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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애리 Oct 04. 2015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여성 예술가가 된다는 것

아름다운 시절의 세탁선’ 

벨 에포크라고 불리던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아름다운 시절’, 파리는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였다. 파리에서 비교적 집값이 쌌던 몽마르뜨는 가난한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다. 나중에 관광객이 많이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많은 예술가들은 또 다른 지역을 찾아서 옮겨가긴 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그곳에는 가난한 예술가들이 보헤미안적 기풍을 간직한 몽마르뜨의 카페에서 모여 밤새도록 떠들고 마시며 예술을 이야기하곤 했다. 


피카소나 마티스, 모딜리아니, 루소와 같은 예술가들은 ‘세탁선’이라는 공간에서 모여 아틀리에를 이루기도 했는데, 마리 로랑생‘이 ‘미라보 다리’로 유명한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와 함께 다양한 화가들과 교류를 한 곳도 바로 이 곳이다. ‘세탁선’은 센 강 인근의 낡은 건물이었는데, 이 명칭은 바닥이 마치 세탁선 같다고해서 붙여진 것이다. 피카소가 대표작 ‘아비뇽의 여인들’을 완성한 곳이니만큼 이 장소는 입체파에 있어서 기념비적인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마리 로랑생, '어린 소녀들', 1910-11

마리 로랑생을 이야기하면서, 가장 먼저 이야기할 것은 피카소로 대표되는 입체파의 영향이다. 로랑생은 여성 입체파 화가로도 알려졌을 만큼 로랑생의 초기 작품은 입체파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로랑생의 초기 작품들은 당시의 기하학적 직선을 강조한 입체파의 경향에서 조금 비껴나서, 부드러운 색감과 곡선들을 활용한 아름다운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부드러운 색감과 곡선은 로랑생의 이후 작에서도 드러나는 특징이기도 하다.      


앙리 루소, '시인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 1909

기욤 아폴리네르의 연인마리 로랑생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1880~1919)는 1912년 연인이었던 마리 로랑생과 헤어지고, 유명한 시 ‘미라보 다리’를 쓴다.


1907년, ‘세탁선’에서 만났던 두 사람은 공통점이 많았다. 아폴리네르는 가난한 문인이었고, 로랑생은 무명 화가였다. 둘 다 사생아로 태어났다. 둘은 연인으로서 뿐만이 아니라 예술가로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으며 뛰어난 작품들을 창작했다. 1911년 경, 개성강한 성격이었던 두 사람이 결국 헤어진 뒤, 기욤 아폴리네르는 로랑생과의 사랑을 추억하며 유명한 시 ‘미라보 다리’를 썼다. 마리 로랑생은 그렇게 우리에게 화가보다는 시인의 뮤즈로 더 알려졌다. 


한참 사랑에 불타고 있던 아폴리네르가 주문해서 두 연인을 그린 루소의 그림은 로랑생을 시인의 뮤즈로 묘사하고 있다. 여성 예술가는 종종 그 자신의 예술적 재능보다 누군가의 뮤즈로 더 알려지곤 한다. 로댕의 연인이었고 재능있는 조각가였던 까미유 끌로델은 로댕의 그늘에서 괴로워했으며, 프리다 칼로는 생전에 화가보다는 유명한 벽화화가 디에고 리베라의 아내로만 알려졌다. 여성 예술가들은 예술가 자체가 아니라 뛰어난 다른 예술가의 연인이나 뮤즈로 더 알려진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는 ‘신비로운 여성’이라는 이미지를 통해서 여성을 대상화하고 타자화한다고 이야기했다. 사람들은 여성 예술가의 독창적인 예술세계와 예술에 영향을 준 삶에 대해 보기 보다는, 여성적인 스타일을 이야기하고 대상화된 여성 ‘뮤즈’로서의 삶을 이야기한다. 


기욤 아폴리네르와 헤어진 뒤 마리 로랑생은 불행하게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직전에 독일인 귀족과 결혼을 한다. 영국-프랑스-러시아와 독일-오스트리아의 충돌로 시작된 이 전쟁 와중에 로랑생은 적국의 군인과 결혼을 했던 터라 국외를 떠돌아다니며 살다가 1920년 경에 남편과 이혼하고 프랑스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마리 로랑생은 다른 여성 예술가와는 달리 생전에 유명세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입체파와 야수파의 영향을 받았지만 독창적인 스타일을 만들어냈던 마리 로랑생의 진가를 알아주는 이는 드물었다. 문인 장 콕토는 마리 로랑생을 야수파와 입체파 사이에 낀 불쌍한 사슴으로 비유했고, 로댕은 야수파의 소녀라고 놀리기도 했다.   

