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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애리 Nov 20. 2019

내가 펭수를 사랑하는 이유

한 마리의 펭귄이 열 명의 정신과 의사보다  더 낫다

BTS와 뽀로로를 넘어서기 위해 열심히 유튜브를 하고 있는, 무려 교육방송 EBS의 연습생을 이렇게 덕질하게 될 줄 몰랐다는 사람이 많다. 그 연습생은 남극에서 왔으며, 남극 펭씨에 빼어날 수자를 쓰는 2m10cm의 자이언트 펭귄이다. 그렇다. 그는(펭수는 성별이 없으므로 여기서 '그'는 성별을 고려하지 않은 단순 3인칭 대명사라는 점을 분명해 해둔다) 정말로 펭귄이다.

자이언트펭TV 펭수가 궁금하다면....


"펭성논란" 펭수에게서 인간 존중을 배운다는 역설


원래 초등학교 고학년 어린이를 대상으로 만든 캐릭터인 펭수를 20, 30대 어른이들이 이렇게 좋아하는 이유에 대한 분석은 여러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 가장 힘을 얻는 의견은 제 할 말 다하고 약간은 뻔뻔스럽고 자기애도 강한 펭수를 보면서 밀레니얼들이 대리만족을 하며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는 분석이다.


우리는 '약강강약'의 세계에 살고 있다. 부연하자면, '약자에게는 막 대하고 강자에게는 슬슬 기는' 게 사회생활이라고 하는, 학교에서 배운 윤리 도덕과는 정반대인 부당한 세계에 살고 있다. 펭수는 그것을 뒤엎는다.


펭수는 확실히 뻔뻔스럽다. 나는 자이언트펭TV를 보면서 EBS사장 이름을 확실히 기억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펭수가 심심하면 사장 이름을 막 불러댄 덕이다. 그는 사회적 지위를 무시하고 제 마음대로 말하고 제 마음대로 행동한다. 높은 지위에 있다고, 나이가 많다고, 펭수는 절대로 꿀리지 않는다. 그는 미용실 인턴 일일 체험을 하기도 했는데, 손님에게 아프면 참으라고 하는 그런 캐릭터다.  


아니, 이런 "예의없는" 펭수가 우리에게 타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려준다고?


사실 펭수는 "예의없는" 것이 아니다. 펭수가 수줍어하는 어린이를 대할 때를 본 적이 있는가? 일반적으로 사회적 지위가 낮다고 여겨지는 직업의 사람들을 대하는 걸 본 적이 있는가? 그를 보면서 우는 팬(연세가 있으신 분이다)을 안아주는 영상을 본 적이 있는가? 펭수는 강자에게 굽신대지 않지만, 약한 사람들에게는 예의바르고 다정하다.


우리 사회는 가끔씩 예의를 "윗사람을 잘 모시는 것" 혹은 "갑에게 굽신대는 것"으로 착각한다. 하지만 인간은 모두 평등하며, 동등하게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밀레니얼들이  펭수를 사랑하는 이유는, 매일같이 갑질 당한 분노 때문도 아니고 취직 못해서 무시당해서도 아니고 나이가 많은 꼰대들에 치여서 대리만족하는 것도 아니다.(일정정도는 맞을지도;;;)  밀레니얼이 펭수의 행동을 사랑하는 이유는, 펭수의 이런 원칙이 우리가 어린시절 유치원에서부터 배웠던 사회, 도덕, 윤리와 일치하기 때문일 것이다.



메타서사를 통한 치유, 자이언트 펭TV


메타서사란, 몇 십년 전부터 유행했던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자주 언급되는 단어로, 소설을 예로들어서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소설 창작에 대한 소설을 통해서 서사의 허구성을 직접 언급한다던지, 소설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설정 등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메타서사의 대표격(혹은 효시)이라고 할 만한 작품은, 바로 세르반테스의 <돈 끼호떼>다. 중세 기사 소설에 푹 빠진 정신나간 한 양반의 기사 모험담이다. 이 소설이 재미있는 것은, 이 소설 안에 <돈 끼호떼>라는 책이 등장하며, 돈 끼호떼 자신도 본인의 책(본인은 '내 역사서'라고 언급한다)에 대해 이야기 하기도 하며, 이 책을 쓴 세르반테스 본인이 언급되기도 하며, 세르반테스 본인은 이 책이 세데 아메떼 베넹헬리라는 아랍인이 쓴 아랍어 원본을 그저 스페인어로 번역했을 뿐이라고 이야기 하기도 한다. (이런 서사의 방법은 <장미의 이름>이나 <영원한 제국>에서도 사용되었다)


몇 년 전부터 예능방송에서 자주 보여주는 컨셉은 바로 이런 메타서사이다. 과거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카메라 프레임이 '카메라 뒤의 사람들'을 주목하는 경우가 없었다. 카메라는 배우들과 배경(무대 위)만을 보여주었으며, 시청자들은 그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전혀 알 수도 없었고, 어떤 창작과정을 거쳐서 이런 영상이 만들어졌는지도 알지 못했다. 아니 알지 못했다기보다는, 영상 속에서 보여지는 내용만이 진실이라고 '합의'하며 시청을 한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많은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PD나 작가, 스텝들이 출연진과 상호작용을 하기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대표적인 예능으로는 <1박2일> 같은 프로그램이었는데, 이 프로그램에서는 PD의 얼굴이 직접 화면에 등장하고, 촬영감독이 모습이 카메라 속에 나오며, 출연진이 스텝들에게 말을 던지기도 하는 장면이 그대로 나온다. 요즘에는 대부분의 예능 프로그램에서 이런 컨셉으로 촬영을 하기 때문에 자이언트 펭TV에 등장하는 '이슬예나PD'나 '박재영 매니저'의 등장도 매우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리고 메타서사와 현실과 비현실을 경계를 허무는 다양한 장치들로 가득한 펭수의 세계관을 한 겹 더 확대한 것은 바로 팬들이다.  


