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박물관 탐방기 1
흔히 대영박물관이라고도 하는 영국박물관. 이번 여행 중에도 두 명칭이 혼용되었다. 글을 쓸 때 어떤 명칭이 더 적당할지 고민한 끝에 본문에서는 '영국박물관'으로 표현하기로 했다. 박물관 홈페이지에도 ‘Great’ 없이 그냥 British Museum이라고만 나와 있고, ‘대(大)’ 자를 붙이는 것은 불필요한 사대주의 같기 때문이다.
보안 검색대를 통과하여 후문으로 입장했다. 박물관 입장료는 무료였다. 대신 입구에 기부를 받는 함이 있었다. ‘도네이션 5파운드’라는 표시와 함께 각국 언어로 감사 인사가 적혀 있다. 한글로도 ‘귀하의 지원에 감사드립니다’라고 제대로 쓰여 있었다. 영국은 박물관의 나라라고 불릴 만큼 많은 박물관이 있고, 대부분 무료입장이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특히 학생들이 쉽게 박물관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보였다.
가이드는 한국관으로 안내하면서 설립 과정을 설명해 주었다. 박물관 측이 공간을 줄 테니 설치할 의향이 있는지 일본에 먼저 제안했다. 일본에서는 국민 모금 활동이 천천히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 사이 한국에도 제안을 했는데, 몇몇 대기업이 바로 후원하여 한국관 개관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우리나라의 '빨리빨리' 문화와 한국 기업의 추진력이 긍정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볼 수 있다.
결국 한국실(입구에는 '한국실' 이라고 적혀 있었다)이 2000년 11월에 개관하면서 현지 언론의 큰 주목을 받았다. 박물관 정문을 들어서면 큰 로비에 ‘Samsung Digital Discovery Centre’ 현수막 걸려 있으며, 대한항공 스카이패스 회원이 오디오 가이드 대여 시 할인을 받을 수 있다. 한국 기업의 박물관 지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한국관에 들어서면 일단 ‘한영실(韓英室)’이라는 현판을 단 한국 기와집 모형이 눈에 들어온다. 한국의 전통 가옥 구조를 보여주며, 바닥 전체가 우리나라에서 직송한 나무로 되어 있어 정성을 느낄 수 있다. 전시 유물로는 용이 그려진 백자, 달항아리, 병풍 등이 놓여 있었다.
한국관이 생긴 것은 자랑스러웠지만, 다소 빈약해 보이는 전시품들은 아쉬웠다. 전시된 유물들은 ‘오래 보아야’ 아름다움을 알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화려한 신라 금관이나 반가사유상 등 외국인이 보자마자 ‘와우(Wow)!’를 연발할 만한 작품들을 모조품으로라도 전시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훈민정음이나 한국의 세계문화유산 소개도 좋겠다. 한국관을 찾은 전 세계 관람객들이 깊은 감흥을 받고 나갈 수 있는 전시관이 되기를 바란다.
중국관과 일본관은 그냥 지나쳐 곧바로 이집트관으로 갔다. 관람객들로 엄청나게 붐볐다. 영국박물관을 대표하는 유물로 로제타 스톤을 비롯한 이집트 유물들이 많이 꼽힌다. 박물관 기념품 중 로제타 스톤과 관련된 상품이 가장 많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로제타 스톤은 1799년 프랑스 나폴레옹 군대가 이집트 나일강 하구 로제타 마을에서 발견한 비석이다. 하지만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이 이를 차지하여 영국박물관에 전시되었다. 비석에는 이집트 상형문자, 이집트 민중문자, 고대 그리스어로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고 한다. 처음에는 해독이 불가능했지만, 고대 그리스어를 통해 역으로 추적하여 마침내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의 의미를 해독할 수 있었다. 내용은 국왕인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공덕을 기리는 것이라고 한다.
이집트관에는 람세스 2세의 흉상도 있다. 진짜 잘 생겼다. 그런데 가슴에 큰 구멍이 뚫려 있다. 옮겨오는 과정에서 생긴 거라는 안타까운 설명이 있었다. ‘진저맨’도 인상적이었다. 진저맨은 실제 고대 인간의 미라이다. 죽어서 자연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자연 미라가 된 진저맨. 몇 천 년이 지나도 자연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남의 나라에 전시된 그의 모습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이집트관에는 수많은 미라 모형과 목관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유물 수가 많아도 너무 많다. 박물관을 통틀어 가장 많은 사람이 몰려 있는 이 구역의 관람객 수만큼이나 유물의 양이 엄청났다. 그저 양적으로 너무 압도적이라는 느낌만 들어서 오히려 다른 감흥을 느끼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토록 많은 유물은 어찌하여 지중해를 건너 이곳까지 오게 된 걸까?
