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애리 Nov 14. 2020

빅토르 최는 과연 소련에 저항했는가

모든 것은 영원했다, 사라지기 전까지는 : 소비에트의 마지막 세대

2017년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전후해서 최근 몇   소련에 관한 좋은 책들이 번역이 되어나와서 소련을 주제로 읽기를 시작했다.


소련의 붕괴 이후 저술되거나 서방의 시선으로 쓰여진 책엔, 소련시대 사람들의 삶을 이야기할 때 항상 체제에 대한 저항을 읽는 경향이 있다. 의례화된 정치모임이나 시스템을 적당히 무시하며 살아가는 소련인들의 삶의 방식과 그들의 서방의 문물에 대한 관심이나 열광,  정치에 대한 유머를 시민 개개인이 체제에 갖고 있는 저항의 씨앗으로 읽어서, 이것에서 소련 붕괴의 단초를 읽는 식이다.

그러나 얼마 전에 읽었던 알렉세이 유르착(이 분은 소련에서 과학자였다가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미국에서 살며 인류학자로 전공을 트셨다)이 쓴 <모든 것은 영원했다, 사라지기 전까지는: 소비에트의 마지막 세대>는 이러한 시선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었다.


유르착은 소비에트의 마지막 세대(7~80년대 성년을 맞은 세대)를 중심으로 하여 후기 소비에트 사회를 분석한다. 그러면서 그들이 정치모임이나 당의 명령 속에 드러나는 과도하게 정치적인 수사들과 비합리성들을 수행적인 언어가 아닌 의례적인 언어로 받아들이며 실제 소비에트의 이상과는 분리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콤소몰 중간 간부의 관료주의를 비판하거나 귀찮은 행사들을 적당히 건너뛰면서도, 한편으로는 소비에트 시민으로서의 자부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중적 태도가 아니라, 정치적 언어들을 의례로써 받아들이는 태도를 내재화했다는 의미로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외부의 시선(혹은 소비에트 붕괴 이후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서양의 음악을 듣는 소련 젊은이가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를 수도 있다는 점을 유르착이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당시 서방의 록 음악이나 춤, 옷, 물건에 대한 기호들은, 공산당의 모호한 태도로 인해서 체제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체제에 대한 충성과 양립 가능한 것이었다는 분석이다.




나는 이 책이 소비에트의 몰락을 다루면서 후기 사회주의 사회를 논하고 있어서 내심 빅토르 최에 대해서 읽기를 기대해왔다. 물론 이 책에서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후기 사회주의 소비에트를 분석하기에 우리에게 늘 소비에트 체제에 대한 "저항" 예술가로 꼽히는 빅토르 최와 그룹 키노에 대해서 직접적으로는 언급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의외의 지점에서 빅토르 최와 당시의 예술가 그룹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모든 이들이 당연히 직업을 가져야하는 소비에트 사회에서 빅토르 최는 보일러공으로 일하면서 여가시간에 밴드 '키노' 활동을 했다고 한다. 당시의 보일러공이란 여가시간이 많은 직업이었기에, 소비에트 체제 하에서 많은 예술가들과 학자들이 이러한 직업을 통해서 자유롭게 사색과 창작, 연구를 할 시간을 얻었다. 그래서 학문과 창작을 권위주의에 복속시컸던 소비에트 정치권력은 모순적으로 이들의 활동을 지원해주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의 '보일러공' 예술가-학자 그룹들을 반 체제적으로 볼 수 있을까?


당시 공산당은  기본적으로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며 국제적인 감각과 다양한 교양을 가진 소비에트 시민상을 제시하면서 서구 문물이나 종교 등에 빠져 '본인의 사회적 책임을 등한시하는' 반체제주의자를 비난하는 모순적인 입장을 가졌는데, 결국 이것은 당시의 많은 젊은이들이 암시장에서 서방의 물건을 구입하고 서구의 록 음악을 즐기면서도 본인을 충실한 공산주의자라고 여기는 상황을 만들었다.  한 마디로, 제대로된 직업을 가지며 열심히 살아가면서 취미활동으로 서구 록 음악에 심취하며 암시장에서 리바이스 청바지를 구입하는 사람인 본인은 불평만하는 반체제주의자와는 구분짓는 것이 당시 젊은이들이 생각하는 정상성이었다는 것이다.


굉장히 흥미로운 사례는 콤소몰 서기였던 한 젊은이가 충실한 공산주의자인 동시에 록 음악의 감식가로서, 콤소몰 문화행사에서 이런 음악들을 동료들이게 소개하면서 동시에 좋은 문화행사를 꾸린 공로로 치하를 받았다는 이야기였다. 우리가 생각하는 소련의 소시민적 반체제주의자는 미국문화를 즐기는 반항하는 젊은이이겠지만, 정작 그들은 스스로를 반체제주의자로 여겼을지는 의문인 것이다.


