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애리 Oct 02. 2015

루스키 섬, 그리고 etc, etc…

뜬금없이 블라디보스톡 5

나는 여행을 싫어한다.


내가 사용하던 익숙한 물건들과 내가 늘 입던 옷, 내가 늘 사용하던 화장실과 침실이 없는 불확실한 지역으로 가는 것을 싫어한다. 나는 낯선 곳에 가서 놀라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여행은, 여행이 아니라 잠시 한 도시에서 사는 것이다. 나는 이런 '여행'을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에서 했고, 프랑스 파리에서 했다. 나는 그 짧은 기간 동안 그 곳에 '사는 체' 하면서, 그 새 단골가게를 만들고 매일 가는 공원을 만들고, 익숙한 버릇들을 만들어냈다. 근대적인 의미의 여행, 그러니까 학교 다닐 때 했던 한참 버스 타고 가서 기억 안나는 절과 박물관을 보고, 또 한참 버스 타고 가서 기억도 안나는 명승지를 보는 수학여행식 여행은 나에게 절대 맞지 않았다.


여행을 싫어하는 만큼, 나는 낯선 곳에 가면 늘 어딘가 몸이 좋지 않았다.


늘 위장이 탈이다. 평소에 외식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인지 되도록이면 집밥을 먹는 습관을 가지고있는데, 여행지에만 가면 외식만 하게 되는 터라 위장에 탈이 나는 것이다. 짧은 여행에서는 늘 그랬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위장에 탈이 난 것은 전부 공항에서 먹은 돈까스 때문이다. 왜 하필이면 공항에서 맛도 없는 돈까스를 택해서, 결국 체하고 만 걸까. (내가 돈까스를 선택한 이유를 이야기하자면, 나의 지인들과 나의 페이스북 친구들과, 나의 블로그 이웃들은 다들 알고 있는 카자흐스탄에서의 돈까스 타령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지금은 블라디보스톡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그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한다)


어쨌거나 그렇게 체한 상태에다가, 전날 지나치게 무리를 했던 모양이다. 셋째날 아침에 일어나니 그냥 침대에 누워 쉬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실 일찍 잠들었다가 새벽 3시에 깨서 계속 잠을 못 자다가 새벽에 인근을 산책을 하고 들어왔는데, 그때부터 무척이나 졸리기 시작했던 것이다.아침에 호텔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려는데, 속이 계속 좋지 않아서 블린늬(얇은 팬케이크)나 생과일, 생야채 같은 것은 아예 먹을 수가 없다. 그래서 결국 선택한 것은 쌀밥과 쇠고기완자와 달걀찜이다. 나는 내가 택한 여행지가 서유럽이 아니라 쌀 요리가 있는 극동 러시아라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전날은 생선구이정식을 먹고 오늘 아침에는 이런걸 먹으니, 계속 한식을 먹는 기분이다.


이 날은 전날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아가씨가 추천해준 루스키 섬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블라디보스톡에 대해서 정보를 찾아보면 루스키 섬이 나온다. 루스키 섬은 시내에서 차로 30분 가량 걸려서 갈 수 있는 섬인데, 그 곳에는 새로 캠퍼스를 옮긴 극동대학교가 있고 해변 경치가 무척이나 좋다고 한다. 블라디보스톡 사람들은 그 곳에서 하이킹을 하기도 하고, 바비큐를 구워먹기도 한단다.


사실 내가 루스키 섬을 셋째날 일정으로 정한 것은 단순했다. 버스를 타기 위해서이다. 피곤했기 때문에, 그냥 시내를 걷는 것 보다는 버스를 타는 것이 좀 낫겠지, 라는 좀 황당한 이유로 선택한 일정인 것이다.


아침부터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습하고 더운 날씨. 나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들의 얼굴표정에 짜증이 배어있었다. 걷기가 너무 귀찮은 나머지 호텔 근처에 있는 블라디보스톡역에서 버스를 타고 중심가까지 가서는, 거기서 다시 마르슈트르까를 타고 후니쿨료르로, 그 다음에는 거기서 다시 루스키섬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거기 서 있는 어린 남학생 둘에게 루스키 섬으로 가는 버스 편을 전해 듣고, 그 덕분에 편하게 갈 수 있었다.


