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에 나온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를 인상깊게 본 사람이라면, 그 영화가 존 르 카레의 소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어디선가 들었을 것이다. 존 르 카레, 본명은 데이비드 존 무어 콘웰인 이 작가는 냉전 시대 실제로 영국 정보부에서 일을 했던 인물로, 그의 책에 등장하는 '조지 스마일리'라는 인물은 마치 그의 또 다른 분신과 같은 존재이다.
베트맨에게 조커가 있고, 슈퍼맨에게 루터가 있으며, 가까운 스파이 친척인 제임스 본드에게 스펙터라는 조직이 있다면, 조지 스마일리라는 인물에게는 '카를라'라는 소련의 스파이가 있다.
카를라와 스마일리는 수십년 전 델리에서 만났다. 냉전이 막 시작되었던 시점, 카를라는 실각하여 곧 본토에 불려갈 정보부 요원이었고 스마일리는 그를 포섭하려고 하는 영국 정보부 요원이었다. 줄담배를 피우는 카를라에게 스마일리는 아내 앤이 선물한 라이터를 빌려주지만 결국 돌려받지 못했다. 그리고 포섭에도 성공하지 못했다. 아내 앤이 선물한 라이터에는 '조지에게, 앤이, 내 모든 사랑을 담아 To George from Ann with all my love'라고 새겨져 있었다.
소련으로 돌아간 뒤, 카를라는 뛰어난 능력으로 영국 정보부에 러시아 스파이를 심는데 성공하고 이로 인해서 영국 정보부를 거의 파탄내고 만다. 바로 이 사건이 영화로도 제작된 책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이다. 카를라는 조지 스마일리가 정보부 내의 러시아 스파이 빌 헤이든의 존재를 눈치챌까봐 걱정이 되어, 그에게 스마일리의 아내 앤과 정사를 나누도록 지시했다. 스마일리도, 앤도 이로 인해서 고통을 받는다.
만약에 스마일리가 카를라와 만나지 않았더라면, 스마일리는 이런 개인적인 고통을 받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카를라에게 아내가 선물한 라이터를 건네주지 않았더라면 카를라는 스마일리에게 앤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알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니, (적어도 스마일리의 입장에선) 이후 이어지는 조지 스마일리와 카를라 간의 대결의 시작은 바로 카를라가 돌려주지 않은 라이터인 셈이다.
조지 스마일리와 카를라의 대결이 끝나는 것은 '카를라 삼부작'의 마지막 책인 <스마일리의 사람들>이다.
스마일리는 카를라와의 첫 만남에서 그에게 공감하고 동질감을 느낀다. 냉전시대, 상대방의 진영에 속한 사람들을 괴물 정도로 묘사하던 시절, 그것은 이상한 감정이었다. 원칙과 양심을 중시하는 스마일리는 카를라를 신념을 가진 수도사 같은 인물이라고 여기며, 그를 어느 정도는 존중하고 있었다. 어쩌면 카를라도 스마일리에게서 같은 것을 보았을 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양 극단의 진영에서 마치 거울을 보듯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스마일리의 사람들>에서는 모든 것이 깨어진다.
스마일리는 작전을 통해서 카를라에게 사실은 숨겨진 딸이 있고 그가 딸을 위해서 원칙과 도덕성을 깨고 딸을 스위스의 요양원으로 옮기기 위해서 소련 정보부의 자원을 사적으로 이용했다는 것을 안다. 스마일리는 그를 포섭하기 위해서 함정을 파고 작전을 짠다. 스마일리는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에서도 그랬지만 이중 첩자나 비도덕적인 행위를 내키지 않아하는, 스파이 답지 않은 스파이였다. 그러나 이번에 그는 카를라를 잡기 위해서, 그 신념을 깨고 카를라가 하는 방식대로 그를 협박하여 그를 포섭하게 된다.
이렇게, 두 사람은 수십년 만에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카를라는 수십년동안 믿고 있던 소련에 대한 신념을 저버리고 영국 정보부에 투항했고, 스마일리는 카를라와 같은 무자비하고 비도덕적인 방식으로 그를 잡았다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그리고 각자를 지탱해주던 신념과 양심을 저버린 두 사람이 만났을 때, 카를라는 스마일리에게 앤의 라이터를 돌려준다.
카를라는 그것을 자갈 바닥으로 던졌다. 하지만 스마일리는 그것을 주워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존 르 카레의 스파이 소설은, 제임스 본드나 본 시리즈 같은 모험형 스파이 소설이 아니다. 지루할 만치 학문적으로 정보를 수집하며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스파이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고 있다. 철저히 서로의 존재를 추상적인 이념을 가진 괴물로 여겼던 냉전 시대에, 과연 타자를 바라본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스마일리와 카를라로 대변되는,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에 속한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 같은 인간들이었다. 그리고 그 진영의 가장 선두에서 싸우던 이 두 사람은, 그 첩보전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잃어버리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