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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애리 May 31. 2018

그때 했어야 하는데, 라는 생각

일리야 레핀의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작품 훼손 뉴스를 듣고

나는 어릴 적 피카소와 문신을 좋아했으며, 살바도르 달리는 지극히 편애하며, 마리 로랑생은 타임머신을 발명하여 그녀와 마주하며 차 한 잔 하고 싶을 정도로 사랑하며, 김두량은 월야산수도 하나 만으로도 매혹적인 작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 현재,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하나는 일리야 레핀이다.


윈도우 기본 바탕화면을 최고라고 치던 미니멀리스트(?)인 내가 미술작품을 컴퓨터 바탕화면으로 사용하게 된 것도 일리야 레핀 때문이고, 여행을 싫어하면서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열시간짜리 비행을 한 것도 일리야 레핀 때문이었다. 기분이 적적 할 때 내가 꺼내 드는 것은 돔 끄니기(서점)에서 산 일리야 레핀의 그림집이다. 최근에 일리야 레핀에 대해서 두 회씩이나 브런치에 끄적였던 것도 다 이놈의 애정 때문이다.


그런데,


일리야 레핀이 그린 걸작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이 훼손되었다는 뉴스를 며칠 전에 보았다.


일리야 레핀의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이라는 작품은 과거에도 종종 훼손된 적이 있었다. 권력이 주는 편집증에 미쳐서 아들을 살해한 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이반 뇌제. 그가 숨이 멎어가는 아들을 부등켜안고 슬픔과 후회, 공포와 광기가 섞인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그 작품은 종종 차르주의자들이나 전통을 중시하는 민족주의자들에 의해서, 불경하다는 비난을 받아왔다고 한다. 그 때문에 그 작품은 일리야 레핀의 생전에도 훼손된 적이 있었지만, 다행히도 화가가 살아있었기 때문에 그의 손에 의해서 복구되었다.


작가가 죽은지도 벌써 백년이 다 되어가는 올해, 러시아 트레쨔코프 갤러리에 걸려있던 이 작품은 결국 술에 취한 극단적 민족주의자가 휘두른 금속봉에 의해서 찢어져버렸다.


내가 느낀 첫 반응은 충격이었다. 그리고 하루가 지난 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또 하루가 지난 뒤 내 인생에 회의감이 들었다.




작년도에 상트 페테르부르크행 비행기표를 끊으면서, 나는 한참동안 망설였다. 내가 정말로 보고 싶은 일리야 레핀의 작품 몇 점이 모스크바 트레쨔코프 갤러리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곳은 전혀 가지 않고(실제로 나는 여름궁전 같은 대표적인 관광지에도 가지 않았다) 에르미타쥬와 러시아미술관만을 돌아본대도 벅찬 일주일이었는데 모스크바까지 갈 여력이 없었다. 그러나, 나를 한달동안이나 망설이게 만든 것은 일리야 레핀의 작품들 가운데 내가 정말정말 보고 싶었던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이란 작품이 트레쨔코프 갤러리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무려 한 달동안 비행기표도 끊지 못하고 고민하던 나는 결국 모스크바를 포기했다. 모스크바에 가면 하루를 머물러야 할텐데 나는 여행을 가서도 잠자리가 바뀌는 것을 극단적으로 싫어했고, 비행기를 열시간 씩이나 타고 가서 또 비행기를 타고 싶지도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비행기를 또 예약하고 호텔을 또 예약하는 것이 너무너무 귀찮았다. "다음에 언젠가 가서 볼 기회가 있겠지" 나는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내가 분노가 치밀어 오른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사실 내가 일리야 레핀의 명작을 (영영, 이라고 말하면 너무나 극단적인 생각이니, '오랜기간 동안'이라고 해두자) 보지 못하는 이유는 극단적 민족주의자들이 러시아에서 심심찮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도 아니고, 고작 취객 통제도 못했던 트레쨔코프 갤러리의 안일한 관리체계 때문도 아니고, 정부의 통제 덕에 빠르게 줄어들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만연한 러시아의 방대한 보드카 소비량 때문도 아니다.


나는 그때 모스크바에 갔어야 했다.


몸이 힘들더라도, 비행기 타는 게 지긋지긋하게 싫더라도, 잠을 좀 못 자더라도, 모스크바의 트레쨔코프 갤러리에 일리야 레핀의 작품들을 만나러 갔어야 했다. 그러지 않았던 것이 나는 너무나 후회되었고, 나에게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이런 사례들을 곰곰이 생각하다보니 내 삶에서 하지 않아서 결국 못하게 된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자,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에 대해 회의감이 들었다.