오랜만에 쓰는 러시아어인데다가, 몸이 좋지 않을 때면 한국어도 제대로 안나오는 나의 저질스런 언어능력 때문에, 버스 편을 물어보면서, 계속해서 오스트롭(섬)이란 단어가 생각이 안나서, 오스트리(매운), 아스타놉까(정류장)을 되뇌었는데 다들 알아듣는게 고마웠다. 정신없는 외국인 여자를 챙겨주고, 버스 놓칠까봐, '제부쉬까(아가씨), 이 버스 타면 되요'라고 얘기까지 해준 무뚝뚝하지만 착한 남학생 덕에 나는 버스를 타고 갈 수 있었다.


버스는 한참을 가다가 평범한 두 개의 다리를 건넌다. 둘 다 흰 다리였는데, 하나는 이름이 졸라토이 모스트золотой мост(금색 다리)였다. 한 2~30분 정도 변두리 여러 동네를 지나 달려가니 루스키 섬이다.


버스를 타고 간 관광객인 나에게 보이는 루스키 섬은 말 그대로 아무 것도 없었다.
제2차세계대전(대조국전쟁) 종전 70년 기념행사 포스터 뒤로 보이는 극동연방대학교. 진짜 주위에 아.무.것.도. 없다


벌판, 해변, 공사를 하고 있는 샛길 같은게 보이기는 하는데, 그나마 뭔가가 나타난 것은 극동연방대학교(ДВФУ) 건물이 나왔을 때였다. 물론 대학교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다음 정류장은 아무 것도 없는 끄트머리라면서 운전기사가 나에게 여기서 내릴건지, 그대로 타고 갈 건지 묻는다. 나는 내리겠다고 말하고 서둘러 내렸다. 모든 승객들이 이 극동대학교 정문 앞에서 내렸다.


젠장, 아무 것도 없다.


대학교 말고는 없다. 나는 여기 대학교들이 관광객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학생증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다) 건물이 들어갈 수 없다는 것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달려오는 동안 물을 많이 마신터라,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 죽을 지경이었다. 결국에는 대학교 건물 안으로 들어갔는데 경비원이 학생증을 보여달라며 막는다. 없다고 하니, 관광객은 들어올 수 없다고 한다. 나는 화장실이라도 어떻게 안될까, 불쌍한 표정을 지어보지만 통하지 않았다. 밖에 나와서, 건물 밖에 앉아있는 사람들에게 화장실이 여기 근처에 있는가 물어봤는데, 그들 역시 여기 왔다가 그냥 밖에 있는 듯 했다.


그냥 숲 속으로 들어가는 수 밖에 없겠는데요,


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고맙다고 말하고는, 전격 귀환을 결정했다. 이게 다 화장실 때문이다. 도착한지 10분도 채 안되어 다시 버스를 타고 본토로 되돌아갔다. 그냥 버스 투어를 온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사실 두 개의 다리를 지나오는 것도 재미있는 경험이었고(한국에서 흔히 보는 다리 같긴 했지만), 버스에서 굳이 하이킹을 하지 않고 아름다운 해변 풍경을 구경하는 것도 좋았다. 마치 영국의 콘월 해변(도시 외에는 안 간다. 따라서 여기에 물론 가본적은 없다) 같은 아름다운 절벽을 바라보는 것도 좋았다. 그리고 곳곳에 들어선 요새와 기지 같은 걸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낡은 농장 안의 더러운 웅덩이 같은 연못 위에서 헤엄치는 오리들, 낡은 소비에트 시대 건물들, 독특한 주거단지. 그 주거단지에는 흑인 여자 한 명이 주민들의 신기해하지만 못 본체하는 눈빛을 받으면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것도 보았다.