솔직히 말하면, 펭수라는 캐릭터는 아이들을 위한 허구의 존재이다. 펭수가 언급했듯이 하나의 '아바타'에 불과하며, 제작진은 물론이고 우리는 그 '아바타' 안에 다른 존재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자이언트 펭TV에서 제작진은 펭수의 존재를 실제로 간주하고 펭수가 사람들을 만나고 유튜브 영상을 만드는 과정들을 보여주며, 카메라 속의 메타서사 속에서도 그들은 펭수는 물론이고 EBS의 수많은 다른 캐릭터들을 하나의 존재로 가정하고 상호 작용을 한다.


그런데 펭수는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간다. 펭수의 영상을 보는 우리 역시 이런 서사 속에 참여를 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 아이들이 만화 영화나 동화가 진짜라고 여기듯, 산타클로스가 정말 선물을 가져다준다고 여기듯, 펭수의 세계관을 실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에 대한 '덕질'에 참여하는 것이다. 펭수를 좋아하는 수많은 어른들은 펭수가 하나의 캐릭터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지만, 우리는 펭수가 실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자이언트 펭TV라는 거대한 메타서사 속에 또 하나의 레이어를 만드는 것이다.


진짜 펭수는 누구일까? 자이언트 펭TV의 출연진이 만들어낸 표상인가, 아니면 펭수라는 표상 안에 들어있는 알맹이(팽수팬들은 펭수 안의 그 분을 또 다른 자아, 영혼, 알맹이, 콘텐츠로 표현한다)인가?


보르헤스는 <피에르 메나르, 돈 끼호떼의 저자>에서 <돈 끼호테>를 프랑스어로 다시 쓰는 피에르 메나르라는 저자가 등장한다. 어쩌면 펭수를 사랑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피에르 메나르가 되는지도 모르겠다.  


펭수의 정신나간 여정을 통해 마음을 치유한다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 끼호떼> 속에서 돈 끼호떼는 방랑기사로서의 여행 속에서 수많은 낯선 사람들과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 속에 참여하며 그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돈 끼호떼가 만나는 사람들 중에는, 그의 광기를 걱정하는 이웃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 이웃들은 돈 끼호떼를 설득하려다가 실패하자, 아예 본인들이 돈 끼호떼의 광기가 만들어내는 현실 속의 연극에 등장인물로서 참여함으로써 그의 정신나간 여정을 중단시키려고 한다. 그러다가 본인들도 돈 끼호떼의 이야기 속에 그만 휘말리고 만다.


나는 "남극에서 헤엄쳐서 온, 210cm의 10살짜리 거대한 펭귄이며, EBS 연습생으로 유튜브를 하는" 펭수의 세계관 속으로 들어간다. 펭수의 '알맹이'가 누구인지 궁금해하지 않으며, 펭수를 "성별이 따로 없는 펭귄"이라고 간주해버린다.


그렇게 나는 영상 밖으로까지 확대되는 거대한 연극 속에 참여한다.


 연극 속에 참여하는 과정을 통해서 나는 마음을 치유한다. 까칠하고 할 말 다 하지만, 약자에게는 다정하게 대하는 펭수를 보면서 나는 다시 동화 가 진짜라고 믿는 어린아이의 마음이 된다. 그리고 이런 '펭귄'이 있다는 것에 위안을 얻는다.


유튜브 댓글에 남겨진 펭수의 어른 팬들과 펭수의 대화를 보면서 마음에 따스한 온기를 얻는다. '펭수의 ASMR'을 보면서 이놈의 골때리는 펭귄의 트림과 방귀 소리에 깔깔대며 웃어대고, '펭수의 얼어죽을 고민상담소'에서 왕따에 분노하면서 "왕따는 하는 사람이 잘못 된 겁니다"라고 말하는 펭수를 보면서 눈물이 날 것 같은 위안을 얻는다. 우리 사회에서 약자라고 여겨지는 어린이들을 대변하는(펭수 본인도 사실 어린이다) 펭수를 보면서, 나도 펭수가 보듬어주는 소중한 존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자이언트 펭TV는 마치 영상 밖으로 튀어나온 거대한 심리극(Psychodrama) 같다


환자들의 심리적 장애를 치유하기 위해서 만들어지는 심리극은, 연극적 장치를 통해서 갖고 있는 트라우마나 감정과 마주하고 해소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이것은 연극처럼 무대에서 이뤄지기도 하며, 하나의 상황극처럼 만들어지기도 한다. 부조리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펭수라는 허구를 현실로 끄집어내어 그의 여정에 간접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어릴 적 보았던 동화 속 세계로 걸어들어간다. 그리고 펭수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치유한다.  


나는 단언한다: 이따금씩, 한 마리의 펭귄이 열 명의 정신과 의사보다 나을 때가 있다고.




YouTube " 플라뇌링큐레이터 "에도 자세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펭수와 돈키호테의 관계란?] 펭수를 인문학적으로 덕질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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