‘감자 먹는 사람들’ 석판화도 전시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빨리 고흐의 작품과 재회하게 되다니!



영화 <All The Money>와 위대한 수전노 폴 게티

영화 올더머니(All The Money)는 1973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폴 게티 회장의 손자인 존 폴 게티 3세가 납치당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납치범은 게티 3세의 몸값으로 1,700만 달러를 요구한다. 남편과 이혼한 상태인 게티 3세의 엄마 게일은 게티 회장에게 손자의 협상금을 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자작극이라 생각하고 미루는 사이 납치범들은 게티 3세를 마피아 조직에 넘긴다. 협상에 진척이 없어 폴의 귀를 자른 사진을 보내자, 그제야 회장은 협상을 시작한다. 요구하는 몸값이 400만 달러로 뚝 떨어졌지만, 회장은 더 낮은 금액을 역제안하여 마침내 합의한다. 그 최종 금액은 세금 공제를 받을 수 있는 최대 금액이라니, 그는 철저한 사업가이자 협상가이다. 결국 수개월 뒤 게티 3세는 귀가 잘린 상태로 풀려난다.

영화<올더머니> 포스터

영화는 유괴 사건을 통해 물질주의에 찌든 인간 군상 – 게티 회장, 납치범, 언론인들의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손자의 몸값에도 인색했던 게티 회장의 모습이 영화 속에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어떻게 게티 회장은 사후에 미국인들로부터 존경받는 부자로 손꼽히게 되었을까?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크로폴리스를 트램 타고 오르다

버스는 LA의 고속도로를 달린다. 언덕 위 아름다운 집들이 보이는 즈음에 빠져나와 주차장으로 향한다. 진입로에 크게 그려진 고흐의 그림과 파란색 Getty 글자가 반긴다. 주차장 계단을 오르면 우리를 미술관으로 이동시켜 줄 트램이 있다. 트램을 타기 위해 승강장에 서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 밝은 기대감이 묻어 있다.

게티로 올라가는 트램 승강장(좌) 올라가면서 보이는 브렌트우드 풍경(우)

햇살에 빛나는 하얀색 큐브 모양의 트램이 들어온다. 주말에는 긴 줄을 서야 한다고 들었지만, 다행히 기다리지 않고 바로 탑승하는 행운을 누리며 미술관 나들이를 시작한다. 트램은 창이 넓은 편이라 바깥 풍경이 잘 보인다.

"와, 여기 진짜 비싸겠다!"

일행의 말에 밖을 보니 멋진 저택들이 언덕 곳곳에 있다. 한눈에 봐도 부촌이다. LA의 대표적 부촌 중 한 지역인 브렌트우드라고 한다.


트램은 불과 5분 만에 대리석 건물들로 둘러싸인 미술관 입구 마당(어라이벌 플라자)에 내려준다. 하얀 트램에서 내리니 바닥도 하얗고, 건물도 하얗다. 순백이라기보다는 아이보리빛이다. 여기 건물과 바닥에 사용된 모든 대리석(트래버틴)은 이탈리아 로마 근처 티볼리 지역에서 공수해 온 것이다. 대리석을 매끈하게 가공한 면도 있고, 거친 표면 그대로 자연스럽게 사용한 부분도 있어서 첫인상이 단조롭지 않고 고급스럽다. 계단에는 고대 조각 작품이 놓여 있어서 분위기를 잡아준다.

트램에서 내리면 만나게 되는 뮤지엄 입구 홀 풍경. 건물과 벽, 바닥이 모두 아이보리색이다


뮤지엄 입구 홀을 지나 안마당으로 들어선다. 게티 하이라이트 작품 포스터가 휘날리는 오른쪽으로 특별전시관이 있다. 그 건물 필로티에는 거대한 기둥으로 둘러싸인 넓은 카페테리아가 보인다.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 기둥의 현대적 모습 같다. 그런 느낌이 맞나 보다. 해설을 들어보니 실제로 건축가 리처드 마이어가 이곳을 설계할 때 아테네 언덕 위에 있는 아크로폴리스를 모티브로 했다고 한다. 그리고 로마의 판테온을 만든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여름 궁전을 컨셉으로 디자인했다고 한다. 미술관 건물부터 이미 예술이다.


