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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애리 Sep 28. 2015

르네상스, 그리스·로마 시대를 그리워하다

보티첼리는 왜 하필 이교도 여신인 비너스를 그렸을까? 



라파엘로 산치오 '아테네 학당'

     

라파엘로 산치오의 아테네 학당’ 속 인물들 

라파엘로 산치오(Sanzio Raffaello)의 ‘아테네 학당(Schola Atheniensis)’은 바티칸 궁전 내부의 방에 그린 그림으로,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그리스 철학자들을 한데 모아놓은 그림이다. 사실 여기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은 서로 다른 지역에서, 다른 시기에 태어나서 살았기 때문에, 일종의 상상화라고 볼 수 있다. 이 그림 속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철학자들이 등장한다. 수학시간에 너무도 잘 알려진 피타고라스, 유클리드를 비롯하여, 불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던 프톨레마이오스, 유명한 소크라테스 등을 비롯하여 가장 중앙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림 속에서 손을 뻗어 이 세계를 가리키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플라톤은 초월적이고 영원의 세계인 이데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듯 하다. 

플라톤의 철학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이데아라는 개념인데, 이데아란 현실세계란 모든 것의 본질인 이데아의 그림자일 뿐이라는 동굴론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에서, 특히 피렌체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플라톤과 그의 ‘이데아’라고 할 수 있다.      


르네상스에 대해서

‘르네상스(Renaissance)’라는 말은 이탈리아어 리나시멘토(Rinasimento)를 어원으로 한 프랑스어 단어로, 대개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 이탈리아 피렌체를 중심으로 한 유럽의 문예부흥 시대를 일컫는다. 사실 이 단어는 당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1855년 프랑스 역사학자 쥘 미슐레(Jules Michelet)가 중세와 구분짓기 위해 최초로 사용하고 스위스 역사학자 야콥 부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에서 시대개념으로 쓰기 시작하여 굳어지게 된 개념이다. 

기독교 중심의 시대에서 17세기 근대로의 변화를 가능케 했던 르네상스 시대는 중세에 비해 문화예술의 새로운 움직임이 두드러졌던 시기이다. 십자군 원정의 실패와 함께 기독교에 대한 회의가 퍼졌고, 중개무역도시의 활성화, 상업의 발달 등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으며, 그리하여 이 시대를 기점으로 봉건제도가 점점 붕괴되기 시작했다. 

예술가라는 존재가 전면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은 바로 르네상스 시대일 것이다. 이전의 장인(artisan)이라는 개념에서 점차 벗어나기 시작한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들은 여러 가지 새로운 기법과 상징, 철학적 사유를 통해서, ‘예술가가 표현하는 절대적인 가치’를 예술작품을 통해 드러낸다. 이러한 변화의 시기를 가장 크게 이끌었던 곳 중에 하나가 바로 피렌체라는 도시다.      


피렌체를 지배한 가문메디치

14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피렌체는 수많은 도시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러나 피렌체의 상인들은 중개무역과 금융업을 통해서, 피렌체를 이탈리아의 가장 큰 도시로 탈바꿈시켰다. 여러 차례에 걸친 십자군 원정을 통해서 기존의 플랑드르 지방과 영국과의 중개무역에서 북아프리카와 중동지역으로까지 무역의 범위를 확대한 피렌체는, 이제 14세기 후반이 되자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무역도시가 되었다.

이탈리아의 가장 부유한 도시인 피렌체가 르네상스의 중심지가 된 데에는 피렌체를 실질적으로 지배했던 가문인 메디치(Medici)가 가장 큰 역할을 했다. 금융업으로 막대한 재산을 모은 메디치 가문은 15세기 코시모 데 메디치와 그의 손자 로렌초 데 메디치라는 걸출한 인물로 인해 발전해왔으며, 16세기에 이르러서는 두 명의 교황을 배출하고 프랑스 왕비를 배출하는 등 이탈리아를 비롯하여 유럽 전역에까지 큰 영향을 행사했다.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Medici, 1389-1464)는 1462년 ‘플라톤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인문학자들과 예술가들 후원하기 시작하면서 플라톤 철학을 부활을 꿈꾼다. 476년, 서로마제국이 붕괴하고 중세시대를 거치면서도 계속 이어져온 동로마제국은 15세기가 되자 오스만투르크와의 전쟁으로 붕괴 위기를 맞이했다. 당시 동로마 제국에는 그리스어 원전의 연구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는데, 코시모 데 메디치는 동로마 제국의 학자들을 대거 초대하여 피렌체의 플라톤 연구를 피렌체에 부활시켰다. 이후 그의 손자이며 위대한 로렌초라고도 불린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Medici, 1449-1492)는 이러한 중흥을 이어나가며,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르네상스 예술가들을 후원하여 당시의 문예부흥을 이끌었다.      


