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없이 블라디보스톡 8
블라디보스톡을 떠나는 날.
국경박물관과 연해주 주립 갤러리, 화가조합갤러리 등을 전부 다 보고, 호텔 근처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보드카까지 구입하고 난 뒤, 나는 내가 늦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나치게 늑장을 부린 것이다.
호텔로 돌아가서 프런트의 직원에게 택시를 부탁하고, 택시기사를 몇 번이나 재촉해서는, 공항을 향해 초스피드로 달려갔다. 공항을 향해 달려가면서, 시골집과 러시아식 아름다운 목조건물로 지어진 호텔이 보였다. 나는 다음에 블라디보스톡에 올 때는 차를 렌트하는게 어떨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안 떠날 수 있다면 좋을텐데,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실은 여행지에서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가기가 싫은 것이다.
그렇게 공항에 달려가서 헐레벌떡 1시간 가량 밖에 남지 않은 비행기를 타기 위해 체크인 창구로 갔다.
그런데, 창구에는 비행기 체크인이 딜레이되었다고 적혀 있었다.
첫 감정은 기쁨이었다. 사실 나는 거기에 적힌 시간을 잘못 읽었는데, 공항에서는 24시간 시각표시를 사용한다는 것을 깜빡하고, 다음날 3시를 오전 3시가 아닌 오후 3시라고 편한대로 생각해버린 것이다. 나는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그것을 한 번 더 확인한 후, 여전히 다음날 오후 3시 비행기라고 알고는 다시 호텔로 되돌아갈까, 그리고 오늘 남은 하루는 뭘하며 보낼까 꿈꾸고 있었다.
사실 내가 그대로 호텔로 되돌아가서 하루밤 더 숙박을 했더라면, 결론적으로 나는 비행기를 놓쳤을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호텔에서 만났던 일군의 한국인 아줌마 여행자들 중 한 명을 공항에서 만나게 되었다. 내가 비행기가 딜레이되었다고 했더니, 그들은 깜짝 놀라서 항공사에 이야기하자고 했다. 이런 경우 보통 항공사에서 숙소를 준다는 것이다.
나는 사실 다음 날 3시까지 뭐할까, 들떠서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정말이지, 나의 정신머리로 어떻게 그렇게 여행을 다니는지 모를일이다.
한편, 공항에서 만나게 된 한국인 아줌마들은 러시아어를 몰라서 공항에 나오는 방송을 듣고 전광판에 표시된 딜레이 사인을 보고도,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 물론 알았다고 하더라도 항공사 사무실까지 물어서 찾아가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그들은 내 덕분에 비행기가 딜레이 된 것도 알게 되고 항공사 사무실에 가서 함께 이야기할 수도 있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감사해했지만, 오히려 그들 덕분에 나는 다음날 오후 3시에 공항에 돌아와서 비행기가 이미 떠나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는 상황을 피할 수 있었다.
항공사 직원은 불친절하고 배려없기 짝이 없어서, 숙소 직원들은 물론이고 승객들은 전부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되는지 전혀 듣지를 못했다.
들어가자마자 이름과 예약표를 달라고 하더니 가타부타 말도 없이 워드파일에 뭔가 기록부터 하기 시작한다. 나는 비행기가 뜨지 않는 이유를 물었는데, 그는 가만히 있어보라면서 자기 작업을 계속한다. 그러다가 내 여권과 예약번호를 다 입력한 뒤, 몸을 돌리고 간단하게 말한다.
한국 공항이 폐쇄되었습니다
내가 통역을 해주니, 옆에서 한국인 아줌마가 왜 공항이 폐쇄되었느냐, 대체 무슨 일인거냐 라고 물었다. 그 말을 다시 러시아어로 옮겨서 직원에게 물어보자, 그는 잘 모르겠단다. 한국 공항이 폐쇄되었다고만 말한다. 그러고는 또 열심히 자기 일을 하기 시작한다.
참다못한 한국인 아줌마들이 영어로 대체 무슨 문제가 있는거냐고 다다닥 쏘아붙이자, 그는 이번에는 영어로 대답한다.
기술적인 문제입니다
기술적인 문제라면 한국 공항에 기술적인 문제가 생긴거냐, 아니면 기술적인 문제라는 게 우리가 탈 비행기에 문제가 생겼다는 말이냐, 내가 러시아어로 묻자, 그는 한숨을 푹 쉬더니 이번에는 러시아어로 다시 한번 똑같은 말을 반복한다. 기술적인 문제라고 말이다.
어쨌거나, 그 항공사 직원은 한국인들에게는 영어로 '기술적인 결함이 생겨서 비행기가 뜨지 못한다'라고 주장했고, 러시아인들에게는 '한국공항이 폐쇄되어 비행기가 뜨지 못한다'라고 이야기했다. 결국 한국인들은 기술적인 결함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러시아인들은 한국공항이 폐쇄되었다고 알게 되었다.