안마당의 중심에는 분수가 있다. 시에라 네바다 산맥에서 가지고 온 희고 노란 암석이 작은 산처럼 놓여 있고 푸른빛 도는 맑은 분수가 이곳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

파빌리온 사이 중정에 있는 분수


웨스트파빌리온에는 붓꽃이 피어 있다

전시관은 동서남북 총 네 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고, 구름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분수와 가장 가까운 웨스트파빌리온으로 들어간다. 하얀 벽과 자연광을 끌어들이는 넓은 창이 있어 로비 공간이 환하다.

들어가는 광장층(1층)에는 조각 및 장식 예술이, L2(테라스층)에는 사진센터가, 상층(2층)에는 회화 및 조각 작품이 전시 중이다. 전시실 입구에 알베르트 자코메티의 ‘서 있는 여인’이 표현 그대로 정말 서 있다. 그 여인에게는 살짝 눈길만 한번 건네고 우리는 예술 작품 같은 대리석 계단을 오른다.


자코메티의 <서 있는 여인>(좌), 아이리스가 있는 전시실(가운데), 고흐의 <아이리스>(우)

2층 첫 전시실에 들어가자마자 멀리 정면에 푸른 잎과 보라색 꽃이 눈에 들어온다. 맞다, 바로 그 작품. 고흐의 <아이리스(붓꽃)>이다! 고흐의 많은 작품을 좋아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좋아하는 작품이다. 사망하기 1년 전쯤 병세가 악화된 고흐는 생레미의 정신병원에 스스로 입원한다. 정원에 핀 보라색 붓꽃을 보면서 그는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별이 빛나는 밤>과 <아이리스> 모두 이때 그려진 것들이다. 그의 삶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바람에 일렁이는 듯한 청록색 잎들 위로 남보라색 꽃들이 피어 있다. 왼쪽 위에는 노란 꽃들이 배경처럼 놓여 있고 보라색 꽃들 사이로 흰색 꽃 한 송이가 눈에 띈다. 저 홀로 다른 색으로 피어 있는 흰 붓꽃을 왜 그는 크게 그린 걸까? 고흐의 눈에는 저 하얀 꽃이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남들과는 다른 처지에 있는 자신의 모습으로 그렸다는 설도 있다.

'괜찮아요! 홀로 외롭지 않았기를 바랍니다'라는 말을 건네고 싶다.


눈에 담고, 휴대폰에도 담고 또 담는다. 다른 그림을 보다가 다시 돌아가서 붓꽃을 한참 바라보았다. 루브르의 주인공인 모나리자는 관람객이 너무 많아서 바로 앞에서 눈을 맞추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게티의 주인공인 붓꽃은 바로 눈앞에서 붓 터치의 질감조차 생생하게 만날 수 있다. 문제는 가드도 없고 액자 유리도 없다 보니, 직원 눈을 피해 손으로 만지는 관람객조차 있다. 익스큐즈미,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고흐의 아이리스는 1987년 11월 경매에서 당시 미술 경매가 최고가인 5,390만 달러에 LA 산타모니카 언덕 위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미술 작품의 아름다움과 위대함을 이야기하기 위해 금액 이야기를 지금 쓰고 있는 것이 안타깝지만, 그만큼 아름답고 훌륭한 작품이라는 말이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예술이고 특히 그림이라지만, 깊은 조예가 없는 사람도 이 그림의 아름다움은 그냥 느낄 수 있지 않을까. 보랏빛 붓꽃이 가슴속으로 들어올 것이다.


*더 게티 2편이 다음에 이어집니다.

2편에서는 모네 등 다른 화가의 그림과 미술관 에피소드가 담겨져 있습니다.

https://brunch.co.kr/@ethipia/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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