문득 궁금해졌다. 이집트박물관과 영국박물관 중 고대 이집트 유물을 더 많이 소장하고 있는 곳은 어디일까? 지난 11월에 이집트는 '이집트 대박물관(Grand Egyptian Museum, GEM)'을 공식적으로 전면 개관했다. 약탈 문화재 반환을 요구하는 이집트의 강력한 표현이자, 자국 유물을 보존 및 전시할 역량이 있음을 세계에 알리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로제타 스톤은 과연 이집트로 돌아갈 수 있을까?
유럽 여러 도시 광장에 서 있는 오벨리스크들을 보며, 과거 이집트에는 대체 얼마나 많은 오벨리스크가 있었을지 궁금해진다. 그리고 지금 이집트에 남아 있는 건 몇 개일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문화재는 그 자리에 있는 것이 가장 바람직해 보이지만, 침략과 약탈의 역사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고대 그리스관으로 이동했다. 이곳 역시 사람들이 꽤 많았다. 책에서 봤음직한 고대 그리스 조각들이 여럿 전시되어 있었지만, 여기에서도 너무 많은 유물이 전시되어 있어 몇몇만 눈에 띌 뿐이었다. 그런데 다른 그리스 조각들이 한쪽 방에 별도로 전시되어 있다. 뭘까? 바로 파르테논 신전에서 가져온 유물, 흔히 ‘엘긴 마블(Elgin Marbles)’로 불리는 대리석 조각들이다.
엘긴 마블은 그리스가 오스만 제국(터키의 전신)의 지배를 받던 시절, 영국의 오스만 제국 대사였던 토마스 엘긴 백작이 그리스에서 반출한 파르테논 신전의 대리석 유물이다. 이 유물들은 파르테논 신전 지붕 아래 삼각형 공간인 페디먼트(Pediment)의 조각상들과 신전 상단 벽면(프리즈)에 장식되어 있던 부조들이다. 이 부조들을 길게 떼어와 전시해 두고 있었는데, 그 양이 엄청났다. 또, 지붕을 여인들이 떠받치는 모양의 기둥인 카리아티드(Caryatid)의 진품 기둥 하나도 이곳에 있었다. (나머지 진품 5개는 그리스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 있다. )
엘긴 백작은 문화재에 관심이 없던 오스만 제국 관료들을 설득하여 연구 목적으로 반출 허가를 받았다고 한다. 당시 오스만 제국이 파르테논 신전 안에 화약을 보관했다가 베네치아의 공격으로 신전 지붕이 파괴되면서 조각품들이 훼손되었다. 이때 엘긴은 파편뿐만 아니라 남아있던 부분까지 떼어내 영국으로 가져온 것이다. 영국은 공식적인 허가를 받았다고 주장하지만, 현재 정확한 문서 기록 증명은 되지 않고 있다.
영국으로 들어온 이 조각들을 영국 정부가 매입하여 보관해 오고 있다. 영국의 유명 시인 바이런은 자국의 이러한 엘긴 마블 반출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했다. 또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그리스는 '불법적으로' 가져간 고대 유물 반환을 요구했다. 하지만 영국은 '합법적'으로 가져온 것이라는 이유로 거부했다.
1960년대, 그리스의 배우 출신 정치인 멜리나 메르쿠리가 반환 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영국은 그리스의 문화재 보존 역량 부족과 인류 문화유산 보존 관리 및 연구 차원에서 영국에 있는 것이 낫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이에 격분한 그리스는 어려운 국가 재정에도 불구하고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을 신축했다. 엘긴 마블이 전시될 공간까지 확보하고 반환을 요구했으나, 영국 정부는 묵묵부답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시관 관람이 끝나고 크니도스 사자상이 있는 영국박물관 중앙 홀, 그레이트 코트로 나왔다. 이곳은 기념품 판매점, 푸드코트, 오디오 가이드 대여점 등이 있는 넓은 공간이다. 그레이트 코트는 유리로 된 원형의 천장 지붕으로 덮여 있는데, 2000년 밀레니엄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세계적 건축가 노먼 포스터의 작품이다. 한눈에 봐도 멋있다.
홀에서 정문을 통해 밖으로 나와 박물관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개운치 않고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영국박물관 전면 파사드도 전형적인 그리스 신전 양식이었고, 거기 페디먼트에 설치된 멋진 조각상들을 보니 그리스의 안타까운 입장이 다시금 생각났기 때문이다.
이집트, 그리스와 영국 간의 문화재 반환 갈등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과연 어떻게 해결되어야 할까? 전 세계에서 문화재를 약탈하여 지금의 박물관을 만든 영국, 프랑스를 비롯한 강대국은 쉽게 동의하기 어렵겠지만,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합당하지 않을까? 그 나라가 자발적으로 양도한 것도 아니며, 이제 보관 능력도 있다면 말이다. 최근 바티칸에서 그리스 문화재 몇 점을 돌려보낸 것은 긍정적인 변화이다. 우리나라 역시 문화재를 많이 약탈당한 나라여서 동병상련의 마음이 들기도 한다. 요즘 인기 높은 국립중앙박물관과 대구 간송미술관의 문화재 수호 노력이 새삼 소중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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