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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애리 Oct 02. 2015

러시아 극동지역의 '진해'?

뜬금없이 블라디보스톡 6

보통 우리는 해군이라고 하면 진해를 떠올린다.

물론 벚꽃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해군이 있는 도시라고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진해일 것이다. 이 매거진의 제목을 보면 알겠지만, 나는 남부지방 출신이면서 진해에 한 번도 안가봤다.(자랑이다-.-) 어쨌건 해군 도시라고 하면 진해가 제일 먼저 생각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거다.


블라디보스톡 역시 해군도시라고 말할 수 있다.


예전에는 군사도시였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들어가기 까다로웠다고 하고, 지금은 여느 도시와 다르지 않게 왕래할 수 있지만 여전히 군함과 해군들을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블라디보스톡이다. 


나는 블라디보스톡에서 셋째날, 요새박물관과 잠수함 박물관을 구경하고서는, 팔자에도 없던 밀덕(밀리터리 덕후) 모드가 되어버렸다.

요새박물관은 말 그대로 과거 군사요새였던 곳을 현재 박물관을 만든 곳이다.


야외에는 대공포 같은(정확한 용어는 모르겠다) 커다란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고, 벙커(역시 이것이 정확한 용어인지는 모르겠다) 안에 들어가면 19세기 러시아의 극동지역 개발로 인해 블라디보스톡이 건설되기 시작할 때부터 군사기지로서의 블라디보스톡, 그리고 구 소비에트 지역에서는 빠지면 섭섭한 제 2차 세계대전 관련 역사자료와 무기들이 잔뜩 전시되어 있다.


나는 밀리터리 덕후는 절대로 아니다. 나는 일종의 평화주의자이며, 표현하자면 무기를 버려라를 쓴 베르타 주트너에 더 공감하는 편이다. 그러나 블라디보스톡의 역사로 시작된 전시를 열심히 보다가 어느새 전시 내용이 근대 무기들과 군사역사로 바뀌자, 어쩐지 밀리터리 덕후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말하자면, 요새 박물관이 내 안에 내재된 밀덕의 영혼을 끄집어냈다고나 할까. 게다가 어쩌다보니, 내 앞에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온 현지인 아저씨가 관람을 하고 있었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아저씨는 군인이거나 예비역(이라는 단어가 적절한가는 모르겠다)인 것 같다. 그 아저씨가 아들한테 신이나서, 저 권총은 어떻고 또 저 권총은 어떠하다고 설명을 하는데 저절로 귀가 솔깃해진다. 열심히 사진을 찍어대고, 또 열심히 전시물을 보고, 또 일부는 아들에게 설명해주는 아저씨의 말을 엿들으면서 박물관을 다 관람하고나자 어쩐지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전시를 또 보고 싶다.


그래서, 내친김에 남은 오후는 군사쪽으로 집중하기로 결심했다.

원래 잠수함 박물관과 군함을 구경하러 가려고 했었지만, 지나치게 귀찮은 나머지 갈까 말까 망설이고 있던 나였다. 하지만 요새 박물관을 관람하고 나서는 갑자기 이런 종류의 박물관이 무척이나 가고 싶어졌던 것이다.


사실 나는 길치이다. 여행지에 가면 딴 데 정신을 팔고 있다가 길을 잃어버리고 딴데로 새기 일쑤였다. 파리에서는 기메 박물관을 찾아가려고 지하철에서 내려서 (코앞에 있는 기메 박물관을 보지 못하고) 반대편으로 한참 걸어갔던 전력이 있으며, 우크라이나에서는 (역시 코 앞에 있었던) 숙소를 못 보고 숙소로 되돌아가려고 지하철을 갈아타고, 또 갈아타서 결국은 커다랗게 원형으로 한 바퀴 궤적을 그리고 숙소를 찾아왔으며, 카자흐스탄에서는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집 근처 슈퍼에 식료품을 사러 나왔다가 길을 잃어서 택시기사의 도움으로(택시 기사가 웃으며 바로 코너만 돌아가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니, 내가 목적을 가지고 새로운 곳을 찾아간다는 것은 꽤나 험난한 여정처럼 보이는게 당연했다.


