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규슈 여행기
1월 어느 목요일 저녁, 한국에서 이륙한 지 불과 50분 만에 비행기가 후쿠오카 공항에 착륙했다. 정말 부드럽게 랜딩 한다. 마음속으로 기장님께 박수를 쳐 드리고 공항을 나왔다.
공항에서 호텔까지 택시를 타기로 했다. 일본 택시비는 비싸기로 악명 높다. 하지만 호텔까지 거리도 가까운 편이고, 우린 네 명이니까 고민 없이 택시를 탔다. 덕분에 호텔에 잘 도착했다. 호텔은 낡았지만 그런대로 깨끗하다. 일본 호텔에 대한 큰 기대는 없다. 예전에 패키지로 갔을 때의 그 좁은 객실과 푹 꺼진 욕조에 실망하고 놀란 적이 있다. 그래도 이번에는 그보다 훨씬 낫다. 만족하며 얼른 짐을 풀고 호텔 밖을 나선다.
기내식으로 샌드위치를 먹었지만 충분히 허기가 질 저녁 시간이다. 하카타역에 있는 라멘 가게에 가기로 했다. 캐널시티처럼 하카타역에도 전국의 유명한 라멘집들이 다 모여 있는 식당가가 있다. 그중 가장 인기가 많다는 츠케멘집은 굳이 히라가나를 해독하지 않아도 한눈에 알 수 있다. 대기 줄이 유난히 긴 집이 바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긴 웨이팅을 감수하고 싶지는 않다. 그나마 대기인원이 적은 신신라멘에서 먹기로 했다. 신신라멘도 이치란라멘처럼 유명한 프랜차이즈인데 그 맛은 과연 어떨지...
자리를 잡고 돌아보니 한국 관광객보다는 현지인들이 훨씬 많다. 퇴근길의 남자 동료들끼리 술 한 잔 기울이는 테이블도 있고, 젊은 친구들끼리 모인 테이블도 있다. 라멘과 사이드로 맥주와 만두를 시켜 놓고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그들의 평범한 저녁 일상 속으로 들어왔다. 낯선 곳으로 여행 온 이 느낌, 참 좋다!
우리 집 모녀는 이 가게의 가장 대표 라멘으로 주문했다. 아들은 차슈가 더 많이 나오는 메뉴로 시키고, 나는 명란볶음밥을 시켰다.
드디어 라멘이 나왔다. 한국 백화점에서 먹었던 비주얼과 비슷하다. 반으로 잘라져 면 위에 올려진 계란 반숙 색깔이 먹음직하다. 아들은 차슈부터 흡입한 후 면과 국물을 들이켰다. 입맛에 맞는 모양이다.
그런데 모녀의 젓가락질은 갈수록 느려지더니 면과 국물이 그냥 다 남아있다. 작은 그릇에 덜어서 먹어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국물이 많이 짜다. 그리고 돼지고기 육수가 국물 베이스라서 금방 느끼하다. '억쑤로' 맛있다고 추천하기 어려운 맛. 차라리 내가 시킨 명란 볶음밥도 역시 짜지만, 라멘보다는 나았다. 명란을 넣어 볶고 그 위에 한 스푼의 명란이 또 올라가 있다. 그것까지 같이 비벼 숟가락질하다 보니 어느새 바닥이 보인다. 예전 여행에서도 느꼈지만, 한국에서 먹는 일식보다 현지에 먹는 일식은 대체로 더 짠 것 같다.
한국보다는 밤에 빨리 문 닫는 일본이지만, 이곳 JR하카타시티 일대는 신칸센이 다니는 큰 역 주위여서 그런지 늦은 시간까지 사람들이 많다. 라멘집을 나오면서 하카타역을 품고 있는 JR하카타시티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철도 도시락인 에키밴을 파는 가게도 보고, 일본 여행 기념품을 파는 가게도 들렀다. 귀여운 병아리 만주가 쌓여있다.
여기저기 구경하며 걸어 나오다 보니 사람들이 긴 줄을 서 있는 빵집이 있다. 두 가지 크루아상을 파는 곳인데, 줄이 빨리빨리 줄어들길래 거기에서 호텔에서 밤에 먹을 간식을 득템 하여 왔다. 호텔에 도착해서 딸내미가 검색한 인터넷 정보에 따르면 꽤 유명한 집이라고 한다. 크루아상과 호텔 입구 편의점에서 사 온 간식거리들을 침대에 펼쳐놓았다. 각자 손길 가는 것으로 야식까지 야무지게 챙겨 먹고 잠을 푹 잤다.
