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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애리 Sep 28. 2015

상상의 지옥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기

윌리엄 아돌프 부게로의 '지옥의 단테와 베르길리우스' 속에서 인권을 읽다


“돼지같이 성난 그 망령은 이빨로 카포키오의 목덜미를 문 채 돌투성이 골짜기로 그를 질질 끌고 갔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카포키오의 썩은 살점이 뭉텅뭉텅 떨어져 있었다. …‘저 미친놈은 잔니 스키키인데, 한 번 미쳐 날뛰기 시작하면 지옥에 있는 다른 영혼들에게까지 해코치를 하기 때문에 모두 피해다닌다오.’”     

                                                                                                                            -단테 『신곡』 지옥편 중에서   

  


단테(Durante degli Alighieri, 1265-1321)신곡(La Divina Commedia de Dante)은 표현 그대로 르네상스를 연 문학작품으로 평가받는다. 

1300년 부활 주일 전날 밤, 35살의 단테는 어두운 숲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중 짐승에게 쫓기어가다가 구사일생으로 고대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를 만나서 그의 인도로 지옥(Inferno)에서 연옥(Purgatorio), 천국(Paradiso)으로 차례로 여행하다가 천국에서 베아트리체를 만나 구원을 받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당시 문학에서 사용되던 라틴어가 아니라 지방 방언에 불과했던 이탈리아어로써 표현한 이 작품은 르네상스적인 정신을 담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보카치오의 『데카메론』과 함께 지금의 ‘이탈리아어’를 탄생시켰고, 이후 동시대는 물론이고 이후 유럽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위의 인용된 내용은 단테가 카포치오라는 연금술사와 대화를 하던 중 그가 미친 망령에 물려가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잔니 스키키(Gianni Schicchi)는 동명의 푸치니 오페라로도 잘 알려져 있는 실존인물이다. 피렌체 카발칸디 가문 출신으로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똑같이 흉내내는 재능이 있었는데, 부오소 도나티가 죽었을 때 그의 조카 시모네의 부탁으로 도나티의 목소리를 흉내내어 가짜 유언장을 작성했다.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는 미쳐서 날뛰는 잔니 스키키가, 단테와 대화를 하고 있던 카포치오(Capocchio)를 공격하는 장면이다.   

여기, 지옥을 그린 그림이 있다. 벌거벗은 인간들이 고통을 받고 있고, 그 위에 악귀가 날개를 펼치며 만족스러운 듯 싸늘한 미소를 짓고 있다.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의 모습이 눈에 띈다. 갈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맹렬하게 어떤 남자의 목덜미를 물어뜯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마치 굶주린 악마처럼 보인다. 아래에 있는 남자는 고통에 몸부림을 치지만, 갈색 머리카락의 남자는 살점을 파고들 듯이 아래에 있는 남자의 몸통과 팔을 손으로 붙든 채 목덜미를 물어뜯는다. 그리고 그 뒤에서 월계관을 쓴 시인이 그 끔찍한 광경에 질린 채 망토를 여미며 그 모습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 그 옆에는 붉은 모자를 쓴 남자가 놀란 나머지 어두운 표정으로 그 시인에게 안겨있다.  


이것은 윌리엄 아돌프 부게로의 <지옥의 단테와 베르길리우스(Dante et Virgile au Enfers, 1850)>이라는 작품이다. 

현재 오르세 미술관(Musee d’Orsay)에 소장되어 잇는 부게로의 이 작품은 가로 2.25m 세로 2.81m에 이르는 크기로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어둡고 음습한 느낌이 드는 지옥 속에서 서로를 물어듣고 있는 두 명의 죽은 영혼들은 흡사 실제의 지옥에 내려와 있는 것 같이 소름끼친다. 바로 옆에 있는 단테는 거의 기절할 것만치 질린 표정을 짓고 있고, 그를 인도하던 고대 시인 베르길리우스 역시 침착하지만 어두운 얼굴인 것이 마냥 괜찮지만은 않아보인다. 우리는 이 그림을 보면서, 지옥에 있는 단테의 심정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지옥은 사실 중세에서 르네상스 시대에까지 예술가들이 즐겨 그리던 소재 중 하나였다. 그러나 바로크 시대 이후 화가들은 르네상스 시대와 달리, 인간의 고통 그 자체에 집중해왔다. 그 고통을 일종의 자연현상으로, 혹은 타자로서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표현하고 그것을 보는 이가 그대로 느낄 수 있도록 표현한 것이다. 1800년대 낭만주의의 대표적 화가인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1798-1863)의 <단테의 조각배(La Barque de Dante)>와 같은 작품에서도 바로 그것이 느껴진다. 같은 지옥이지만 르네상스 시대와는 달리 구체적이고 클로즈업되어 있다. 보다 진보된 묘사는 좀 더 세밀하고 사실적이 되었고, 이러한 진짜같은 묘사 속에서 지옥의 물에서 나는 악취와 함께 배에 올라타려는 망령들의 고통과 비참함이 물씬 느껴진다.      




