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를 꽃피운 도시 피렌체 여행기 1
왜 피렌체였을까?
수많은 유럽 도시 중에서 왜 이탈리아 피렌체가 배경이 되었을까? 준세이와 아오이 사이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그린 일본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를 보면서 궁금해졌다.
열아홉 살에 만나 서로 사랑하던 두 사람. 몇 년의 시간이 흐른 뒤 준세이는 고미술품을 복원하는 피렌체 공방에서 유학하고, 아오이는 밀라노 주얼리숍에서 일하고 있다. 사실 10년 전에 그들은 아오이의 서른 살 생일에 피렌체 두오모에서 만나기로 했다.
결국 영화는 헤어졌던 두 사람이 피렌체에서 우연히 재회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탈아입구(脫亞入歐)'의 기치 아래 서구 사회를 동경해 온 일본인들의 오랜 유럽 로망은 잘 알려져 있다. 그래도 아름다운 유럽 도시들 중에서 피렌체가 영화의 배경으로 선정된 데에는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왜 피렌체(플로렌스)였을까? 피렌체는 대문호 단테의 베아트리체를 향한 순수한 사랑 이야기가 남아있는 곳이자, 도시 전체가 예술과 역사로 가득 차 있는 르네상스의 중심지다. 다채로운 건축물, 그림, 조각 등은 영화의 주인공인 아오이와 준세이의 애틋하고 복잡한 감정선을 시각적으로 아름답게 표현하기에 좋았을 것이다. 또 준세이가 유학 와서 배우는 고미술 복원 스토리와도 잘 맞아떨어진다.
이쯤 되니 또 다른 궁금증이 꼬리를 문다. 그렇다면 어떻게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을까? 단테를 비롯하여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보티첼리, 갈릴레이 등 수많은 천재들이 한 시대, 한 지역에 나타나 활동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저런 궁금증을 품고 피렌체로 향한다. 거대한 쿠폴라(돔)와 아름다운 갈색 지붕의 풍경을 떠올리며.
사이프러스 나무와 토스카나 평원
베네치아를 출발한 버스는 고속도로를 질주한다. 고속도로는 평야 지대를 달리고 있어 오로지 직진만 한다. 옅은 안개가 낀 평원은 고요하다. 이따금 과수원과 집이 지나간다. 그런데 길이 조금 휘어지고 바깥에 산과 구릉 풍경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바로 아펜니노산맥을 지나가는 것이다. 장화 모양의 이탈리아반도를 따라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산줄기이다. 이탈리아의 알프스 지역인 돌로미티처럼 험준하지는 않다. 바깥 풍경을 보니 이제 토스카나 지방에 들어선 모양이다.
이탈리아는 북부의 험준한 알프스와 그 아래 평야 지대, 중부의 오래된 구릉 지대 등 지형만큼 전원 풍경도 다양하다. 그중에서 토스카나 지방의 풍경이 나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에 나오는 막시무스의 집을 떠올리면 된다. 큰 구릉과 언덕 위로 사이프러스 나무가 줄지어 서 있다. 평원이지만 편평한 땅이 아니라 둥글둥글한 언덕, 그 위에 오래된 집들은 평온하고 온화한 느낌을 준다.
스위스의 전원 풍경은 만년설을 머리에 이고 호숫가 언덕에 뾰족 지붕 집들이 평화롭다. 드넓은 들판에 깔끔한 집들이 모여 있는 프랑스 전원 풍경도 아름답다. 아름다움은 개인 취향이지만, 내 마음속 선택은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풍경이다.
피렌체의 전망대, 미켈란젤로 광장
버스는 아르노강을 건너 미켈란젤로 광장에 우리를 내려준다. 이 광장은 1871년 미켈란젤로의 탄생 400주년을 기념하여 만들어졌다. 이름에 걸맞게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이 설치되어 있다. 물론 진짜가 아니라 모조품이다. 곳곳에 설치된 다비드상을 통해 미켈란젤로가 토스카나 사람들이 얼마나 사랑하는 예술가인지 알 수 있다.
이 광장은 전망대 역할을 한다. 언덕 위에 있어서 피렌체를 조망하기 좋고 특히 야경 명소로 유명하다. 아래로 내려다보니 피렌체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에 나왔던 그 갈색 지붕 집들이 가득하다. 그 사이에 피렌체 두오모의 거대한 쿠폴라와 조토의 종탑이 가장 먼저 눈에 띄고, 왼쪽으로 시뇨리아 광장의 베키오궁, 아르노강 위에 걸쳐진 베키오 다리가 눈에 들어온다. 두오모 쿠폴라가 잘 나오게 사진을 찍는다.
