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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애리 Oct 16. 2015

글을 쓰려고 하는 이유

Writer's block

사실 나는 지난 몇 달 동안 글이라고는 한 줄도 쓰지 않았다.


여기서 글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진심을 담아낸 글을 말한다. 사소한 보도자료 쪼가리와 전시에 들어가는 해설, 사람들의 부탁을 받아 의무적으로 쓰는 잡문들은 전부 제외를 하고 순수하게 내가 원해서 쓰는 글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 브런치를 시작한 것도, 글을 다시 한 번 써볼까 해서였다. 그동안 시간이 없어서, 일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등등 여러가지 이유로 미뤄뒀던 글을 쓰기 위한 일종의 도구로 선택한 것이다.


어떤 작가는 글쓰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글을 쓰다보면, 쓰레기같은 문장들과 혐오스런 표현들이 좋은 글을 생산해내는 만큼 나오기 마련이라고. 나는 이 말을 이렇게 고친다. 한동안 쓰지 않던 글을 다시 쓰다보면, 좋은 글이 나오기까지 먼저 쓰레기같은 글이 나오기 마련이라고.


사실 그동안 내가 쓴 글들을 보면, 내가 봐도 혐오스러울 정도로 어색했다. 사실 내가 베스트셀러 작가도 아니고 문학상을 휩쓰는 사람도 아니었기에 원래 엄청나게 아름다운 문장들과 섬세한 묘사들을 썼는데 지금 그게 나오지 않는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머리 속에 하고자 하는 말을 끄집어내어 그것을 글로서 표현하는 것이, 스스로 보기에도 어딘가 힘이 부쳐보인다는 것이다.


사실 나는 글을 써서 돈을 엄청나게 벌었던 것도 아니고, 대단한 명예를 얻었던 것도 아니다. 글을 쓰는 행위는 시간과 노력을 엄청나게 잡아먹는 일이었다. 글을 쓰기 위해 먼저 책을 읽고, 생각하고, 고민하고, 글이 안써져서 산책을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여전히 써지지 않는 글을 원망하며 책상앞에 앉아있는 지리한 시간은 정말로 힘들다. 그런데, 나는 왜 글을 쓰는 것을 당연히 해야 할 일로 여기는 것일까. 글을 왜 쓰는 것일까. 글을 안쓸 이유가 넘쳐나는데 왜 하필 글을 쓰겠다고 덤벼들다가 좌절을 계속 맛보는 걸까.


슈베르트는 계속 작곡에 대한 영감이 샘솟는 것을 손가락에서 피가나는 것에 비유했다. 손가락에서 계속 피가 스며나오듯 새로운 음악적 영감이 솟아나오니 그걸 어떻게든 오선지에 '닦아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하이퍼그라피아는 계속해서 글을 쓰게 되는 현상이다. 흔히 작가의 블록(Writer's block)이라고 부르는 블록현상에 걸리면 글 한 줄도 쓰기 힘든 반면에, 하이퍼그라피아는 눈에 보이는 공간이면 어디든 글씨로 채우고 싶은 욕망을 느끼게 되는 증상이다. 내 모든 것을 끄집어내어 그것을 글로 표현하면서 하이퍼그라피아 환자들은 손가락에서 배어나오는 피를 닦아내듯 쉴새없이 잉크를 종이에 닦아낸다. 글을 쓰고 싶은 욕망과, 글로 표현할 때의 희열, 빈 종이를 글씨로 가득 채울 때의 황홀감.


그것이 설사 아무도 읽지 않는 일기장이나, 그다지 인기없는 논문일지라도, 하이퍼그라피아는 블록현상보다는 행복하다.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 많은 작가들이 심각한 어조로 자아의 표현이니 내면의 영감을 구현한다느니 하는 소리를 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글을 써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하이퍼그라피아는 블록현상보다 행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하이퍼그라피아를 기다리면서, 괴롭게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들기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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