중세의 신 중심의 문화는 르네상스를 거쳐서 18세기 근대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면 인간 중심의 학문과 예술로 새로 태어나게 된다.

계몽주의 사상의 특징은 이성을 중시한다는 것을 꼽을 수 있으며, 이 결과 유물론적인 무신론과 감성을 중시하는 낭만주의를 동시에 이끌어 냈으며, 이러한 사상적 변화는 그 시대의 예술에도 크게 영행을 주었다.

학문에 있어서는 계몽사상을 중심으로 전제 군주국가가 아닌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이 싹트게 된다.      


“인간은 누구나 생명, 자유, 재산에 대한 자연권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보호하기 위해 정부를 세운다. 따라서 정부가 사람들의 자연권을 침범한다면, 그런 정부에 대한 혁명은 합법적인 것이다.”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     


그 시대는 이성의 시대이기도 했다. 뉴턴(Issac Newton, 1642-1727)이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1687)』을 출간한 1687년에서 시작되어 프랑스 혁명이 터진 1789년까지 약 100년간, 과학, 합리주의, 자유에 대한 수많은 사상이 쏟아져나왔다.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는 방법적 회의를 통해서 ‘생각하는 자아cogito’의 개념을 세웠고, 이렇게 만들어진 근대 합리주의와 점점 성장하는 중산계층의 도덕관은 사회개혁의 중심이 되었다. 특히, 볼테르같은 지식인이나, 디드로, 루소, 달랑베르와 같은 백과전서파는 이후 프랑스 혁명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미술에는 낭만주의와 신고전주의가 나타났는데, 앞에서 언급한 들라크루아나 다비드(Jacques-Louis David, 1748-1825)와 같은 화가는 고대 미술 특히 그리스 미술을 창조적 원천으로 삼았다. 이 시기 신고전주의의 미술에는 역사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역사화는 신화나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 종교사를 아우르는 다양한 역사적 장면들을 소재로 삼아왔지만, 이 시기에는 특히 권력의 프로파간다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이후 이러한 역사화의 전통은 이후 프랑스 아카데미파에 그대로 이어지어 주류 미술계를 풍미한다.



이 시기, 인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유명한 인권선언문이 등장한다. 바로 프랑스 혁명으로 탄생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Déclaration 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 1989)이다.      


“국민의회를 구성하는 프랑스 인민의 대표자들은 인간의 권리에 대한 무지, 소홀, 멸시야말로 공공의 불행과 정부의 부패를 낳는 유일한 원인이라고 생각함에 따라, 엄중한 선언을 통해 인간의 자연적이고 양도할 수 없으며 신성한 인권의 권리를 밝히기로 결의하였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1789   


보통 프랑스 인권선언이라고도 불리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은 그 13년 전의 「미국독립선언문(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1776)」과 당시의 계몽사상에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세계 최초로 보편적인 인간의 권리를 선언했던 선언문으로써, 이후 이 정신은 유엔의 「세계인권선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 1948)」으로 이어지게 된다. 프랑스 인권선언문은 단순히 프랑스 혁명의 결과물로 치부해버릴 수 없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13년 전의 미국 독립선언문이 인간의 권리를 ‘신에게서 부여받은’ 것이라고 쓰며 압제에 반대한다는 선언을 한 반면에, 이 프랑스 인권선언에는 ‘신’이 빠지고 보편적이고 자명한 권리로서 ‘신성한 인간의 권리’를 선언한 것이다.       


