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없이 파리에서 한 달 살기
파리에서는 낯선 사람과 대화를 할 일이 참 많다. 낯선 사람들에게 가벼운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 금기시 되어있는 한국에서와는 달리, 파리 사람들은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과 같은 공간에 있고 같은 것을 보고 있다는 것 만으로 가볍게 대화를 건네곤 한다. 그래서 나는 세살난 아기같은 프랑스어로 미술관 앞에서 만난 어느 노신사와 파리의 미술관들이 소장한 인상파 화가들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기도 했고, 길 물어보다 만난 사람에게 박물관을 추천받기도 하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사람에게 치즈 먹는 법에 대해서 일장 연설을 듣기도 했다(물론 내 프랑스어 실력으로 저걸 다 알아들을리는 만무하다).
파리에서 머무른지 2정도 되었을 때, 나는 이런 파리 사람들에게 완전히 익숙해졌다. 나도 모르게 스스럼없이 (물론 다소 의심스런 프랑스어로) 옆 사람에게 말을 건네는 경지까지 왔을 때 즈음에, 누군가와 익숙한 언어로 수다를 떨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혼자 여행을 하다보면 자유로워서 좋지만 한편으로는 외롭고 심심하기도 하다.
그러다 나는 친구를 만들게 되었다. 아르헨티나 사람인 H와 필리핀 사람인 D였다.
이 두 사람은 파리에 본사를 두고 있는 에너지회사에 기술연수를 와서 머무르는 중이었다. 나는 처음에 이 두 남자가 커플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카톨릭교가 규정하는 결혼에 대해서 시시콜콜 불만을 터뜨리는 D와 아르헨티나에 없다는 자라(ZARA) 매장만 보면 열광하며 나에게 옷을 입혀대는 H 때문에 두 사람이 카톨릭 문화권에서 금기시되는 성적취향을 가졌고 파리에서 사랑의 도피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혼자 상상하곤 했다(소설 쓰는 사람의 직업병인듯). 물론 나중에 가서 내가 착각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만.
H는 프랑스어도, 영어도 잘 못했기 때문에(새 기기에 대한 기술연수라서 언어가 딱히 필요없다고 했다) 나는 주로 D와 함께 그동안 못했던 폭풍수다를 떨면서, 셋이서 파리 시내를 쏘다녔다.
H는 항상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그는 D와 내가 수다를 떨면서 앞서 걸어가고 있으면 뒤에서 뭔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 아무도 눈여겨 보지 않는 길바닥의 뭔가를 찍고 했다. 나는 그가 예술가의 심장을 가진 엔지니어라서, 사진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거라고 지레 짐작했다(역시 소설쓰는 사람의 직업병이다). 스페인어를 전혀 몰라 H와는 말이 한 마디도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가 뭘 찍는지 물어보지 못했고 아마도 말이 통했더라도 왠지 실례같아서 그에게 물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D는 영어가 통하지 않아서 파리가 싫다고 했고, H는 식당에서 뭔가를 주문하거나 새로운 상황에 닥칠 때마다 스페인어를 조금이라도 알아듣는 사람이 D밖에 없어서 침울해보였다. 내 프랑스어는 정말로 형편없는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셋 중에서 가장 나았다. 그러다보니, 어설프게 프랑스어를 알아들으며 파리에 늘 오고 싶었던 나 혼자만 파리를 찬양하곤 했다. 파리에 온 사람이면 누구나 씌인다는 콩깍지에 씌여서 파리가 너무너무 아름다우며 사람들은 너무너무 친절하고, 세련되고 문화의 중심인 도시에 와있다는 것이 황홀하다고 말하곤 했다.
D는 내가 하는 파리에 대한 찬사를 들으면서 이따금씩 피식 웃으며 H를 보았는데, 물론 H는 영어를 못 알아들으므로 어디론가 뛰어가서 길바닥 사진을 찍으면서 '푸푸' 혹은 '피피' 소리를 내며 웃곤 했다. 카메라를 들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면서 이따금씩 길바닥에서 뭔가 보물을 발견한 듯 헤헤 웃으며 사진을 찍는 H를 데리고 다니다보니, 마치 호기심많은 커다란 래브라도 리트리버 한 마리를 데리고 산책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대체 H가 뭘 대단한 걸 발견하고 저리 좋아하고 있는건지 궁금해졌다.
