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없이 블라디보스톡 7
나는 80년대에 어린시절을 보내며 88올림픽을 자랑스러워했고, 독재자가 죄수복을 입고 재판정에 앉아있는 것을 TV로 목격하였으며, 경찰이 '포돌이' 캐릭터를 통해서 공공 서비스의 영역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던 사람이다. 나의 윗 세대까지만 해도 어딘가 경찰에 대한 경원의 감정이 있었지만, 나는 한국에 있을때까지만 해도 낯선 곳에서 길을 잃으면 경찰에게 길을 묻고, 경찰차를 보면 어쩐지 안심이 되는 사람이었다.
카자흐스탄에서는 이것이 정 반대가 되었다. 나는 낯선 여행객이나 외국인들에게 돈을 뜯는 경찰에 대한 괴담을 끊임없이 들었고(심하면 유치장에서 하루를 보내기도 한다는 소문이 있다), 때문에 여권과 거주지등록증, 핸드폰(혹시 구금될 경우-딱히 도움은 안될 것 같지만-대사관에 전화하기위해) 없이는 바로 앞에 있는 마가진(가게)에도 가지 않았으며, 경찰차만 보면 어쩐지 겁이나서 발걸음을 재촉하곤 했다.
여기서 거주지등록증이란, 대부분의 구소비에트 국가들에서 영주하지 않는 외부인이 체류하는 동안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장소를 신고해야 하는 제도이다. 소련 경찰국가의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져서, 구 소비에트권 국가를 방문하는 외국인들에게 무한한 불편을 양산하고 있다. 이 거주지등록제도라는 게 참으로 이상해서, 7일 이상(내 기억이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한 지역에 머물러 있는 동안은 반드시 등록을 해야 하는 것인데, 계속 이동하는 여행을 하는 여행자들은 7일이상 머물러 있지 않으므로 등록을 할 필요도 없는데다가, 거주지등록을 하고 등록증이 나오는 시간이 며칠이 걸리는 터라 등록증이 나올 때쯤이면 다른 도시로 떠나게 되니 이건 솔직히 여행자들에게는 웃기는 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내가 겪은 카자흐스탄 경찰들의 말에 따르면, 한 도시에 하루 머물러 있더라도 등록을 하고 다음에 머무르는 도시에서 다시 등록을 하는 등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거주지등록을 제대로 안했으니 문제가 생기는데, 이걸 해결하기 위해서는 얼마간의 돈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블라디보스톡으로의 여행은 매우 짧은 기간의 여행이었다. 7일을 초과하지 않는 여행이었기 때문에 나는 사실 법적으로는 거주지등록을 할 필요가 없었다. 이 부분은 러시아 이민국 홈페이지의 법령을 찾아봐서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내가 머무르는 호텔에서는 당연히 거주지 등록을 대행해서 해줄 것이고, 거주지등록증을 받을 때즈음에는 나는 러시아를 떠나게 될 터였다. 문제가 되는 것은 거주지등록증이 나오기까지의 며칠간이었다. 등록증이 나오기까지의 며칠간은 등록증 없이 다녀야 할 터인데, 과연 경찰들이 나를 가만내버려두겠느냐는 것이다.
나는 카자흐스탄에서 경찰들에 대해 지긋지긋하게 겪었다. 어떤 경우는 위협까지 당하기도 했고, 어떤 경우에는 거주지등록증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여권 마지막 페이지에 입국한 항공권과 함께 끼워놨다-혹시나 우즈베키스탄 통해서 밀입국 했다고 할까봐) 경찰들에게 뇌물을 뜯길 뻔도 했으며, 또 어떤 경우에는 이유없이 불러세워져서 검문을 당하기도 했다. 나는 구 소비에트권 경찰에 대해 좀 안좋은 감정이 있었다. 이런 감정은 한국에 돌아와서 몇 년간 한국경찰에 대한 두려움으로까지 전이되기도 했지만 그것은 다른 이야기이다.
아는게 병이라고, 러시아에 가면서 나는 여행에 대한 기대보다 경찰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외교부 홈페이지에서 러시아-한국간 비자면제 협정문 내용을 한국어, 영어, 러시아어로 출력해서 소지했으며(입국에 문제가 생기거나, 밀입국했다고 할까봐), 이민국 홈페이지에서 거주지등록제도 관련 법령을 찾아서 '7일 이상 거주하는 자'에 형광펜으로 칠해놨으며, 경찰을 볼 때마다 최대한 고려인인 척(으응?)하면서 입을 닫고 지나치려고 했다.
문제는 내가 러시아 경찰을 과대평가했던 것이다.
입국장에서, 입국심사원은 피곤해죽겠다는 표정으로 비자관련 프린트물을 손에 든채 긴장하고 있는 나를 한 번 슥 쳐다보더니 도장만 쾅 찍어주고 빨리 나가라고 재촉했다. 첫날밤, 한밤중에 광장에서 들떠서 관광객 모드로 사진을 찍어대는 나를 보고도, 경찰은 정말 한치의 관심도 없이 그냥 지나쳐갔다. 둘째날, 여전히 경찰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 세째날, 호텔 근처에서 길을 몰라서 헤매고 있는데 경찰아저씨가 도와주려고 다가오다가 러시아어 못하게 생긴 외국인인 것을 알고 동료들과 멋쩍게 웃으며 가버린다. 네째날, 여권안에 뇌물까지 끼워놨다고, 하는 표정으로 제발 관심좀 가줘졌으면 좋겠다는게 여전히 경찰들은 자기 일만 한다.
여행을 하면서, 가장 좋지 않은 것이 편견이라고 한다. 나는 늘 여행을 할때나 다른 나라에 머물러 있을 때, 편견없이 보려고 노력했다. 인류학자의 눈으로 그들의 문화를(그것이 설사 부당할지라도) 관찰하고, 거기에 합당한 이유를 갖다붙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나는 블라디보스톡에서 구 소비에트권 경찰에 대한 편견 때문에, 쓸데없는 데에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블라디보스톡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 때(나는 자주 길을 잃는다), 나는 경찰들이 묵묵히 불법주차차량을 견인하는 것을 보았다. 무뚝뚝하게 굳은 표정으로,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방법으로 견인하는 모습을 감독하며 서 있는 경찰들을 보며, 나는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나는 두려운 나머지, 그들도 우리와 같은 직업인이라는 것을 깜빡했던 것이다. 아무리 두려운 존재라고 할지라도, 그들 역시 우리와 같은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