아직도 꿈나라인 가족들과는 달리, 일정 시간만 자고 나면 저절로 내 눈은 떠진다. 천천히 일어나 호텔 창밖을 본다. 길거리에는 출근하는 현지인들이 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새삼 불과 몇 시간 만에 이방인이 되어 건물과 사람, 버스와 택시를 멍하니 내려다본다. 옷을 챙겨 입고 아내와 아침 산책을 나간다.
호텔 로비에는 일본 조간신문이 몇 부 꽂혀있다. 이렇게 종이 신문을 본 적도 오래되었지만, 신문에 일기예보 그림과 NHK를 비롯한 일본 텔레비전 프로그램 안내 실려 있어 옛날 생각이 나게 한다. 이렇게 아직 아날로그적인 부분이 일본에서는 여기저기에서 발견된다. 최근에는 카드나 전자 결재가 많이 늘어나고 있다고는 하나, 물건 하나 살 때마다 거스름돈으로 동전을 받게 된다. 그 자잘한 동전들로 주머니가 채워지는 것도 그렇고.
산책의 목적지는 호텔 근처 있는 신사이다. 불과 5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다.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이들을 지나 도리이와 하얀 깃발이 펄럭이는 신사 입구에 도착했다. 작은 연못가에 붉은 동백이 피어있고 그 건너에 작은 신사 건물이 있다. 신사 입구에서 손을 씻고 입을 헹군다는 샘 풍경이 정갈하다. 아까 길거리 가로수와는 크기가 사뭇 다른 큰 나무들은 푸른 잎들을 가득 달고 있다. 제주도보다 살짝 더 남쪽인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포근한 날씨다.
도시 한복판에 이렇게 일본 전통의 향기가 물씬 나는 신사가 예상보다 좋다. 저기 신사 입구에 크게 서 있는 부채 모양의 물건은 복을 가져다주는 걸까? 작은 아치 모양의 다리를 건너 신사 뒤로 돌아가니 한국 사찰에 있는 푸근한 포대화상이 떠오르는 작은 석상이 넉넉한 뱃살을 내밀고 서 있다. 귀여운 석상 앞에 누가 음료수 하나를 바치고 갔다. 근처에 새들이 아침을 지저귀는 나무들 사이로 작은 길이 나 있다. 계속 들어가 보자.
신기한 일이다. 좀 전에 그곳이 하나의 신사인 줄 알았는데 주황색 도리이들을 지나가니 훨씬 더 큰 신사와 널찍한 공간이 짠~! 하고 나타난다. 그러면 이곳이 스미요시신사인가? 현지인들이 신사에 두 손을 모으고 고개 숙여 기도하는 모습에서 이곳이 새삼 일본이구나 느낀다. 낯선 곳을 느릿느릿 돌아보는 즐거움을 누리며 반대로 계속 나간다. 그랬더니 반대편에도 신사 입구가 있다. 여기가 신사로 들어오는 정문인가 보다. 아까보다 훨씬 더 큰 도리이가 서 있는 입구가 큰 도로가에 닿아있다.
도로변까지 나갔다가 다시 거꾸로 돌아선다. 이제야 신사 입구로 제대로 들어가는 모양이다. 절 입구에 사천왕상이 있듯이 신사 입구에는 양쪽으로 험상궂으면서도 우스꽝스러운 무사가 지키고 서 있다. 그리고 뱀띠 해인 을사년을 축원하는 포스터와 웃으면 복이 온다는 한자가 보인다. 같은 문화권임을 느끼게 해 준다. 다만 을사년이 120년 전 아픈 역사를 떠올리게 만든다.
개 모습의 석상이 여럿 세워져 있는 신사 마당을 지나 이제는 왔던 길을 거꾸로 천천히 돌아 나왔다.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뉴스로 접하면서 신사라고 하면 부정적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그런데 일본 전역에는 수많은 신사가 있고, 더 수많은 신들이 존재한다. 아마도 자연재해가 빈번했던 환경에 살면서 어려움을 이겨내고자 한 샤머니즘적 기원의 결과물들이 아닐까. 전범들을 신사에 함께 봉헌하고 기도하는 것은 그들의 침략을 받은 우리로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인생의 애환과 불안한 마음을 신에게 의지하면 살아가는 민초들의 모습은 전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인간적인 모습이 아닐까. 별 기대 없이 나간 아침 산책에서 일본의 아날로그적 모습과 인류 보편적인 모습을 발견하고 돌아온다.
*금요일에 2화 <다자이후 대길 산책>이 이어서 발행됩니다.
오늘도 방문해 주신 작가님, 독자님 감사합니다! 금요일에 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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