   

화가일러스트레이터문인디자이너-마리 로랑생

1920년대 이후 마리 로랑생의 작품경향은 당시 유행하던 입체파에서 벗어나서 독창적으로 변화하게 된다. 그녀의 작품 속에서는 동화같이 아름다운 여성들의 모습이 아름다운 파스텔톤 색채 속에서 등장하게 된다. 마치 환상이나 꿈을 꾸는 것 같은 신비롭고 마법같이 아름다운 장면들이 등장하는 작품 속에는 커다란 꽃과 동물, 자연이 몽환적으로 등장한다. 


한국에서는 화가 천경자나, 조금 영역은 다르지만 시인 노천명을 마리 로랑생과 비교하기도 하는데, 로랑생의 작품들은 천경자나 노천명의 작품과 닮은 점이 많다. 특히,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육심원의 작품 속에서도 로랑생을 발견할 수 있다. 


로랑생의 창작영역은 단지 순수미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1920년대 파리로 되돌아온 로랑생은 다양한 예술가들과 고려하며, 다양한 분야에서 창작을 했다. 기욤 아폴리네르의 영향으로 그와 함께하던 시절 시를 쓰기도 했지만, 이 시절 로랑생은 카펫과 벽의 문양을 디자인하기도 했고, 발레의 무대와 의상을 디자인하기도 했으며, 동화의 삽화를 그리기도 했고, 『밤의 수첩』이라는 책을 출간하기도 하며 더욱 다양한 재능을 펼친다. 


로랑생의 작품들을 보면 초기의 입체파에 영향을 받은 작품들에서도 그렇지만, 이후의 작품에서도 공통적으로 몽환적이고 다소 일러스트적인 요소가 많이 발견된다. 그런 로랑생의 일러스트적인 스타일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이 책의 삽화다. 

마리 로랑생,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삽화, 1930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앨리스의 모험담을 담은 루이스 캐롤의 동화인데, 테니슨의 오리지널 삽화 밖에 존재하지 않았던 프랑스에서 로랑생이 처음으로 이 작품의 삽화를 그렸다. 루이스 캐롤의 동화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사실 모험담이라기보다는 여러 가지 괴이한 동물과 신기한 세계, 그리고 수수께끼와 많은 수학적 비유들이 묘사되어 있어 환상적이고 묘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로랑생이 스케치처럼 그린 앨리스는 로랑생의 우아하지만 약간은 우울한 감성과 함께 동화의 환상적인 특징이 함께 드러나 있다. 


로랑생은 세르게이 디아길레프가 세운 발레단인 ‘발레뤼스’의 1924년 작품 ‘암사슴’이라는 발레의 의상과 무대를 디자인하기도 했다. ‘발레뤼스’는 당시 러시아 발레의 경향을 유럽에 소개하며 20세기 발레를 거의 대표하는 발레단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번쯤 들어봄직한 파블로바, 니진스키, 발랑신 등의 무용가 및 안무가들이 바로 이 발레단에서 활동했으며, 스트라빈스키나 드뷔시, 라벨 등이 작곡을 했고, 샤넬이나 피카소와 같은 예술가들도 무대와 의상을 디자인했다. 로랑생은 1924년 ‘암사슴’이라는 작품을 위해 의상과 무대를 디자인하며, 머리 위의 깃털 장식과 우아한 로맨틱 튀튀 드레스 등 아름답고 귀족적인 스타일을 선보였다.      


마드무와젤 샤넬의 초상

로랑생은 많은 여성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로랑생의 작품에는 남자가 없는 것이 특징이라고 농담처럼 이야기되기도 하는데, 로랑생은 남성을 그리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로랑생의 대다수의 작품은 여성이 주인공으로, 그림 속 여성들은 다소 우울하고 쓸쓸하지만 몽환적이고 아름답게 그려져 있어 그녀의 스타일을 잘 보여준다. 

