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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애리 Aug 23. 2017

포스트 소비에트적인 소비생활

2년, 카자흐스탄의 일상

어린 시절 나에게 소련이란 북한과 김일성 다음으로 가는 악한 존재였다. 물론 소련이라는 게 명목상으로는 연합체이며 국가가 아니라는 것은 훨씬 뒤에 역사를 배우면서 알게 되었지만, 그때는 소련이라는 "국가"는 가제트 형사에 나오는 악당 같은 존재로만 여기고 있었다. (사실 늘 고양이를 쓰다듬고 있는 클로 박사의 캐릭터 설정 자체가 역사 속 유명한 고양이 집사이자 소련의 지도자였던 블라지미르 레닌에서 따온 것이긴 하다) 


1990년대이 되자 공고할 것 같았던 소련은 순식간에 해체되고 냉전이 끝났다. (물론 한국에선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린 아직도 북한과 냉전 중이다) 그래서 소련이 붕괴되어 중앙아시아의 각 나라들이 차례로 독립하기 시작했을 때에도, 우리는 현대사시간에 동시대에 진행되고 있는 놀라운 역사를 간단히 '소련이 마침내 해체되었다. 북한도 곧 붕괴할거다. 자본주의 만세' 정도로만 배우게 되었다. 


카자흐스탄은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가 대통령이 된 이래, 독립한 구 소련 국가들에게는 힘든 시기였던 1990년대를 비교적 잘 빠져나왔다. 세계에서 9번째로 큰 영토와 멘델레예프 주기율표의 거의 모든 원소들이 채굴된다는 풍부한 광산자원을 갖춘 나라였던 카자흐스탄은 미국과 러시아, 중국 사이에서 노련한 외교를 펼치며 중앙아시아의 큰 형님 정도로서의 위치로 자리잡아왔다. 


하지만 독립이래 무려 2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소비에트 시절의 영향은 사람들 속에 그대로 녹아있다.  시스템에서, 점원의 무뚝뚝한 얼굴에서도, 거리 이름에서도, 소비에트의 기억은 아직도 남아있다. 나는 레닌의 이름을 딴 거리(대개 그 도시에서 가장 큰 거리 중 하나이다)를 지나, 무뚝뚝하고 불친절하기 그지없는 마가진(가게) 주인에게 돈을 내고 물건을 '얻어' 오며,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소련 군인들을 기리는 공원에서 조깅을 하고, 우리가 전형적인 소비에트식이라고 부르는 느린 행정 시스템을 겪으며 불평을 한다. 




카자흐스탄에서 어느 날, 나는 마가진에 갔다. 집 근처에 있는 그다지 크지 않은 슈퍼이다. 


입구 차양막 앞에는 우즈벡식 기름밥인 쁠롭이나 만두와 같은 뺄메니 등을 파는 코너가 있고, 긴 회랑과 같은 슈퍼 내부에는 구 소련 각 국가에서 수입된 와인이나 보드카가 있는 주류코너와 달콤한 과자, 건조식품들이 진열된 코너를 지나 끝까지 들어가면 고소한 냄새가 감도는 화덕에 구운 둥근 빵인 리뾰쉬까나 흑빵이 차곡차곡 쌓여있곤 했다.  입구에는 슈퍼의 상호를 상징하는 붉은 색 앞치마와 머릿수건을 한 점원이 무표정한 얼굴로 손님에게서 돈을 받고 거스름돈을 던지듯이 쟁반 위에 올려놓고 있다.(이건 사실 무례하려고 하는것이 아니라, 손님과 손이 접촉되는 걸 피하려고 그런것 같다) 


이날은 내가 자주 사먹던 크래커가 어쩐 일인지 들어와있다. 1+1으로 팔고 있는 커다란 곽이 한 통이 있었고, 조그만 상자가 한 통이 있었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단 과자들 천지인 나라다. 달고 짠 것을 싫어하는 나로서는 담백한 크래커를 찾기가 힘들어서 그 브랜드 과자를 즐겨먹고 있었다. 또 언제 들어올지 모르므로 나는 그것이 보이자마자 큰 것을 얼른 집어들었다. 이번에 한꺼번에 재어놓지 않으면 또 언제 이 물건이 들어올지 모르니까. 



어쨌거나 1+1짜리 큰 크래커 상자를 집어들고 나는 계산대로 향했다. 인사를 하자 계산원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짧게 인사를 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내가 집어든 크래커 상자가 바코드 인식이 안되는 것이다. 


한국이었다면, 계산원이 바코드 숫자를 찍어서 어떻게든 입력을 했겠지. 특히 내가 가져온 상자가 마지막 상자라는 점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당연히 그렇게 해 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마가진 점원은 절대로 그렇게 귀찮은 일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주 당당하게 나에게 크래커 상자를 다시 내밀며 말했다. 


