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사실주의 화가 레핀Repin의 그림 속 인간군상에 대하여 1
저 멀리 바지선들이 오가는 평화로운 강변 풍경이다. 모래톱에는 부서진 나뭇가지들이 여기저기 나뒹굴고 그 사이로 만들어진 작은 웅덩이에는 잔잔히 밀려든 맑은 강물이 고여 하늘빛을 받아 빛나고 있다. 저 멀리 수평선 너머로 멀어지는 증기선에서 뿜어내는 회색 연기는 맑은 하늘위로 흩어져 하얀 구름 속에 섞여 사라지고 있다. 고요할 것만 같은 이 강변 풍경에 남루한 어두운 형체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마치 마차를 끄는 한 떼의 짐승과 같이 보인다. 누더기가 되도록 해진 옷을 걸치고 가죽끈으로 어깨를 감은 채 땅을 보며 힘겹게 움직이고 있다. 그들의 뒤 편에 돛을 내린 거대한 범선이 서서히 끌려오고 있다.
당시 제국예술아카데미의 학생이었던 레핀은 바지선을 끌고 있는 이들 인부들의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강가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과 대비되는 묵묵히 일을 하고 있는 이 남루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그는 이들을 주제로 작품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레핀은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현지에서 수차례 스케치를 하기도 했고 그들과 어울려서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그렇게 수년동안의 준비를 거쳐서 나온 작품 <볼가강의 바지선 끄는 인부들>은, 레핀이 당시 강가에서 이 인부들을 보며 느꼈던 충격을 그대로 전해주는 기념비적인 작품이 되었다.
일리야 레핀(Илья Ефимович Репин, 1844-1930)은 우크라이나 태생의 러시아 사실주의 화가로서, 이동파(Передвижники) 화가로서 혹은 제정 말기 러시아의 인텔리겐차로서, 그는 러시아 문화사에 큰 영향을 끼친 화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러시아 제정기에 태어나 아카데미 화가로서 출발했지만 조화로운 아름다움만이 아닌 현실의 고통과 비참함까지 사실적으로 묘사하며 그것과 다른 노선을 걸었고, 작품 속에서나 현실에서나 그는 민중의 삶에 대해 고민하는 지식인들에게 공감해왔다.
제정 러시아는 많은 사회적 모순에 직면하고 있었다. 입헌군주제로 이행하고 있던 유럽의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러시아는 '짜르'라고 불리는 황제를 중심으로 한 전제군주제였다. 근대화가 진행되기는 했지만 그 속도는 너무나 느렸고, 근대화로부터 생겨난 지식 계층과 시민 계층은 소수가 부와 권력을 독점하는 강한 신분제적 전근대 사회에 불만을 가지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농민들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1861년 농노 해방령이 포고되었지만 그것은 해방이 될 수가 없었다. 땅을 살 여유가 없는 농민들은 빈곤에 시달렸고 흉작으로 인해서 살 터전을 잃은 농민들은 도시로 몰려들어 임노동자가 되었다. 아마도 볼가강의 바지선을 끄는 인부들도 삶의 터전을 잃고 도시로 몰려든 농민들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레핀의 작품 <볼가강의 바지선 끄는 인부들>에서는 당시 러시아를 살아가던 민초(Peasant)들의 비참한 삶의 현장, 살아남기 위한 그들의 노동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이 작품 속에 바지선 끄는 인부들과 대비되는 유한계급이 한가롭게 노니는 모습을 함께 그리지 않은 레핀의 선택은 탁월했다. 누더기를 입고 짐승처럼 일하는 이들의 모습과 대조되는 상류층의 모습이 이 그림 속에 함께 들어있었다면, 이 작품은 사회적 모순을 풍자하는 프로파간다 포스터와 같은 이미지가 되었을 것이다. 노동하는 인간의 모습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왔던 레핀은 사회모순을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대신에, 그들의 모습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레핀은 가치판단을 유보한다. 그들의 비참한 행색에 대해서 안타까워하거나 사회모순에 분노하는 감정을 억지로 끌어내려 하지 않는다. 반대로 묵묵히 일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노동의 신성성을 끌어대거나 그들을 영웅화하지도 않는다. 레핀은 그저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그저 보여주기'에서 우리는 마치 나 자신이 그들 중 하나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질문이 고개를 든다: 그래서 어쨌다고? 순간을 포착하여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이 뭐가 대단하다고? 다른 화가도 그것을 할 수 있지 않은가? 사진은 그것을 더 효율적으로 잘 담아낼 수 있지 않은가?
