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다임의 변화와 미술: 입체파(Cubism)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는 예술에서 뿐만 아니라 문화와 사상적으로도 패러다임이 변화한 시기이다. 이 시기는 과학과 철학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지식의 대 변혁이 이뤄졌다.
수학에서는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기존의 기하학이 설명해주지 못하는 영역을 설명하는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나오게 되었고, 물리학에서는 기계적이고 규칙적인 우주의 법칙을 다루는 뉴턴의 고전역학 대신에 시간과 공간을 결합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불확정한 세계를 다루는 양자역학이 대두되었다. 철학에서는 베르그송이 등장하여 ‘지속’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감각을 비롯한 자아와 기억이 시간 속에서 지속을 통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밝혔다.(하이데거에 관한 논의도 있지만, 이 글에선 철학 분야 중 베르그송만 중점적으로 이야기하도록 한다)
비유클리드적인 공간을 예로 들자면, 그것은 우리 현실 속에서 존재하는 공간이 아니다. 영화 ‘인터스텔라’의 여자주인공이 유레카를 외치며 인류를 구원해낸 그 공간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차원과는 다른 차원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공간 속에서 직선이 있다면 하나의 점을 지나는 평행선은 단 하나가 아닐 수도 있다. 우리는 삼각형 세 변의 합이 180°라는 것을 배웠지만, 어떤 차원의 공간 속에서는 그것이 아닐 수도 있다. 양자역학은 어떠한가. 하나의 속성을 가지는 대상이 완전히 반대되는 다른 속성을 가질 수도 있다. 상대성 이론은 기존의 3차원의 공간에 시간을 결합시킨 4차원 공간의 개념을 제시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이 바로 4차원 시공간인데, 공간 속에 하나의 차원으로서 포함된 시간이라는 차원은 인식을 바꿔놓았다.
입체파 작품에서 보여지는 인체구도의 해체와 기하학적인 인체묘사는 바로 이러한 당시의 경향들을 보여준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보여지는 과학의 개념이 바로 이 시대 등장한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 그리고 그 속에 등장하는 공간이 비유클리드적인 공간인데, 입체파 화가들은 기존의 절대적으로 여겨지는 공간을 해체하여 한 위치에서는 볼 수 없는 사물의 뒷면을 그림 속에 함께 담아냈고, 사물이나 인체를 주관적으로 해석하여 화폭에 담아냈다.
아인슈타인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의 개념이 3차원이 아닌 4차원의 시공간으로 인식이 확장되었다면, 철학에서는 바로 같은 개념을 제시한 베르그송이 있다. 베르그송의 철학은 우리가 윤리시간인지 도덕시간인지 어쨌거나 고등학교 때 ‘생의 철학’이라고 배우는데, 나는 아직도 베르그송의 철학을 왜 생의 철학이라고 부르는지 잘 모르겠다. 내가 읽은 베르그송의 책 가운데 가장 충격을 준 것은 오래전 『시간의 자유의지』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고, 비교적 최근에는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으로 번역된 책이다. 적어도 이 책만을 열심히 읽은 나로서는 생의 철학이 조금 모호하게 느껴진다.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은 베르그송의 박사논문이다. 베르그송은 첫 번째 장인 ‘심리상태의 강도에 관하여’에서 감각이나 감정의 강도가 단순히 수치적인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지속되는 것임을 논의한다. 그는 나아가 시간 속에서의 ‘지속’이라는 개념 안에서 서양철학사의 오랜 논제였던 자유의지를 이야기한다.
과거의 상태들이 말로 충분히 표현될 수도 더 단순한 상태들의 병치에 의해 인위적으로 재구성될 수도 없다면, 그것은 그 상태들이 동적인 통일성과 완전히 질적인 다수성 속에서 우리의 실재하며 구체적인 지속, 이질적 지속, 살아있는 지속의 국면들을 표현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볼 것이다.
… 모든 조건이 주어진다는 것은 구체적 지속에서는 행위의 순간 자체에 자리잡는 것이며, 더 이상 그것을 예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최화 역)
베르그송의 지속(Duration, Durée)의 개념은 입체파를 가장 잘 설명한다고 이야기된다.
베르그송은 ‘의식’을 양적이나 계량적으로 설명하려는 기존의 과학에 반대하고, 우리의 의식이 시간 속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베르그송의 철학은 입체파의 사물에 대한 인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입체파의 인식 속에서 사물은 공간 속에서 서로 이어져 있다. 뒷면은 앞면과 이어지고, 사물의 질적인 속성이 실제의 사물과 이어져 있다.
입체파는 단순한 추상이나 사물의 도형적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거대한 시대의 변환기 속에서 이뤄진 인식의 전환을 반영하고 있고, 또 그로 인해서 새로운 변혁을 만들어냈다. 입체파는(그리고 입체파의 유행이라는 것도) 거대한 패러다임의 변환을 반영하고 있다.
참고
영화 ‘인터스텔라’
앙리 베르크손(최화),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아카넷
류지석, 오찬옥, <큐비즘에 관한 연구-베르그송 철학과 동시성 개념을 중심으로>
그리고, 거의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학부 때 내가 물리학자가 될 줄 믿어 의심치 않고 열심히 읽었던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에 관한 책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