"바코드가 안찍히네요. 내일 와서 사가던지, 다른 걸 가져오던지 하세요."


'그게 말이 되냐고! 숫자로 찍어서 입력해달라고! 아니면 그냥 금액이 적혀 있으니 금액만 찍어서 계산하면 되지 않아? 아니면 저 옆에 서 있는 매니저를 불러서 방법을 물어보라구요!'라는 말은, 내가 한국에서라면 했었을 말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 날, 내 뒤로 길게 선 줄을 돌아보며, 내가 한 말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거 마지막 남은 제품인데, 내일 사러오면 누가 먼저 사가지 않을까요?"


"내일 와서 사가던지, 다른 걸 가져오라고요."


내 말에 점원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 말을 들은 내 두뇌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지금 한 마디를 더 하면 짜증이 난 점원은 안 판다고 할지도 모른다(사실 그런 일을 한 번 겪은 적 있었다)->어쨌건 작은 상자의 크래커라도 사놓는 것이 좋다->지금 안 사놓으면 또 한 달이나 뒤에 만나볼지도 모르잖아?->한 달 동안, 어쩌면 몇 달동안 먹을만한 과자 없이 보내는 것 보다는 지금 작은 상자라도 사는게 나아. 


그렇게 생각한 나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면서 얼른 대꾸했다. 


"아, 그런가요? 잠시만요! 작은 걸로 다시 가져올게요."


점원은 너그럽게 그러시라고 하는 재스춰를 취해보이면서, 다음 손님들에게 조금 있다 계산을 할테니 가만히 있으라고 한다. 


그렇게 길게 줄을 선 카자흐스탄 사람들이 내가 다시 크래커 상자를 갖다놓고 다른 상자를 집어서 달려오는 것을 차분하게 기다렸다. 그렇게 가져온 크래커 상자는 다행히도 바코드가 제대로 찍힌다. 점원은 영수증과 잔돈을 접시 위에 던져놓으며, 마치 독지가가 빈민가 아이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도 건네주듯 나에게 흐뭇한 표정으로 크래커 상자를 건네주었다. 




2년간 나의 소비생활은 무뚝뚝하고 무성의하기 그지없는 가게 점원들로 점철되어 있었다. 돈을 지불한다는 것만으로 모든 권리를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한국의 소비자로서 살아온 몇 십 년간의 의식은,  빠르게 사라졌다. 가게의 점원들은 돈을 받고 물건을 거래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지 절대로 나에게 굽신대며 친절하게 하려고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 기계공이나 목수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판매 과정이라는 공장에서 일하는 직공이었고, 자본주의적 감정노동을 하고자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아니다. 


구 공산권 국가에 대한 여행기를 읽어보면 단골로 나오는 이야기는 소비에트적인 불친절함이다. 절대 웃지 않는 승무원, 무뚝뚝한 식당주인, 물건을 사려고 했더니 거의 화를 내는 가게 주인. 사람들은 소비에트적인 불친절함을 비웃으며 거기에 대비하여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친절한 서비스를 칭찬하며, 공산주의에서 벗어난 신생 자본주의 국가들이 '아직도 발전해야 할 여지가 많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나쁜 것일까? 


고작 2년을 그곳에서 보내고 돌아오는 아시아나 비행기 안에서, 나는 내가 그동안 겪었던 포스트소비에트적인 소비생활의 반대편 극단을 마주했다. 바로 친절의 대명사인 비행기 승무원이다. 


나는 승무원이 웃는 표정으로 나에게 90도로 숙여 인사를 하는 순간 화들짝 놀랐다. 추가 담요를 요청하는 나에게 승무원이 활짝 미소를 지으며 그것을 가져다주자 나는 순간 소름까지 끼쳤다. 뱃속 깊은 곳에서 어딘가 불편한 감정이 꾸역꾸역 올라왔다. 그렇게 미소를 짓지 않아도 될텐데, 의무적으로 하는 서비스가 아닌 것은 거절해도 될텐데. 


자본주의적인 과도한 친절에 대한 부담스러움은, 한국으로 돌아온지 다시 몇 년이 지난 뒤 서서히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나는 가끔씩 불친절하기 그지없는 마가진 점원이 그립다. 미소를 짓지 않는다고 나쁜 평가를 매기고 분풀이를 하는 소비자나 부당한 고객의 요구까지 들어주려고 애쓰는 점원을 볼 때마다, 나는 내가 자본주의적인 카스트제도 속에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후진적이라고 비난받아야 하는 것은 소비에트적인 당당한 불친절함일까, 아니면 자본주의적 감정노동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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