시간과 비용, 그리고 체력이 한정된 현실세계 속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삶은 일련의 선택이다. 먹고 살아야 하므로 직장을 가기 위해서 놀이와 휴식과 잠을 포기하고, 밤새 놀게 되면 다음 날 직장에서 졸게 된다. 집 대출금을 갚아야 하므로 외식을 줄여야 하며, 이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되면 다른 사람과 연애를 하지 못하고, 다중우주(Multi-Universe)에 있지 않은 한 나는 물리학자로 일하면서 인문학자가 될 순 없다(물론 내가 마블 주인공이거나, 천재라면 가능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둘다 현실이 아니다).


내가 어릴 적부터 가고 싶었던 마추피추는 많은 관광객들로 파괴되어가고 있고, 베네치아는 지구 온난화로 물에 잠겨가고 있으며, 내가 인도에 가기 위해 휴가를 낼 때가 되면 타지마할은 매연과 때에 찌들어 회색이 되어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아프리카 대륙에 한 번 발을 들어놓을 때 쯤이면 이미 잔지바르의 고양이들은 관광지 개발로 인해서 퇴거명령을 받았을 것이고, 이집트의 거대한 피라미드 사이를 잇는 지하 통로와 박물관이 건설되고 나야 나는 겨우 이집트 여행을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때가 되면 그 피라미드는 내가 기대했던 피라미드가 아닐 것이다.


그 외에도 살아오면서 내가 미뤄오거나 하지 않았던 것은 어마어마하게 많다. 이사하는 것이 귀찮아서 어마어마한 방세를 내고 시세보다 훨씬 비싼 집에서 살았고(돈이 썩어나는 재벌도 아니면서), 낯선 사람과 밥먹는게 싫어서 출간을 앞두고 출판사 대표와 식사 자리에도 안나가고(대학생 시절 나란 사람은 커리어에 도움이 안되는 성격이었다), 먼저 다가가기가 너무 귀찮아서 서로 호감을 갖고 있던 누군가를 지인에게 소개시켜줬(이쯤되면 회피다) 나를 보면 한숨이 나온다.


아무리 우리의 삶은 일련의 선택이라지만, 나는 지속적이고 반복되는 삶이 주는 안일함에 젖어서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고 그대로 머물러있었던 것은 아닐까.




1581년 11월 16일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 200×254cm, Oil on Canvas, 1885 / 트레쨔코프 갤러리 소장 중 파손...


15세기 공포정치로 사람들을 떨게해서 뇌제(the Terrible)라는 별명이 붙은 차르. 집권 초기에 그는 그리 포악한 차르는 아니었다.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세부적으로는 엇갈리지만, 다들 동의하는 것은 그가 결국 광기에 휩싸였다는 사실이다.


1885년 일리야 레핀이 완성한 역작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자신의 아들을 자기 손으로 살해한 뒤 어쩔줄 몰라하며 그를 부등켜안고 있는 그 미친 차르의 눈동자에서, 나는 아들의 상처에서 뿜어져나오는 피를 보면서 자신이 한 짓에 대해 구역질을 느끼는 그의 감정을 읽는다. 러시아의 절대권력자인 차르인 그를 심판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신이 잔인한 짓을 해온 그를 용서할 수 있을까 공포에 질러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내가 그의 눈동자를 보면서 가장 크게 느끼는 감정은 후회다.


그 후회는 아들을 살해한 행위 자체에 대한 후회가 아니다. 왜 상황이 여기까지 오도록 자기 자신을 방치했는지, 포악함과 잔인함이 왜 자기 자신을 지배하도록 내버려뒀는지, 나는 뼛속 깊이 후회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본다.


나는 누군가를 살해하지도 않았고, 광기에 휩싸이지도 않았고, 핏 속에 들끓는 폭력에 대한 갈망을 느낀 적도 없지만, 레핀이 표현한 이반 뇌제의 눈동자에서 나의 후회도 함께 읽어낸다. 그의 작품을 볼 기회를 잃었다는 후회도 아니고, 곤돌라를 타고 관광객 없는 수로를 미끄러지듯 항해할 기회를 잃었다는 아쉬움도 아니고, 두려움에 내가 잃어버린-어쩌면 정말로 사랑이었을지도 모를 어떤 인연에 대한 안타까움도 아니다.


그것은 여태까지 내가 그런 상태로 나 자신을 방치해놨던 것에 대한 후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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