"물어 볼 게 있는데, H는 뭘 계속 찍고 있는거야?"
나는 D에게 물었다. D는 내가 묻기를 기다렸다는 듯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친구를 불렀다.
"헤이, H! 카메라로 뭘 찍는 거지?"
카메라 찍는 시늉을 하는 D를 보고, 래드라드 리트리버와 닮은 아르헨티나 사람 H는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내가 그에게서 들어본 것 중 가장 긴 문장으로 대답했다.
"Paris is full of shit(파리는 똥으로 가득차 있어)."
그리고는 카메라 LCD화면을 나에게 보여주었는데, 나는 그 순간 그가 이따금씩 친구 D를 보면서 했던 정체모를 의성어 '푸푸PooPoo'와 '피피PeePee'의 뜻을 깨달았다.
"파리 길거리는 정말 더럽게 짝이 없거든. H는 길거리에 있는 똥과 오줌을 찍고 있는 거야. 그걸 아르헨티나에 있는 여자친구에게 보낼거래. 미친 친구야, 안그래?"
D가 그렇게 부연설명을 하고나서 H에게 카메라를 건네주면서 "He's 'Loco Loco'(그는 미쳤어)"고 하니, H는 엄지손가락을 자랑스럽게 치켜올리며 카메라를 받아든다.
그때부터 우리 세 사람의 관광놀이는 똥과 오줌을 찾는 다소 변태적이고 정신나간 모험으로 변질되었다.
나와 D가 앞서 걸어가다가, H가 찍고 싶어하는 대상물을 찾으면 '푸푸' 혹은 '피피'라고하며 H를 부른다. 그러면 H는 환호를 지르면서 카메라를 들고 다다닥 뛰어와서는 그것을 찍는다. 거리의 행인들은 우리를 보면서 킥킥대며 웃는다.
우리는 팡테옹에서 뤽상부르 공원을 지나 어느 거리에 있는 피자집으로 걸어가는 30분 동안 수십번의 '푸푸'와 '피피'를 외쳐댔는데, 그동안 그저 아름답다고만 이상화했던 파리가 사실은 똥과 오줌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건물들은 사실 백여년이 넘어 낡은 외벽을 수리한다고 비계가 대어져 있기 일쑤였고, 귀퉁이가 떨어져나간 담벼락에는 흉물스런 낙서들이 그려져 있었으며, 공기는 매연과 하수구 냄새로 역겨웠으며, 바닥 곳곳에는 H가 사랑하는 각종 오물들로 지뢰밭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고보니, 나는 꿈꾸던 파리에 왔다는 환상에 젖어서 모든 것을 '장밋빛 글래스'를 통해서 보지 않았던가. 파리의 겨울 날씨는 음습하기 짝이 없었고, 거리 곳곳에는 캣콜링을 하는 남자들로 가득차 있었으며, RER에서 만난 프랑스인 '백인' 경찰들은 어린 북아프리카 출신인 듯 한 소녀에게 심할 정도로 가혹하게 소리를 질러댔다. 멀쩡한 얼굴로 다가와서 소매치기를 하는 집시와 만원 지하철에서 지갑을 노리는 소매치기들은 또 어떤가.
나는 장밋빛 글래스를 눈에서 떼어내고 파리를 바라볼 수 있었다. 파리는 나에게는 꿈꾸던 장소였지만, 이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일상을 영위하는 장소였다. 내가 한국에서 매일매일 겪었던, 이따금씩은 고통스럽고 벗어나고 싶은 그러한 일상이, 파리 사람들에게는 펼쳐지고 있을 것이다. 구 시가지의 수백년 된 건물은 서서히 세월 속에 침식되고 있었고, 이 도시도 여느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200만명이 배출해낸 오물과 차량에서 나오는 매연으로 들끓고 있다.
H의 말마따나, 파리는 똥으로 가득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