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어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는 영국의 극작가이자 시인이다. 그는 지금도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읽혀지고 있는 수많은 희곡과 시를 썼고, 근대 영국문학을 열었던 인물이다.
셰익스피어를 읽지 않았더라도, 로미오와 줄리엣이 몰래 결혼해야 했는지, 햄릿이 무엇을 그리도 망설이고 있었는지 알고 있을 정도로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지금도 우리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장미를 장미라고 부르지 않아도 여전히 향기로운 것 아니겠어요, 라는 사랑에 빠진 어린 소녀의 말처럼, 현재의 대중문화 속에서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은 다양하게 변형되고 재창조되어왔다.
영국 엘리자베스 1세 시절의 문화적 황금기를 대표하는 작가인 셰익스피어는, 이후 1800년대에 영국의 대표적인 문화 상품 중 하나로 다시 부활한다.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안정을 이루고 해외에 식민지를 개척하고 있던 영국은, 유럽 대륙에 비해 문화적으로 후진적이라는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영국의 르네상스는 주로 문학과 연극 등의 분야에 머물러 있어 유럽 대륙의 것과는 조금 달랐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 유럽에서는 수많은 예술가들이 아름다운 회화와 조각 작품을 창작하고 음악사를 다시 쓴 수많은 음악가들이 등장할 동안, 영국은 문화적 불모지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인들이 단 하나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예술가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셰익스피어이다.
19세기 엘리자베스 1세 이후 또다른 여왕의 치세인 빅토리아 여왕의 시대, 영국을 위시하여 유럽에서는 셰익스피어 대한 평가가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상영되고, 당시의 빅토르 위고와 같은 유명한 문필가들이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들라크루아나 사세리오, 퓌슬리와 같은 화가들도 셰익스피어를 그림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이성의 시대이며 모더니즘의 시대였던 19세기, 이성과 근대성에 반발하여 낭만주의가 나오기 시작했다. 르네상스 이전의 중세를 동경하는 낭만주의자들은 셰익스피어를 사랑했다. 셰익스피어가 창조해낸 세계 속의 주인공들을 낭만주의적인 시각에서 재해석했다.
빅토리아 시대는 대개 영국 빅토리아여왕(1819~1901)의 통치기였던 1837년에서 1901년 사이의 시기를 일컫는 것으로, 이 시기 산업혁명으로 인해 경제성장을 이룬 영국은 해외로 뻗어나가며 식민지를 개척했고, 소위 ‘해가지지 않는 제국’인 대영제국을 이루게 된다.
토지를 중심으로 한 지주계층 대신 도시 중산층이 정치와 경제에서 부각되게 되고, 선거법이 개정되어 농촌 중심이 아닌 도시 중심의 구조가 만들어진다. 이 시기 영국에는 찰스 디킨스와 브론테 자매와 같은 소설가가 등장하여 당시의 사회상을 그려냈고, 루이스 캐럴은 지금도 읽히고 있는 유명한 동화를 썼다. 중산층의 청렴성과 도덕성이 중시되었던 이 시기, 1888년 영국 런던의 빈민가 화이트채플에서는 잭 더 리퍼라는 연쇄살인마가 나왔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시기에 아서 코난 도일의 유명한 탐정 셜록 홈즈가 탄생하여, 근대적 경찰제도의 기틀을 만들었다.
이 시기는 인쇄기술의 발달로 인해서, 영국에서는 다양한 잡지가 발간되었고 이와 함께 삽화 분야도 함께 발전되었다. 당시 영국 인물화의 전통은 한 인물의 캐릭터를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었다. 인물의 개성과 그만의 특성을 보여주는 인물화의 전통은 삽화에 까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다양한 인물화가 잡지의 삽화로서 정치인이나 유명인사를 그리기 시작했다. 잡지와 더불어, 당시에는 소설에도 삽화가 들어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유명한 잡지 삽화가로 정치만화를 그리던 존 테니얼은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삽화를 통해서 동화를 보다 생생한 이미지로 구현했고, 우리가 알고 있는 사냥모자를 쓴 셜록 홈즈를 창조해낸 시드니 파젯이라는 삽화가는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를 더욱 현실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셰익스피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 있다. 영국의 사상가이자 역사학자인 토마스 칼라일(1795~1881)이 했던 바로 그 말
셰익스피어는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
식민지 인도를 잃을지언정 셰익스피어를 잃지는 않겠다는 바로 그 말은 영국 문화를 대표하는 작가로서 셰익스피어에 대한 자부심어린 평가가 잘 나타나 있다.
사실 이러한 자부심은 셰익스피어의 문학 이외에 문화계의 타 분야에서는 별로 해당되는 것이 없었다. 엘가가 등장하기 전 영국은 제대로 된 작곡가 한 사람도 없다는 비아냥거림을 듣곤 했고, 미술은 유럽 대륙에 비해서 뒤처지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유럽의 다른 국가에서 16세기부터 17세기까지 국가가 만든 아카데미가 주류 미술계를 이끌어가고 있었던 반면에, 영국에서는 18세기가 되어서야 왕립 아카데미가 설립될 수 있었다.
