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달력을 보다가 깨달았다. 내가 나 자신을 큐레이터-학예사로 지칭한지가 햇수로 10년이 되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전에도 박물관 일을 하긴 했지만 스스로를 학예사 혹은 큐레이터라고 불러온 것은 10년 전부터였다.
나는 그동안 전시 기획을 하고, 전시 연계 프로그램 기획하고, 지원사업 진행하면서 학술대회가서 유물에 대해 발표했고, 박물관 이전 한다고 쫓기듯 유물 정리하고, 시각예술가들의 작품세계를 하나하나 알아가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전시에 없는 창의력을 짜내며 전시 스토리를 짜고....이렇게 살았다. (물론 타의에 의해서 잠시 다른 일을 하던 1년 간은 제외하고)
신기한 게 아주 오래전에는 물리학자가 아닌 나를 상상할수 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인류학이나 민속학을 연구하는 나를 생각해왔으며, 소설을 쓴 뒤부터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작가라고 늘 여겨왔는데, 지금은 학예사로서의 정체성을 빼면 나를 정의하기가 어려워질 지경에 왔다.
10년이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이다. 같은 일을 10년 동안 하면 전문가가 된다는 말도 있지만, 내가 소설을 쓴지가 벌써 20년인데 아직도 글쓰다가 옆길로 샌다는 걸 생각하면 그 말은 나한텐 말짱 헛소리다.
나는 어느 정도 직업에 대한 생각과 철학이 있지만, 그건 어디서 훌륭한 논문 한 권 읽고나면 다음 날 바로 바뀌어 버리는 정도이다. 조금 자신없는 얘기지만 내가 학예사로 제대로 성취한 게 있다면 그건 근골격계 질환 뿐인 것 같다.
나는 [고작 10년]을 학예사로 살아왔을 뿐이다.
나는 20여년간 물리학을 사랑해왔고(하지만 미적분은 절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20년 넘게 허무맹랑한 공상을 글로 써왔으며(그 중에서 출간된 건 고작 4권....), 10년 가까이 참여관찰이 세상의 모든 비밀을 풀어낼 거라고 믿었던(포스트모더니즘에 허덕이다가 그만뒀다) 사람이다. 거기에 비하면 학예사로서 살아온 세월은 [10년 이나]가 아니라 [고작 10년]인 것이다.
우리는 직업으로써 스스로의 정체성을 규정하곤 한다. "잘 때 펭수 인형을 껴안고 자며 갓 구운 바게트 향기가 세상에서 제일 좋다고 생각하는 00입니다"가 아니라, "00회사에 다니는 00입니다."가 한 사람의 정체성을 더 확실히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고작 10년]째인 내가 나에게 묻는다. 그동안 나는 수많은 정체성들을 거쳐서 스스로를 이제 학예사로 여기고 있다. 나는 어디쯤 와 있으며, 앞으로 10년 뒤 나는 어디에 가 있을 것인가.
사실 나는 아직도 과학의 논리성을 사랑하고, 인간 집단의 행동에 관심이 많으며, 아직도 소설을 쓰고 있다. 학예사로서의 나 자신은 거기에 더해진 또 하나의 정체성이다.
내 분야의 많은 다른 선배들처럼 국가 문화 정책을 바꾸거나, 협업을 통해 대형 전시를 만든다거나, (우리가 다 아는 학력위조의 그 분처럼) 길이 남을 명성을 떨친다거나 하는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사실 직업이란 건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해왔고, 현재 무엇을 하기를 좋아하는지가 중요하다.
나는 물리학과 인류학, 민속학을 좋아하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밥벌이로 학예사를 하며 취미로는 유튭 비디오를 만들고 있는 사람이다. 내가 얼마나 긴 시간 동안 어떻게 불렸다거나 앞으로 어떻게 불리고 싶다는 것 따위는 여기서 중요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