이렇게 서구의 대중음악들은 전위적이고 미래주의적인 것으로 간주되었고 젊은이들은 바흐를 듣거나 종교문학을 연구하는 것처럼 그것을 "기호"로 소비했지 체제에 대한 "저항"으로 소비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소비하는 그 "기호"가 공산주의적 이상과 일치한다고 여겼다.


당시에 등장한 전위적인 예술그룹들도 마찬가지다. 보일러공으로 적당히 살면서 적은 돈으로 최소한의 생활만을 영의하며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업으로 살아가는 식의 전위적 삶의 방식으로 알려진 레닌그라드의 시각예술가 그룹인 '미트키' 를 비롯하여 일상 속에서 장난을 치거나 해프닝을 일삼는 다양한 전위 예술가 그룹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음악 쪽에서는 다양한 그룹들이 러시아적 전통의 음유시인과 같은 노래로 이전 시대와 다른 경향을 노래했다. 아마도 이 시기의 음악가들 가운데에는 빅토르 최와 그룹 키노도 포함되지 않을까 한다. 반복적으로 우주적이고 상징적인 이미지들이 나오는 키노의 노래 가사들은  아마도 미래적이고 전위적인 경향으로 젊은이들을 매료시켰을 것이다.


물론 이런 예술가들의 행위 자체가 소비에트가 해체된 후에는 결과적으로 소비에트 사회의 모순을 드러냈으며 소비에트의 해체에 일조했다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이들의 삶의 방식이나 예술의 창조방식은 후기 사회주의의 체제 속에서 이뤄졌고 소비에트 사회가 제공하는 조건 하에서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들의 예술을 감상하고 논하는 대중들 가운데에는, 이들의 예술에 내재된 체제에 대한 모호한 비판적 암시를 읽는 이들도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소비에트적 이상에 대한 완전한 부정으로 읽지는 않았을 것이다.


빅토르 최의 삶과 그의 음악이 저항적이었냐 아니냐를 소비에트가 몰락하고 난 뒤에 논한다는 것은 사실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분명 빅토르 최의 음악과 그의 죽음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들은, 포스트 소비에트의 시점에서 체제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또 다른 많은 비슷한 맥락에서 저항으로 소비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삶과 음악은 당시 소비에트 사회 속에서 생겨났으며 그 사회 구조 속에 기대고 있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소련의 몰락을 목격했고, 사회주의가 어떤 모순을 가지고 있었는지 충분히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외부의 시선에 자리하고 있기에 아는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많은 모순에도 불구하고 그 사회 속에서 그 사회에 기대어 살아가던 수많은 소련의 충실한 시민들은, 그들의 지금까지의 삶과 삶의 방식들이 결국 소비에트의 몰락을 이끌어왔다는 것을 그것이 종식되고서야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제야, 그 사회 속에서 행한 수많은 크고 작은 행위들의 함의가 저항으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이다.


제목처럼, 결국 모든 것이 끝나기 전까지는, 그것이 영원할 것으로 보였다.




사실 나도 한국인인지라, 이 책을 읽으면서 북한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북한 시민들이 가지는 그들의 정부에 대한 불만이나 부정부패에 대한 이야기, 남한 혹은 '미제' 문물에 대한 소비 욕망를 미디어에서 접할 때마다 우리는 북한 시민들에게서 체제에 대한 저항의 의도를 읽는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위대한 수령님 장군님 어쩌고 저쩌고'하는 표현들은 그저 겉으로만 하는 것이리라고 기대한다

 그리고 조만간 북한이 붕괴될 것을 예측한다(물론 나만 해도 그걸 20년째 예상만 하고 있다)


유르착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북한에서의 삶이 "겉으로는 순종, 마음으로는 저항"인 것만은 아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체제는 의외로 영원한 것으로 느껴지며, 정권에 대한 사소한 불만이나 부정부패, 외부 문물에 대한 욕망은 그 체제에 대한 충성심과 양립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는 물론이고 그들도, 끝나기 전까지는 무엇이 저항인지 무엇이 체념인지 가치부여를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 사족: 물론 이 책에서 이야기했던 한 체제와 사회 속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적응방식에 대한 분석틀은 사실 소비에트 사회 뿐만이 아니라 어디에도 적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본주의 국가의 관료 체제하에서도, 사실 의례적으로 규정된 시스템과 실제로 그것이 인간 관계 속에서 변형되는 것도 왕왕 발견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전개 중 일부분을 읽으면서, 이 책이 소비에트 마지막 세대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의 특이성보다는 한 사회의 이론적인 체제와 그것이 실제로 기능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될수도 있다는 점에서 좀 모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내가 최근에 읽은 소비에트에 관한 책 중에 가장 신선하고 독특한 시각을 보여주는 책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