미국 버클리대학의 역사학저 린 헌트(Lynn Hunt)는 이 시기 인간의 권리가 보편적이고 자명한 권리로 인식된 이유를 공감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원래 선천적으로 공감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타인의 표정에서 감정을 읽고 그것을 이해하고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행위는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공감이 나와 가까운 사람, 혹은 나의 사회구성원을 넘어서 낯선 타인에까지 확대된 것이 바로 18세기이다. 18세기 유럽에서 유행했던 루소의 『신 엘로이즈』(1761), 리처드슨의 『파멜라』(1740), 『클라리사』(1747-48)와 같은 서한소설은 계층과 성별, 지역을 넘어서 독자들이 주인공에게 깊이 공감할 수 있도록 했다. 이전 시대에 상위의 선, 혹은 종교적 질서를 위해서 침해받곤 했던 개인의 자율성과 신체에 대한 권리가 이 시대에는 성스러운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개인은 가족이나 사회 공동체에서 분리되어 스스로 자신에 대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존재로 인식되었고, 그 결과 고문이나 잔인한 형벌, 자식에 대한 가부장의 결정권이 문제로 인식되었다. 각각의 개인은 분리되고 침범받아서는 안되는 개성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 심지어는 경멸하는 범죄자들이나 사회 소수자들도 말이다.      


“우리가 그 인격을 혐오하는 이들(유죄판결을 받은 죄수)은 우리 친구와 지인들과 똑같은 재료로 구성된 영혼과 신체를 소유하고 있다.”

                                                                                                          -Benjamin Rush, 「Inquiry」, 1787

     

지금은 모든 인간이 당연히 이러한 권리를 향유해야 한다고 믿지만, 이러한 당연하고 보편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인간의 권리는 그 시대에 탄생한 고귀한 발명품이다. 그리고 이것은 타인에 대한 공감으로서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현재 시리아 난민에 대한 사진을 보면서 가슴아파하고 공감한다. 사회적 관계도 맺고 있지 않고 어떤 이해관계도 없는 타인의 고통을 보면서 우리는 슬퍼한다. 바로 이러한 타인에 대한 공감이 계몽주의 시대 보편적이고 자명한 인권이라는 개념을 낳은 것이다.




다시 미술로 되돌아가보면, 우리는 부게로가 묘사한 단테의 지옥이 왜 이전의 도상적인 이미지들과 다름을 알 수 있다. 전체가 아닌 부분의 클로즈업으로써, 단테의 『신곡』 중 미쳐 날뛰는 망령이 또 다른 망령을 물어뜯는 그 끔찍한 장면을 보면서, 우리는 그 그림 속 인물들의 감정에 압도된다. 잔뜩 질린 채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는 단테의 모습과 베르길리우스, 그리고 지옥을 날아다니는 악마의 날개짓, 고통 받고 있는 여러 망령들의 모습들 속에서 우리는 지옥에 온 것 같은 실재감을 느끼게 되고 그것을 통해서 공감을 한다.

부게로의 작품의 특징은 섬세하고 정확한 묘사이다. 초기에 그는 역사화에 대한 정열을 드러니면서 신화나 역사적 장면을 소재로 하여 많은 작품을 그렸는데, 이후 말년에는 종교적이고 영적인 내용의 작품을 창작했다.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장면들은 고요하면서도 매우 성스럽고 아름답다. 마치 실제로 그 순간 속에 녹아드는 기분이 들 정도로 묘사가 사실적이며, 때문에 그의 작품 속 인물의 표정에서는 그 인물의 내면이 그대로 느껴지는 것 같다.

부게로의 후기 작품 가운데에는 신화나 역사 속 인물을 그린 것도 존재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도 볼 수 있다. 물 긷는 여자나 양치기, 시골 농부, 거지, 집시 같이, 당시로서는 비천한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그의 작품에서는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은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있다. 부게로가 포착한 그 사람들의 얼굴은 마치 왕족이나 신화 속 인물과 다르지 않게 고귀하게 보인다. 손을 내미는 거지 소녀에게서는 시바의 여왕같은 당당한 눈빛을 볼 수 있으며, 물 긷는 여자는 마치 신화 속 한 인물처럼 보인다. 더러운 바닥을 맨발로 다니는 양치기와 건초를 든 시골 농부 아낙에게서는 강한 공감까지 찾아볼 수 있다.     