그러나 나에겐 핸드폰과 GPS의 축복이 있었다.


핸드폰을 들고 몇 번이나 똑같은 길을 지나쳐가면서 네비게이션으로 나는, 내 전력상 거의 '금방'에 가까운 시간에 잠수함 박물관과 꺼지지 않는 불을 찾을 수있었다.군사 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요새박물관 육군의 느낌이라면, 잠수함 박물관은 해군의 느낌이었다. 잠수함 박물관에 들어가자, 그날 요새 박물관에서 밀덕으로 재탄생한 나의 눈을 사로잡는 옛 잠수함의 흔적들이 펼쳐졌다. 좁고 긴 복도같은 이 옛 잠수함 속에는 용도를 모를 갖가지 기계들로 가득차 있었고, 역시 구 소비에트 국가의 군사박물관에서는 빠지지 않는 제2차 세계대전 관련 유물들이 있다. 유명한 관광스폿인 듯 한국인들이 꽤 있었다. 나는 오랜만에 한국인들에게 한국어로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을 하기도 하며, 누군가 얘기했듯 '입장료가 아깝지 않은' 가장 모범적인 관람태도로 눈을 반짝거리며 관람을 했다.


요새박물관과 잠수함박물관, 그리고 바로 옆에 있는 러시아 군함들을 열심히 구경하고 돌아오는데, 때마침 해군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줄을 맞춰 걸어오는 게 보였다.


교관인지 장교인지 모를 한 군인이 생도들을 이끌고 바삐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거기서, 구 소비에트권 경찰과 군인을 다소 무서워하는 나로서는 평소에 절대로 하지 못할 행동을 했다. 이게 다 박물관에서 밀덕 모드에 빙의된 탓이야, 라고 되뇌이며,


실례지만, 사진 한장만 찍어도 되요?



라고 교관인지 장교인지 모를 군인에게 미소를 지으며 물어보았던 것이다.  



카자흐스탄에서, 아직 순진했던 시절, 여행을 하다가 경찰을 만났다. 경찰이 우리에게 법규를 위반했다고 트집을 잡으며 돈을 요구할 때, 나는 그게 범칙금인줄만 알고 있었다. 여행하다가 외국에서 범칙금 내보는 경험은 다시는 못할 경험 아니겠어? 라는 생각에, 나는 용감하게도 경찰 중 한 명에게 '사진 찍어도 되요?'라고 물었는데, 경찰은 그 순간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손가락으로 '너 감옥갈래'하는 포즈를 취해보였다. 그 경찰들과 재수없게도 나는 또 한 번 마주치게 되었는데, 움직이는 기차 안이었던 터라 경찰 중 한 명이 나를 향해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났다. 나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는데, 넘어졌던 바로 그 경찰이 갑자기 허리춤의 권총으로 손을 가져다대면서 살의를 가지고 쏘아보았다. 옆에 있던 나이가 지긋한 다른 경찰이 다행히도 말렸던 터라, 별 문제없이 넘어갔지만 나는 그때 이후로 (심지어 한국에서도) 경찰이나 군인들을 보면 함부로 말을 걸지 못하게 되었다.  


나는 그 군인에게 그렇게 물어놓고, 순간 바로 후회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그 군인이 엄숙하지만 수줍게 미소를 지으면서 이끌고 있던 생도들을 줄을 세우는 게 아닌가. 


들었지? 사진 찍는단다


그의 말에 개구장이같은 생도들이 까르르 웃으며 포즈를 취한다. 그는, 사진을 찍어주기 위해서 길에 서준 것은 절대 아니라는 듯, 딴데를 보면서(그러나 사진에 잘 나오도록 포즈를 취하면서) 서 있다. 사진을  찍고 난 뒤 한 무리의 해군들은 다시 갈길을 갔다.



그리고 카메라를 든 그 관광객은, 그날 블라디보스톡에서 밀덕의 영혼을 가지게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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