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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애리 Nov 24. 2015

전쟁의 슬픔: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

피카소, 전쟁의 비인간성을 고발하다

전쟁을 그린 그림: 신화적 영웅에서 비참한 죽음으로


그리스, 로마 예술에서 전쟁에 대한 그림이 일종의 역사적 기록이자 장식이었다면, 르네상스를 거쳐서 17세기에 이르면 전쟁을 그린 그림들에서는 특정한 전쟁의 풍경을 정확하게 묘사하기보다는 그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이후 19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그림 속에서 전쟁이라는 것은 신화 속 영웅과 같은 위정자들을 표현했고, 정권의 정당성을 포장하며 숭고한 비장감 속에서 그려졌다. 영웅적인 나폴레옹의 모습이 그려진 다비드의 작품이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그린 들라크루아의 그림 속에서, 전투는 숭고하고 비장한 것이며 보는 이들의 가슴을 뛰게 만들고 함께 싸우게끔 피를 끓게 만들었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까지 유럽은 혁명과 나폴레옹의 전쟁으로 혼란에 빠지기 시작한다. 외국 군대와의 전쟁을 통해 민족주의가 싹트기 시작했고 근대적인 의미의 국민국가에 대한 의식이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전쟁의 양상도 전면전의 성격으로 바뀌어서, 전쟁이라는 것이 그 지역에 살고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의 삶에 크고 비극적인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19세기 초에 그려진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José de Goya y Lucientes, 1746-1828)의 작품 속에서 이제 전쟁은 낭만적이거나 이상화된 전쟁이 아니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1808년 5월 3일 나폴레옹의 군대에 맞서서 민중들의 봉기가 일어났고, 이 봉기는 금방 학살로 변해버렸다. 고야의 그림 <1808년 5월 3일의 학살(1814)> 속에서 이제 군인들은 더 이상 영웅적이거나 이상화된 모습이 아니다. 그들은 얼굴이 나오지 않는다. 뒷모습만 보인 채 총을 들고 있는 군인에게서 감정은 느낄 수 없다. 강렬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이제 곧 죽음을 맞이할 힘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공포와 체념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1808년 5월 3일의 학살(1814)>


전쟁을 그린 고야의 이 작품은 이제 전쟁에서 용감한 군인들을 묘사하는 시기가 끝났음을 알려준다. 물론 고야는 이 작품을 통해서 전쟁의 비극을 묘사하는 동시에 나폴레옹에 맞서 싸우는 스페인의 민족의식을 영웅적으로 묘사했지만, 그 영웅적인 묘사는 용맹히 싸우거나 진격하는 군인이 아니라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는 이름없는 사람들의 비극 속에서 표현되는 것이다.


고야의 이 작품은 이후 인상파 화가인 마네(Édouard Manet, 1832-1883)에게 영향을 준다. 멕시코 황제였던 막시밀리안이 처형당하는 장면을 그리면서 마네는 고야의 이 구도를 빌려와서 비인간적인 살상행위를 고발한다. 멕시코를 지배하려는 나폴레옹 3세에 의해 합스부르크가의 왕자였던 막시밀리안은 꼭두각시 멕시코 황제로 즉위한다. 얼마 뒤, 멕시코 공화파가 전쟁에서 승리하고 프랑스는 프러시아에 한눈을 파느라고 멕시코를 방치한 사이, 허수아비 황제는 처형당하고 만다. 마네는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1867-1868)>을 통해서, 권력을 위해서 타인을 이용하고 죽음에 이르게까지 한 나폴레옹 3세의 비인간성을 묘사하고 죽음 앞에 선 막시밀리안에 공감을 한다.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1867-1868)>


한국에서의 학살


20세기는 현대전의 세기였다.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살상무기가 동원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었다.

<게르니카(Guernica, 1937)>


1937년 스페인 내전 당시, 프랑코에 맞서 싸우던 바스크 지역 게르니카에 나치군이 공중폭격을 가해 도시 인구의 1/3이 넘는 민간인들이 사망한다.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1973)이 이 사건에 분노하여 대작 <게르니카(Guernica, 1937)>를 완성한다. <게르니카>를 탄생시켰던 제2차 세계대전과 스페인 내전이 유럽을 중심으로 한 파시즘과 기존 제국주의 국가의 전쟁이었다면, 전쟁이 끝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진영 최초의 전면전이 다시 아시아에서 벌어지게 된다.


그것이 바로 바로 한국전쟁(Korean War, 6.25전쟁)이다. 이 한국전쟁에서 벌어진 학살을 접한 피카소는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en Coree, 1951)>라는 작품을 그리게 된다.