그 뒤 1시간. 공항에서 지루한 시간을 보내다가 어디로 간다고 말도 없이 승객들에게 버스를 타라고 말한다. 나는 내 러시아어가 형편없어서 어디로 가는지 못 들은 건가 싶어서 옆자리에 앉은 아저씨 한 사람에게 물었지만, 그도 모른단다. 버스는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는 승객들을 태우고 오후 6시경 블라디보스톡 구 공항청사의 폐허가 있는 그 지역의 한 오래된 건물 앞에 섰다. 들어가자마자 가타부타 말도 없이 방 배정부터 시작한다. 오랫동안 사용안해서 묘한 곰팡이냄새가 나는 굴라그(강제노동수용소)같은 방을 배정받은 뒤, 나는 다시 로비로 나와 다른 승객 몇 사람들과 함께 앞으로의 일정을 물었다. 다시 공항에는 언제 가느냐, 어디서 모이면 되느냐, 그리고 특히 준엄한 목소리로 저녁은 줄거냐, 하고 말이다.
한국인 아줌마들은 '우리가 외국인이라서 저렇게 불친절하고 설명도 없나보다'라고 수근거리고 있었는데, 사실 러시아인들도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들 역시 엄청나게 불안해하고 있었다.
한밤중에, 주위에 아무것도 없는 폐허와 같은 옛 공항 청사 근처의 건물. 화장실에서는 녹물이 나오지, 와이파이도 안터지지, 그런 방에서 씻지도 못하고 멍때리고 있다가 잠시 자다깨기를 반복한다. 새벽 1시에 도저히 잠이 안와서 로비에서 버스나 기다려야지, 하고 밖으로 나가는데, 옆방 아가씨가 후다닥 튀어나온다. 그녀 역시 상황을 몰라서 불안한 채 밤을 지새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출발해요? 공항까지 어떻게 갈거예요?
역시 과거 모든 인간에게 평등하게 불친절했던 공산주의 국가답게, 러시아인들도 공항직원에게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공항가는 버스가 있을 거라고, 이따가 버스로 출발할 거라고 알려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불안한지 짐을 싸들고 나를 따라 나온다.
새벽 3시가 훨씬 지났을 때,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길은 어두운데 이미 와서 서 있는 버스는 기척조차 안하고 있었다. 알아서 타라는 건지 뭔지, 뛰어가서 버스를 탔더니 70명이나 되는 승객 다 탔는지 확인도 안하고 공항행 버스는 그냥 쿨하게 출발해버린다.
새벽 5시가 넘은 시각. 이제 비행기를 탔으니 되돌아가는 일만 남았구나, 하고 앉아있는데 또 문제가 생긴다. 비행기가 활주로로 서서히 이동하며 승무원들이 구명조끼 착용 시범을 보이고 있는데, 갑자기 기묘한소리와 함께 엔진소리가 멈추고 기내 조명이 다 나가버리는 것이다. 승무원들도 당황해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가운데, 엔진이 다시 켜지고 기내 조명이 들어온다. 그런데 몇 초 뒤에는 또 엔진도 꺼지고 불도 나가버린다. 이걸 15분동안 무한반복하는 과정에서 기내는 마치 나이트클럽에 있는 듯 불빛이 현란하게 깜빡거린다. 승객들은 이게 무슨 일이냐고 웅성대고 있는 와중에, 조명이 다시 들어왔다.
조명이 다 들어오고 엔진소리도 정상적으로 들리지 동해에 추락할지언정 비행기가 뜰수는 있겠지, 싶었는다. 하지만 이번에는 뒤쪽에 앉은 젊은 아가씨가 화장실에 틀어박혀 문제를 일으킨다. 20대 정도로 보이는 아가씨였는데, 그녀는 겁에 질려서 주위 사람들이 말리고 스튜어디스가 달려가서 설득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큰 소리로 서럽게 울면서 자리에 앉기를 거부한다.
я хочу домой(집에 가고싶어)
흑흑대면서 어찌나 서럽게 울어대는지, 승무원들도 당황해서 어쩌지를 못한다. 나는 이 아가씨 때문에 다시 비행기에서 내려야 하는 건가, 하고 생각했지만 우여곡절끝에 화장실에 틀어박혔던 아가씨도 제자리로 돌아가고 비행기는 떴다.
나는 비행기가 뜰 때 쓴웃음을 지었다.
소원대로 나는 블라디보스톡에서 하루를 더 보내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 소원이라는 것은, 많은 전래동화와 신화에서 이야기하듯이 제대로 빌어야 하는 것이다. 쿠메의 무녀는 영생을 소원하면서 영원한 젊음도 신에게 요청하는 걸 깜빡해서 죽지도 못하고 늙어가기만 했다지 않은가.
다음 날 오전, 비행기는 추락하지 않고 한국에 잘 도착했다. 기장은 러시아어로 우리가 공항에 잘 도착했으며 기술적인 문제로 불편을 끼쳐드려서 미안하다, 즐거운 여행되시라 등등의 이야기를 길게한다. 그리고는 이번에는 영어로 "승객여러분, 우리 비행기는...."하고 말을시작하다가, 한숨을 한번 푹 쉬고는 그냥 "불편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말하고 쿨하게 방송을 끝낸다. 그도 피곤했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나는 도착하기는 했다. 소원대로 블라디보스톡에 하루 더 있다가 한국으로 돌아왔다. 블라디보스톡에서 내내 나를 괴롭혔던 위장질환과 누적된 피로는 사라졌고 블라디보스톡의 새로운 곳을 관광(?)할 수 있는 기회도 얻었지만, 나는 아직도 블라디보스톡이라고 하면 수풀이 무성한 폐허와 옛 공항청사의 황량한 건물이 가장 먼저 기억에 남는다.
확실히, 소원을 빌 때는 신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