윌리엄 아돌프 부게로(William Adolphe Bouguereau, 1825-1905)19세기 아카데미파를 대표하는 가장 성공적인 화가인 동시에 인상주의의 적으로 평가된다. 

부게로는 프랑스의 카톨릭계 중산계층 집안에서 태어났다. 와인 사업을 하던 부친은 그가 상업에 종사하기를 바랐지만, 예술을 사랑하던 모친 덕분에 부게로는 미술을 공부할 수 있었다. 부게로의 어린시절 프랑스는 혁명과 폭도, 전쟁으로 점철된 혼란의 시기를 겪고 있었다. 6월 혁명이 일어났던 1948년, 프랑스 아카데미는 그랑 프리 로마(Grand Prix de Rome)라는 이탈리아에서 고전 교육을 시키는 프로그램을 마련하게 되고, 꾸준한 노력 끝에 부게로는 1849년 마침내 이탈리아에 가게 된다.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고전을 탐구하면서 작품활동을 해온 부게로는 1855년에 파리로 돌아오자마자 곧 대중의 주목을 받게 된다. 그는 다비드의 신고전주의를 계승했다는 평을 들으며 역사화로서 성공가도를 달리게 된다. 1863년 상황이 바뀌게 된다. 당시 아카데미파의 정통이라고 할 수 있는 매년 열리는 살롱전에 초대받지 못한 화가들이 낙선전(Salon des Refusés)를 열고 이것이 나폴레옹 3세의 지원을 받으면서 세간의 주목을 끌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이 낙선전의 주역이 현재 인상파(Impressionist)라고 알려진 일군의 화가들이다.

에꼴 드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에서 미술 교육을 받고 끈질긴 노력과 정밀한 스케치를 통해서 아름다움을 표현하려고 했던 부게로에게 인상주의는 당연히 예술에 대한 훈련이 덜 된 것처럼 느껴졌을 지도 모른다. 알려진 일화에는 세잔을 가르치던 부게로가 원근법부터 다시 배워오라고 했다고 하기도 한다. 사실 당시 부게로는 인상주의에 대한 반대입장을 감추지 않았다. 반면에 인상주의 화가들은 부게로를 경멸했다. 드가는 고요하고 부자연스러운 장면을 보면 ‘부게로 같다’라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하기도 했으며, 반 고흐는 ‘우리가 부게로처럼 그리면 전부 부자가 될 것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인상주의 화가에게서 화가의 주관으로 재창조된 세계를 읽을 수 있듯이, 섬세하고 정확한 묘사를 보여주는 부게로의 작품을 통해서 우리는 그의 작품 속 등장인물들에 공감할 수 있다.

그들이 우리와 얼마나 비슷하건, 다르건 간에 우리는 그들을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존중하고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 타인에 대한 공감이야 말로 우리가 인간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18세기 계몽주의 사상 속에 탄생한 인권과 인간성에 대한 아이디어가 바로 이러한 ‘공감’을 통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부게로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에 대한 이 우직한 화가의 따뜻한 시선 속에서 인간에 대한 존중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동시대에 부게로는 명실상부 가장 인기있는 화가로 근 700여점의 작품을 남겼지만, 20세기 이후 미술사 속에서 부게로의 작품과 그 영향력은 조용히 사라졌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인상주의로부터 ‘예술로서의 예술’을 추구하는 현대미술이 탄생하면서, 1970년대 재평가되기 전까지, 부게로의 이름은 의도적으로 잊혀졌다. 부게로는 극도의 사실적인 묘사와 치밀한 스케치를 통해 인물의 감정을 표현하고 조형적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그러한 부게로의 그림은 현대미술의 흐름에서 동떨어진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인상주의의 대표적 반대자였던 부게로의 그림은 역설적으로 현대미술이 말하는 ‘예술로서의 예술’을 보여주고 있다.       


    


참고

단테 알리기에리, 『신곡』 (지옥편, 연옥편, 천국편), 민음사, 2007

최승 편저, 『단테의 지옥여행기』, 동문사, 2005

린 헌트, 『인권의 발명』, 돌베개, 2009

남동호, 「다비드의 회화에서 나타난 미술의 사회적 역할에 관한 연구」, 홍익대학교 교육대학원, 2007

James F. Cooper, 〈William Bouguereau: The Last History Painter〉, 《American Arts Quarterly》, summer/2011

오르세미술관 ttp://www.musee-orsay.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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