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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애리 Apr 02. 2020

다이어트를 둘러싼 어느 저녁의 서스펜스

오트밀과 간짜장 사이에서 가짜 욕망을 발견하다

오후 5시 35분. 중국음식을 시키고 싶은 어마어마한 충동과 싸워 이겨낸다. 저녁식사로 먹으려고 가져온 오트밀과 요거트가 회사 냉장고에 들어있지만, 당직자에게 회사에서 주는 공짜 중국 배달음식이 계속 눈앞에 어른거린다.




나는 평생 다이어트를 해 본 적이 없다, 라고 하면 거짓말이고, 살이 잘 안 찌는 편이었다. 동작이 빠르고 걸어 다니기를 좋아하는 성격이라 살이 조금 붙어도 금방 빠지곤 했다. 하지만 나이는 속일 수 없는 걸까. 최근엔 운동을 계속 쉬었더니 뱃살이 어마무시하게 찌기 시작했고, 이렇게 불어난 살은 뜀뛰기를 해도, 스쿼트를 해도, 요가를 해도 줄어들 줄을 몰랐다.


오늘부터 새벽 6시에 일어나서 운동을 했다. 점심 때는 두부와 야채와 퀴노아 볶음과 함께 샐러드를 먹었다. 중국음식을 먹으면 오늘부터 시작한 다이어트 Day 1이 다시 Day 0로 돌아가게 된다. 나는 금단증상에 시달리는 마약중독자처럼, 중국집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를 초조하게 노려보며 갈등한다.


사실 중국집 배달음식이 다 나쁘다는 게 아니다. 내가 중국음식을 먹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내가 주문을 하게 되면 거의 80%의 확률로 간짜장을 시킬 텐데, 사실 간짜장이 그리 양이 많은 편이 아니기 때문에 "곱빼기를 시켜서 조금 남기지 뭐"라고 본인도 믿지 않는 헛소리를 하면서 저도 모르게 곱빼기로 시킬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 이후부터는 이제 쉽게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이다. 남길거라던 간짜장 곱빼기를 싹싹 긁어먹고 빵빵해진 배를 안고 졸음을 참으면서 당직서는 시간을 보내다가, 집에 갈 때쯤이면 중국음식이 주는 묘한 허기와 이왕 망한 다이어트 끝까지 가보자 하면서 어디서 감자칩이나 나쵸칩을 사 가지고 집에 들어가겠지. 그리고 밤늦도록 과자를 먹으며 넷플릭스를 보다가 다음날 아침에는 늦잠을 자서 운동도 못하고 아침도 제대로 못 먹고 회사에 나와서 점심때부터 열심히 폭식할 게 뻔하다.




나는 지갑에서 동전을 꺼냈다. (결정장애자인 나는 지갑에 결정용 동전 하나를 늘 소지한다) 고대 로마에는 야누스라는 신이 있었다. 알파와 오메가이자 시작과 변화, 젊음과 늙은이를 함께 상징하는 신이었지만, 어느 순간 문간을 지키는 신으로 변해버린 신이다. 고대 로마의 결정장애자들도 상반된 두 가지 얼굴을 지니고 있는 이 신의 신전 앞에서 동전을 던지면서 나처럼 결정을 내려달라고 빌었을 것이다. 나는 동전을 던지며 마음속으로 말했다.


숫자가 나오면 오트밀, 그림이 나오면 중국집이다!


허공에 동전이 핑하고 도는 소리가 들리고 동전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동전이 떨어졌어야 할 손바닥에는 동전이 보이지 않는다. 둘 다 먹으라는 야누스 신이 축복을 내린건가, 라고 생각한 순간 동전은 내 소매 위에서 발견되었다.


그림이 나왔다: 중국음식을 시켜 먹어야 할까?


나는 완강하게 거부한다. 이건 소매에 떨어졌으니까 무효야. 그러나 내 눈은 순간 중국집 전화번호를 보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도 어마무시한 자제력을 발휘해서 다시 시선을 동전으로 돌렸다.


동전이 또 한 번 허공에 던져졌다. 이번에는 중국음식에 대한 갈망으로 손이 미끄러졌는지 동전은 허공에서 회전도 하지 않은 채 고작 10센티미터를 붕 떴다가 그대로 손바닥 위에 떨어졌다.


이번에도 그림이 나왔다: 중국음식?


아니다. 허공에서 회전도 하지 않은 건 무효다. 나는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고소하고 짭짤한 간짜장의 맛을 회상하지 않으려고 온몸의 뉴런에게 경고를 보내면서, 다시 한번 동전을 던졌다.


결국 숫자가 나왔다: 오트밀이다


나는 실망을 하면서도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어디서 들었던 적이 있는데, 두 가지 사이에서 결정을 못 할 때 동전 던지기를 해보면 본인의 마음을 정확히 알 수 있다고 한다. 동전 던지기를 해서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본인이 사실은 그쪽으로 결정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이라는 말이다.




나는 오늘 중국음식을 먹고 싶었다. 하지만 중국음식에 대한 내 욕망은 가짜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앞으로 내가 무지무지 진지하게 고민할 치킨과 피자와 감자칩과 나초와 팝콘에 대한 욕망들 역시 전부 가짜일지도 모른다. 오트밀을 저녁으로 먹는 것을 팔짝팔짝 뛸 정도로 좋아하진 않지만, 못 먹을 것도 아니다. 다이어트를 하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음식에 대한 가짜 욕망을 성찰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나는 따뜻한 오트밀로 저녁식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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