고야와 마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이 작품은 학살 장면을 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른편의 강철 기계와 같은 모습을 한 군인들이 총구를 들이대고 있는 모습과 함께 왼편에는 그 총구 앞에서 떨고 있는 여자들과 아이들이 보인다. 인간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흘러가면서 오른쪽에 있는 인물보다 왼쪽에 있는 인물에 더 공감을 하게 된다고 하는데, 고야와 마네의 작품에서처럼 이 작품 속에서도 오른편의 학살자와 왼편의 여자들이, 전체적으로 무채색의 색상 속에서 비극적으로 대비되고 있다.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en Coree, 1951)>


이 작품은 학살자가 실제로 누구인지, 학살을 당하는 사람들이 실제 누구를 표현한 것인지 분명치 않다. 피카소 본인도 밝히지 않은 채 단순히 한국에서의 학살이라고 하여, 그가 영감을 받은 사건이 어떤 것이었는가에 대해서 많은 추측이 있어왔다. 피카소가 공산주의자로서 미국에 반대했다는 점을 들어서, 미군에 의한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No Gun Ri Massacre, 1950)을 표현했다는 설도 있으며, 황해도 신천군에서 5,000명이 넘는 민간인이 학살당했던 신천 양민 학살사건(Sinchon Massacre, 1950)이라는 추측도 있다. 사건을 떠나서 이 작품에서는 특정한 가해자와 피해자가 표현되지 않고 비극적인 학살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대량학살이 가능케한 현대무기와 현대의 전쟁을 비판한 것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진영 간의 국제전이었던 한국전쟁은 구미에서는 잊혀진 전쟁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베트남 전쟁(Vietnam War,1955-1975)은 1964년부터 미국 등의 직접적인 개입으로 국제전 양상으로 확대되면서 전쟁으로 고통받는 베트남인들에 대한 자각이 높아지고 반전(反戰)에 대한 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던 것에 반해, 사실 철저한 집단학살과 파괴가 이뤄진 한국전쟁은 그 비극보다는 초점이 공산진영에 대한 자유진영의 투쟁에 맞춰졌다. 때문에 전쟁 속에서 벌어진 잔학한 행위보다는 거대한 이상(理想)을 위한 투쟁이 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은 공산주의의 선전도구로서 민중이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전쟁의 비참함과 추악한 모습을 그대로 묘사한 이 작품은, 정치적으로 활용되기에는 적절치 못한 다소 추상적인 형태의 전쟁을 다루고 있다. 피카소는 이 작품을 통해서 <게르니카>에 이어서, 이제는 보편적인 의미로서 전쟁으로 인해 벌어지는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행위를 고발하고 있다.      



전쟁: 타자를 동일자로 환원시키는 폭력


근대 국민국가는 타자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한다. 낯선 타문화를 접한 뒤 집단 내부의 동일성을 깨닫고, 결국에는 동일자와 대비되는 타자를 집단 밖으로 추방하거나 집단 속에서 내부의 동일성을 주지시키는 존재로 삼는다.


 프랑스의 철학자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는 자아의 존재를 정립하기 위해서는 타자가 필요하다고 한다. 근대 국민국가를 넘어서, 제국주의와 파시즘은 타자를 동일자로 환원시키려는 폭력적인 행위이다. 유럽인들은 마녀를 화형시켰고, 나치는 집시와 유대인을 학살했고, 르완다에서 후투족은 투치족을 살해했다.


전쟁은 적이라는 타자에 대한 파괴를 통해서 자아는 타자를 동일자로 환원하려고 하는 행위이다. 게르니카에서의 민간인 폭격을 비판했던 것처럼, 고야와 마네라는 거장의 패러디를 통해서 피카소는 게르니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타자에 대한 폭력과 그 잔인성을 비판한다.


피카소는 부푼 배를 안고 울고 있는 임산부와 대비되는 차가운 기계와 같은 군인들을 보면서, 전쟁 속에서 드러나는 비인간성을 고발하고 있다.           



참고

에마뉘엘 레비나스, 『존재에서 존재자로』, 민음사, 2003

수전 손택, 『사진에 관하여』, 도서출판 이후, 2013

정은선, 『회화적 언어에 의한 작품 비교 분석;고야 「5월3일」,마네「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피카소「조선에서의 학살」』, 전주대학교, 1994(석사학위논문)

강희경, 『20세기 전쟁화에 나타난 색채심리에 관한연구』, 전북대학교, 2005(석사학위논문)

최근일,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의 패러디 특성 연구-회화에 나타난 현상을 중심으로』, 목포대학교, 2006 (석사학위논문)

스페인 내전을 다룬 (판타지) 영화

길예르모 델 토로(감독), <판의 미로>

베트남 전쟁을 다룬 책

바오 닌,  『전쟁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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