신플라톤주의 

플라톤은 우리의 세계를 감각으로 인지할 수 있는 세계와 추상적이고 참된 세계인 이데아(Idea)로 나누었다. 감각으로 인지할 수 있는 세계는 플라톤에게 이데아의 희미한 그림자와 같은 것이었다. 이 중 만물의 실체이자 본질인 이데아는 구체적인 사물의 이데아로부터 시작해서 추상적인 이데아에 이르기까지 계층적으로 존재하는데, 그 중 최고의 이데아는 아름다움 그 자체로 규정되는 ‘선(善)’의 이데아다. 이러한 절대적 아름다움인 이데아를 얻기 위해서는 일종의 신성한 광기가 필요한데, 이것이 바로 ‘에로스(Eros)’에 의한 사랑이다. 플라톤은 이러한 사랑을 고상한 에로스와 저속한 에로스로 나누었는데, 에로스를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아름다움의 여신인 아프로디테도 마찬가지로 세속적인 아프로디테와 천상의 아프로디테로 나뉘게 된다. 

플라톤주의의 전통은 중세에는 동로마제국, 즉 비잔틴에서 계속 이어지게 된다. 비잔틴에서는 플라톤 연구를 고대 그리스 시인과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와 결합하여 이뤄졌는데, 플라톤을 아리스토텔레스보다 우위에 두고 플라톤주의를 기독교 신학과 조화시키고자 했다. 이러한 기조는 당시 오스만투르크의 공격을 받고 있던 동로마제국에서 많은 학자들이 코시모 데 메디치에 의해 초대되고 이후 대거 이주하면서 바로 이탈리아 피렌체의 신플라톤주의로 이어지게 된다.

1482년, 마르실리오 피치노(Marsilio Ficino, 1433-1499)는 『플라톤 신학』을 출간하여 고전 철학을 그리스도교와 결합하려고 시도했다. 피치노는 플라톤 아카데미에서 활동하며 코시모 데 메디치의 후원을 받으며 예술가, 인문학자들과 교제해왔는데, 그의 사상은 동시대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쳐왔다. 그는 인간이 고귀한 이유가 불멸의 영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이러한 영혼을 통해서 신에게로 상승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신의 존재가 아름다움을 통해서 마치 빛처럼 세상에 방사된다고 보았는데, 그의 철학에 따르면 이러한 신의 존재, 즉 아름다움을 인지하고 사물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어 표현하는 것이 예술이며 이러한 예술을 통해서 절대적인 미를 찾아내려는 것, 아름다움을 향유하고 감동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 


보티첼리가 비너스를 그린 이유

피치노의 신플라톤주의는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건축가이자 인문학자였던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 1404-1472)는 조화로운 미를 수학적 비례 속에서 찾았다. 이러한 비례의 아름다움에 대한 고찰은 알베르티 뿐만 아니라 르네상스 예술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모나리자>로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 역시 간접적으로 신플라톤주의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이도 있는데, 과학적인 관찰과 정밀한 묘사에 의해서 사물의 본질을 드러내는 그의 예술이란 바로 자연 속에 숨어있는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일종의 사랑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는 신플라톤주의 철학을 작품에 오롯이 담아낸 예술가로 그의 작품 속에서 드러나는 아름다운 인간의 육체 속에서는 정신적인 미, 신의 원리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신플라톤주의 철학이 당시의 예술가들의 창작원리에 영향을 미친 것 만큼이나, 그 철학 속에 등장하는 주요 개념인 ‘미의 여신’ 역시 예술가들에게 영감이 되곤 했다. 로렌초 데 메디치의 후원을 받았던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의 작품 중 가장 잘 알려진 <비너스의 탄생>이라는 작품도, 이러한 신플라톤주의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기독교 중심의 세계인 중세 시대에,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일종의 이교도적인 신인 ‘비너스’를 그림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이단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신플라톤주의 철학 연장선상에서, 르네상스 화가들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비너스 혹은 아프로디테는 미의 여신으로서 아들인 큐피트 혹은 에로스와 함께 아름다움으로 상징되는 불멸의 신성함을 표현하게 된다. 플라톤이 나누었듯, 세속적인 아름다움이 아닌 천상의 아름다움을 가진 비너스는 보티첼리의 작품들 속에 신성함을 표현하고 있다. 아름다운 비너스의 자태와 부끄러운 듯 살짝 몸을 가리고 있는 그녀의 정숙함은 바로 이 그림 속에 표현된 아름다움이 세속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천상의 아름다움이며, 이 아름다움을 향해서 감상자가 느끼는 감동 역시 저속한 에로스가 아니라 신에게로 도달할 수 있는 고상한 에로스인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과 그 정신과연 과거로의 단순한 회귀인가

르네상스 예술을 한 마디로 정의내리기는 쉽지 않다. 북유럽과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그 양상이 조금 다르며,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들을 모두 하나로 묶어서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르네상스는 그리스·로마 문화의 부흥을 통해 당시 사람들의 관심이 신에서 인간으로 옮가간 시기라고 단순히 정의내릴 수 있을것인가? 

사실,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은 과연 그리스·로마 시대로의 단순한 회귀만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르네상스 시대를 거쳐서 중세의 신 중심의 세계관이 이 다음에 올 계몽주의 시대에 인간 중심으로 서서히 옮겨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세기 프랑스의 학자가 중세와 근대 사이의 시대를 위해 차용한 용어이듯, 르네상스는 하나의 문화라고 정의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과도기일지도 모른다. 




황정미, <신플라톤주의 미개념과 회화의 정신성>, 연세대학교

박지은, <신플라톤주의 관점으로 본 산드로 보티첼리>, 이화여자대학교

최인규,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수요에 관한 경제학적 연구>, 원광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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