단순히 인부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는 것만으로 이 작품을 대단하다고 볼수는 없다. 레핀의 작품은 표면적으로는 한 순간 혹은 하나의 장면을 평면으로 보여주고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 심층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살아숨쉬고 있다. 사람들이 이 작품에게서 눈을 뗄 수 없는 진짜 이유는, 이 작품 속 인물들이 전부 제각각의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인부들은 하나같이 묵묵히 바지선을 끌고 있으면서도 와글와글거리며 자기 자신의 이야기들을 그림 밖으로 뿜어내고 있다.
시체처럼 팔을 축 늘어뜨리고 앞으로 체중을 실어 몸을 기울인 채 멍한 눈으로 저 먼 곳을 바라보며 바지선을 끄는 저 인부는 못해도 십여년은 넘게 이 일을 했을 것이다. 그가 이 일의 리더쯤 되는지 옆의 사내는 그를 쳐다보며 발을 옮기고 있다. 햇볕에 검게 탄 다른 얼굴과 대조되는 하얀 피부에 열 댓살이나 됐을까한 소년도 눈에 띈다. 그는 일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어떻게 하면 가죽띠를 편하게 어깨에 걸칠 수 있는지 몰라서 연신 그것을 만지작거리며 몸을 비틀고 있다. 다른 인부들은 그의 모습을 쳐다보지도 않고, 그에게 충고 한 마디 해주거나 신입을 놀리는 농담 한 번 하지도 않는다. 다들 당장 제 어깨에 메고 있는 끈을 당기는 일만해도 죽을 것 처럼 힘들기 때문이다. 저 뒤에는 쓰러질 듯 좀비처럼 걸어오는 노동자도 보인다.
고요한 강가, 모래 밟는 소리만이 울려펴지는 목가적인 색채의 풍경 한가운데 거기에 어울리지 않을 법한 시커먼 짐승같은 형체들이, 마치 나를 향해서 다가오는 것처럼 보인다. 누더기 옷을 걸친 채 마치 노새처럼 터덜터덜 걸어가며 거대한 바지선을 끌고 있는 그러한 형체들을 멀리서 관찰하는 화가의 뒤편에 숨어서, 몰래 그들의 얼굴에 새겨진 삶의 힘겨움을 엿듣고 있던 나는 한 인부와 시선이 마주친다. 뒤통수를 징-하고 치는 것 같은 충격이 온다.
뭘 보는 거냐고 시비거는 눈은 아니다. 그는 그저 나를 쳐다보고 있다. 절반은 호기심어린 눈초리다. 보통 사람들은 그들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그곳에 놓여있는 물건인것처럼 주의를 기울이지도 않고 존재조차 모르는데, 왜 이 화가는 자신들을 보고 있는 지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절반은 어떤 의지가 어린 눈이다. 관찰당하는 대상으로만 머물러 있지 않겠다는 그 눈빛. 무심한 눈빛. 시꺼먼 얼굴에 때에 절은 누더기와 대비되는 그의 눈의 새하얀 흰자위. 무심한 듯, 강렬한 시선은 뇌리에 박혀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는다.
그림을 바라보다보면, 그들 하나하나의 제각각의 인생이 머리 속에 그려진다. 고요한 강가, 바지선을 끌어오는 인부들의 모래밟는 소리만이 울려퍼지는 이 그림을 한참동안 들여다보면, 이들이 와글와글 말을 걸어온다. 그들은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잘 꾸며진 장면의 일부가 아니다. 각각이 살아 숨쉬는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