1768년 국왕 조지 3세의 후원으로 설립된 왕립 아카데미에는 이탈리아에서 유학했던 레이놀즈를 중심으로 하여,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를 잇는 고전주의적 사조를 이어나간다.
많은 고전주의 화가들처럼 이들도 역사를 주제로 작품을 창작했는데, 이들이 주목한 또 하나는 바로 셰익스피어의 작품이었다. 물론 셰익스피어의 작품 가운데에는 역사를 다룬 것도 있었지만 아닌 것도 있다. 역사화가 국가 권력의 정당성을 역사적 장면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표현한다면, 셰익스피어는 이러한 측면에서 영국이라는 국가의 자부심을 보여줄 수 있는 문화적 도구였다. 때문에 이 시기 고전주의 화가들은 셰익스피어를 소재로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존 보이델(1720~1804)의 ‘셰익스피어 갤러리’이다.
‘셰익스피어 갤러리’는 1786년 왕립 아카데미 소속 화가와 문인들이 영국 회화의 중흥을 위해 구상한 것으로, 당시 최고의 화가들이 참여하여 셰익스피어의 작품 삽화를 그리고, 그 삽화를 넣은 책을 출간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들이 선택한 애국적인 소재인 셰익스피어를 30여명의 화가들이 167점이나 되는 작품으로 재현해냈다. 그리고 보이델은 런던에서 갤러리를 열고 그 삽화들을 전시하였는데, 이것은 런던에서 매우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
빅토리아 시대는 대영제국을 만들어낸 지성의 시기이기도 했지만, 여기에 대한 반동으로 생겨난 로맨티시즘의 시대이기도 했다. 프랑스에서는 아카데미 회화의 신고전주의 양식에 반대하여 인상파 화가들이 빛과 색채의 변화 속에서 주관적인 자연을 묘사하여 근대적인 회화를 만들어내고 있던 시기, 영국에서는 겉으로 보면 역행한다고 할 수도 있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역사화를 중심으로 하여, 라파엘과 미켈란젤로의 회화 양식을 계승하고 있는 영국의 아카데미에 반기를 든 화가들이 등장하였는데, 이들은 그 전 시대로 회귀를 선택했다. 라파엘 이전의 초기 르네상스와 중세 회화의 자연적인 형태로 돌아가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들 화가들이 1848년 결성한 모임이 바로 라파엘 전파 형제단(Pre-Raphaelite Brotherhood)이다.
이 모임에는 윌리엄 홀먼 헌트(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화가), 단테이 게이브리얼 로세티(화가, 시인), 윌리엄 마이클 로세티(작가), 제임스 콜린슨(화가), 프레더릭 조지 스티븐스(작가), 토머스 울너(조각가, 시인) 등 7명의 예술가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종교화와 함께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주제로 삼아 작품을 창작했다. 이들의 사조는 이후 후기 라파엘전파에서 워터하우스와 같은 화가에게로 계승된다.
신고전주의 전통보다, 보다 자연주의적이고 낭만주의적인 예술을 추구했던 라파엘 전파의 작품 가운데에는 『햄릿』의 등장인물인 오필리어를 그린 존 에버렛 밀레이(1829~1876)의 작품이 있다. 밀레이가 그린 오필리어의 모습은 극 속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이전의 다른 작가들이 그린 오필리어는 햄릿에게 버림을 받고 광기에 물들어 있는 모습이 많았다. 그러나, 밀레이는 오필리어의 죽음을 그린다. 오필리어가 죽는 장면은 햄릿에서 직접적으로 등장하지는 않고 대사로 처리되는데, 바로 이 죽음의 장면을 가장 가운데 놓고 그린 것이다.
자연의 진실한 묘사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 당대의 비평가 존 러스킨과 라파엘 전파의 철학이 들어있는 이 작품 속에서는, 강물에 빠진 오필리어 위에 흩뿌려진 꽃과 수면에 피어있는 꼬들, 그리고 수초들이 마치 진짜처럼 보일 정도로 생생하다. 오필리어의 창백하고 아름다운 얼굴과 초점을 잃은 시선은, 수면에 잔잔히 떠가는 꽃잎과 함께 오필리어의 비극적인 죽음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듯하다. 이 작품은 로세티의 아내가 된 엘리자베스 시덜이 물을 받은 욕조 속에서 누워 모델 역할을 했다고 하는데, 화가인 밀레이가 세밀한 묘사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차가운 물 속에 너무 오래 누워있었던 모델이 감기에 걸렸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밀레이가 그린 비극적이고 낭만적인 오필리어의 죽음은 많은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게 된다. 특히 워터하우스와 같은 후기 라파엘 전파 화가는 광기에 찬 오필리어의 모습을 아름답게 표현하였다.
낭만주의 사조로부터 시작되어 그림으로 부활하기 시작한 셰익스피어는, 영국 왕립 아카데미의 역사화적 전통으로부터 대영제국을 상징하는 소재로서 작품 속에 등장했다가, 다시 라파엘 전파에 의해 드라마틱하고 낭만적인 소재로 그려지게 되었다. 셰익스피어의 장면들을 그린 많은 그림들 속에서는 각각의 시대와 각각의 화가들이 그린 그들만의 해석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