사실 버스를 탔던 이유 중 하나는 좀 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새벽에 잠에서 깨서 돌아다녔던 데다가 몸도 좋지 않아서 너무 피곤했다. 버스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들을 관찰하다가 슬슬 졸려고 하는 찰나에 뒤에서 핸드폰 벨이 시끄럽게 울린다. 은단 냄새가 강하게 나는 어떤 할아버지의 핸드폰이다. 할아버지는 전화를 받더니, 대뜸, "아, 지금 집에 가는 길이라니까! 집에서 얘기하자고. 버스 타고 가고 있어."라고 말하고는 끊는다. 통화 내용을 들어보면 병원에 갔다가 집에 가는 것 같았는데, 내가 잠이 들려고만 하면 계속 핸드폰이 울리며 어디까지 왔느냐고 재촉하는 그 할아버지의 핸드폰과 "지금 집에 가는 길이라구!"하고 소리를 지르는 할아버지의 굵은 목소리 덕에 나는 자다 깨다를 반복하면서 다시 후니쿨료르에 도착했다.


후니쿨료르에서는 버스가 다시 회차하는 것 같아서 나는 다시 되돌아가는거냐고 아줌마에게 물어보고, 퍼뜩 내렸다.


점심시간은 다되어가고, 비는 그쳐서 하늘을 쨍쨍한데, 선글라스는 호텔에 있었다. 대체 몇 번이나 여기 오는 거야, 하면서 투덜대며 후니쿨료르функулёр를 지나 시내로 걸어갔다.


후니쿨료르는 한국어 관광책자에 독수리기지 혹은 독수리전망대라고 번역되어 나오기도 하는데, 블라디보스톡의 상징같은 멋진 다리와 도시 전경을 볼 수 있는 높은 지대에 위치한 전망대 같은 곳이다. 곳곳에 쳐진 철조망에는 연인들이 채워놓은 것이 분명한 자물쇠가 가득 달려 있었고, 가장 높은 곳에서는 러시아에 문자를 처음 가지고 왔다는 키릴 형제의 동상이 보인다. (사실 러시아어를 배우는 사람들이 농담처럼 얘기하는게, 유럽에서 문자를 가지고 배를 타고 오다가 문자가 섞여 버려서 지금 러시아 키릴 문자에 я이나  и 같은 거꾸로 된 것 같은 문자가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그저 근거없는 농담일 뿐이다. 키릴문자는 그리스어 알파벳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전망대 아래에는 러시아라고 하면 보드카 다음으로 생각나는 마뜨료쉬까 인형을 파는 기념품 가게가 있다.



어제도 친절한 아가씨가 알려줘서 가보았었고, 아침에도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버스를 갈아타다말고 또 갔었지만, 루스키 섬을 찍고 다시 도심으로 돌아온 나는 또 한 번 거기를 간다. 그렇다. 나는 간 곳을 또 가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걷기 귀찮은 나머지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고 호텔로 가서는 웃옷을 긴팔에서 나시로 갈이입고 선글라스를 들고 나왔다. 점심은 먹어야겠는데, 속은 아직도 느글거린다.


식사할 곳을 찾아 방황하다가, 도착한 날 밤, 한밤중에 야타족을 만나기도 하며 지나가다 보았던 Tesla라는 레스토랑에 왔다.


해양공원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있는 레스토랑이다. 테슬라라는 이름에 걸맞게, 식당 곳곳에는 테슬라의 사진이 걸렸다. 나는 문득 베오그라드의 테슬라 박물관이 생각났다. 갑자기 그리움이 밀려온다.


테슬라 레스토랑에서는, 외국인이라서 서로 주문받기 겁나서 미루다가 결국 떠밀려 나온 한 점원에게 추천을 받아서 생선스프인 우하(уха)를 주문했다. 배가 너무너무 고팠던지라, 우하가 러시아 음식이냐고 물어보고는, 내가 배가 무지무지 고픈데 이거 하나로 충분할까, 이거 크기는 얼마나 되지, 하고 물어보고는 우하와 함께 생선요리를 하나 더 시켰다.