옛날 모습을 그대로 잘 간직한 이 도시의 풍경은 아름답다. 어떻게 이렇게 몇백 년 동안 같은 모습으로 도시가 유지될 수 있을까. 역동적으로 변모하는 한국 도시와 비교하면 신기한 일이다. 유럽 도시는 전통을 잘 보존하고 여유 있는 삶의 속도를 유지하는 것이 장점이다. 훌륭한 조상을 둔 덕분에 전 세계에서 관광객들도 계속 찾아온다. 한편으로는 계속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미켈란젤로 광장을 오가는 길에 가이드는 피렌체를 배경으로 하는 푸치니의 오페라 <잔니 스키키>에 나오는 아리아를 틀어 준다. 바로 ‘Oh, Mio babbino caro(오,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다. 귀에 익은 이 곡은 제목 때문에 한국에서는 어버이날에 종종 라디오에서 나왔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과의 교제를 아버지가 허락해 주지 않는다면 아르노강에 빠져 죽을 거라는 가사가 반전이다.
직접 보니 더 아름다운 피렌체 두오모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내려와 다리 건너에 버스가 멈춘다. 유럽의 많은 유적 도시가 그러하듯 구도심에는 일반 차량 진입이 통제되기 때문이다. 다행히 피렌체의 유명한 관광지들이 가까이 몰려 있어 도보로 이동해도 별 무리는 없다. 이탈리아 구도심의 길바닥은 대부분 크고 작은 돌로 되어 있다. 언제 만들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세월의 흔적이 역력하다. 건물들도 그렇다. 오래된 대리석 벽뿐만 아니라 벽화가 낡아서 흐려진 벽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마저도 이 도시의 매력이기도 하다.
성악의 나라답게 골목길 벽마다 유달리 공연 포스터가 많이 붙어 있다. 한국처럼 천으로 된 배너나 전광판 광고가 아니라 그냥 종이에 인쇄된 포스터가 많이 보였다. 걷다 보니 고딕 양식의 산타 크로체 성당과 광장이 나타났다. 성당 정면 왼쪽에는 단테 상이 서 있다.
걷다 보니 전혀 예상치 못한 골목길 사이로 피렌체의 주인공, 피렌체 두오모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이드가 우리를 극적으로 이끌어 준 것일까? 이 거대하고 화려한 대성당의 정식 명칭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Cattedrale di Santa Maria del Fiore)로 '꽃의 성모 마리아’라는 뜻이다. 아주 큰 건물이다 보니 골목 사이사이로 쿠폴라가 보인다. 영화에서도 쿠폴라가 보이는 골목 앞에서 준세이와 아오이가 마주 서 있는 장면이 나온다. 거기도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는 인기 있는 사진 촬영 장소다.
높이 100m, 지름만 해도 44m에 달하는 이 쿠폴라는 유럽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규모다. 놀랍게도 처음 성당을 다 짓고도 쿠폴라를 만들지 못했다고 한다. 한참 동안 그 상태였다가, 르네상스 건축가인 브루넬레스키가 로마에 있는 판테온에서 영감을 얻어 마침내 쿠폴라를 완성한 것이다.
거대한 규모에 압도되기도 했지만, 가까이 가서 대리석 벽과 조각을 보고 나서 또 놀랐다. 사진으로 볼 때는 하얀 대리석 벽 위에 붉은색과 초록색 부분은 다른 건축 재료라고 생각했는데, 모두 진짜 대리석이다. 이탈리아 각지에 운반해 온 다양한 색깔의 대리석을 정교하게 쌓아서 저런 문양이 나오도록 했다니 그저 놀랍다. 게다가 건물 곳곳에 세워진 조각상들은 하나하나 완성도가 높았다. 무른 이탈리아 대리석 덕분이라고 해도, 감탄할 수밖에 없는 솜씨였다. 피렌체 두오모는 멀리서도 아름다웠지만 가까이에서 볼 때 훨씬 더 아름다웠다.
조토의 종탑도 멋있다. 쿠폴라가 두오모의 주연을 담당하고 있지만, 아래에서 올려다볼 때 종탑도 주연 못지않은 매력을 뽐낸다. 두오모의 정문 맞은편에 있는 산 조반니 세례당의 천국의 문도 볼수록 놀랍다. 금으로 도금된 청동 문 위에 정교하게 새겨진 조각들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피렌체 투어에서 아쉬운 점 중 하나는 바로 엄청난 수의 관광객이다. 준세이와 아오이가 재회한 쿠폴라나 종탑에 오르려면 몇 시간씩 줄을 서야 해서 올라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심지어 성당 내부 입장 줄조차 아주 길었다. 결국 줄 서기를 포기하고 두오모 주변을 구경하였다.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들도 구경하고, 두오모 모형 기념품을 하나를 사면서 전망대에 올라가지 못한 마음을 대신했다.
* '왜 피렌체였을까?'의 해답을 찾아가는 여행기가 다음 편에 계속 이어집니다.
https://brunch.co.kr/@ethipia/46
*지난 7월 말부터
브런치스토리에 글을 올리기 시작하여
30번째 글을 발행하려고 오늘 들어와 보니,
제가 여행 분야 크리에이터로 선정되었습니다.
모두 방문해 주시는 작가님, 글벗님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