로랑생의 작품 속에는 동물, 특히 늑대와 닮은 개가 자주 등장한다. 숲 속에 앉아 무릎에 고개를 얹고 있는 개를 쓰다듬고 있는 여성의 모습들 속에서는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의 이미지를 엿볼 수 있다. 처녀들의 수호신이며, 달을 상징하는 여신 아르테미스의 이미지는 로랑생의 작품들 속 여성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로랑생은 여성들의 모습을 로맨틱하고 섬세한 색상으로 포착하면서도 대상의 본질을 흐리지 않는다. 그녀의 작품 속에서는 한 여성의 복잡한 내면이 그대로 드러나있는 것 같다. 


1923년, 많은 유명인사들처럼 샤넬도 로랑생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주문한다. 그러나, 로랑생이 그렸던 초상화를 본 샤넬은 이것은 자신의 그림이 아니라며 돌려보낸다. 이 작품이 바로, 현재 로랑생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마드무와젤 샤넬의 초상’이다. 

마리 로랑생, '마드무와젤 샤넬의 초상', 1923

초상화 속에서 샤넬은 우울하고 어두운 표정으로 의자에 멍하니 앉아있다. 마치 그리스 여신와 같은 푸른 옷을 입고 고개를 괴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는 쓸쓸함과 같은 어둠이 도사리고 있다. 흐린 하늘에서는 새가 포물선을 긋고 있으며, 샤넬의 무릎에는 개가 기대고 있다. 이 초상화에서 샤넬은 피곤하고 나른해보인다. 샤넬과 로랑생처럼 불우한 어린시절과 낮은 출생배경을 딛고 성공한 예술가이다. 


샤넬은 드미-몽드(Demi-Monde)로서 상류층 여성의 유행을 선도했지만 결코 상류층이 될 수 없었다. 당시 그녀는 더 이상 남성의 후원을 받지 않는 경제적으로 독립을 이룬 드문 여성으로, 피카소를 비롯한 많은 예술가들을 후원하였다. 로랑생은 이 작품을 통해 불우했던 과거를 부정하고 끊임없이 위로 올라가려는 샤넬의 야망 예술가로서의 자신감 속에, 한편으로는 거기에 지쳐있고 우울한 그녀의 양면적 모습을 함께 포착하고 있는 듯 하다. 샤넬이 이 작품을 거부한 것은, 다름아닌 로랑생이 꿰뚫어본 자신의 내면을 거부하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샤넬과 로랑생의 삶은 참으로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샤넬은 고아원에 버려져 카페 가수와 남성들의 정부로 살아왔고, 로랑생은 사생아로 태어나서 한 남자의 정부였던 어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두 사람은 주위의 부정적인 시선에도 불구하고 여성 예술가로서 성공했다. 로랑생은 화가로서, 그리고 샤넬은 꾸띄르 디자이너로서 말이다. 


그러나 샤넬이 모자 디자인에서 시작한 자신의 재능을 패션으로 옮겨가면서 현대 여성의 상징이 된 반면, 로랑생은 입체파와 야수파의 언저리를 맴돌던 화가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샤넬이 자신이 절대로 온전히 가질 수 없는 상류층의 삶을 증오하면서도 바라면서, 남성의 후원받는 여성이 아니라 후원자로서의 여성이 되었다.



로랑생은 ‘잊혀진 여자가 가장 슬프다’라고 자신의 시에서 남겼다. 그것처럼 입체파의 영향을 받았지만 결국에는 독창적이고 감각적인 화풍으로 발전한 그녀의 작품은 입체파에 속하지 못했고, 기욤 아폴리네르의 연인이자 뮤즈로서 혹은 입체파 화가들과 교류한 여성 화가로서, 타자화된 위치로서만 남았다. 생전에 명성을 누렸지만 프랑스에서 그녀의 작품은 곧 쉽게 잊혀 지고 묻혀 버린다. 


로랑생이 그린 초상화 속 샤넬은 지금도 프랑스를 비롯하여 세계 패션의 아이콘이다. 현재 프랑스에는 로랑생의 작품 중 몇 점만이 오랑주리 미술관에 남아있다.      


참고

플로라 그루, 『마리 로랑생, 사랑에 운명을 걸고』

시몬느 드 보부아르, 『제2의 성』

류지석, 오찬옥, <큐비즘에 관한 연구-베르그송 철학과 동시성 개념을 중심으로>

이미숙, <샤넬 스타일 디자인 연구>, 이화여대(학위논문)

김은정, <디아길레프 발레뤼스 작품과 의상에 관한 연구>, 계명대(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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