나에게는 이반 데니소비치가 먹었던 강제수용소의 생선수프를 떠올리게 하는 우하. 그러나 여기서 먹은 우하는 강제수용소를 상상하기에 지나치게 고급스럽다.


옆에 있던 젊은 애들이 내 얘기를 듣고 킬킬대며 웃는다.


저 중국여자는(한국 사람이라는 걸 모르는 듯 하지만 지적해주기 귀찮다) 이런 카페에서 우하를 시키면 어떡하느냐고, 우하를 제대로 먹기나 하겠느냐고 자기네들끼리 얘기하다가, 내가 양이 작으면 어쩌나 물어본 것을 가지고도 킬킬대며 비웃는다.


그래, 나 먹보 외국인 여자다. 너네들은 새모이처럼 먹는 모양이지, 흥!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방금 러시아어로 주문해놓고서는 러시아어를 못 알아듣는 척 수첩을 꺼내 글을 쓴다.


우하는 러시아 생선수프인데, 속이 느글거리는 나에게 딱 맞는 요리였다. 맑은 동태탕 같다고나 할까. 예전에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읽고는 그 안에 나오는 생선수프가 너무너무 먹고 싶었다. 거기에는 물론 수용소에서 주는 썩은 감자와 생선 대가리가 든 수프였지만, 솔제니친이 그 수프를 먹는 슈호프의 생각을 어찌나 생생하게 묘사를 해놨던지, 슈호프가 뜨거운 국물을 훌훌 마시고나서 남은 건더기(감자와 생선 찌꺼기)를 숟가락으로 긁어서 육즙을 느끼며 씹어먹는 그 장면을 읽고나면, 우하를 먹으러 굴라그(수용소)에 가고 싶은 생각까지 든다. 사실 그 소설에 나오는 우하가 내가 먹는 우하가 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슈호프와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 결론적으로 나는 우하 덕분에 안좋았던 몸이 나아졌고 운좋은 하루였다는것.


레스토랑에서 우하와 생선 커틀릿을 먹고나서 사실 좀 졸렸다. 레스토랑에서 바깥풍경을 보는 척 하며 좀 졸다가 다시 길을 나섰다. 다음으로 간 곳은 요새 박물관(Музей Владивостокская Крепость)이다. 해양공원 바로 옆에 있는 옛 요새를 박물관으로 꾸며놓은 것이다. 박물관은 한 마디로 밀리터리 덕후의 성지같은 곳이다. 전날 길을 헤매다가 잠시 쉬었던 공원 바로 옆에 있어서 깜짝 놀란 개선문과 C-56잠수함 박물관(Мемориальная Подводкая Лодка С-56), 그리고 바로 그 옆에 있는-구 소비에트 도시들에는 꼭 있는 제2차 세계대전을 기념하는-꺼지지 않는 불을 보고는 , 초콜렛 전문 가게에서 살얀카(카자흐스탄에서 먹었던 그맛이 아니다)와 쇼콜라쇼를 먹고는 돌아오다가 여행안내서에서 보았지만 삼일동안 돌아다니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관광스폿을 발견했다.


바로 율 브린너 동상을 호텔 근처에서 발견한 것이다.



다른 건 기억이 안나고, '기타 등등, 기타 등등' 밖에 기억 안나는 <왕과 나>에 나오는 율 브린너가 블라디보스톡 출신이라는 게 참 신기하다.


하지만, 그 신기함도 잠깐이고, 나는 너무 피곤했다. 잠을 제대로 못잔데다가, 밥도 거의 제대로 못 먹고, 지나치게 무리했다. 사실 후니쿨료르 근처에 있다는 라이브 카페(버스정류장에서 만난 아가씨가 추천해줌)는 그날 문을 받은 상태였고, 나는 러시아에 수입된 한국 중고버스에서 나오는 지독한 매연을 너무 마셔 죽을 지경이었다. 사실 오늘은 하루 종일 의기소침했다. 어제는 사람들의 친절에 감동했다면, 오늘은 그냥 피곤한나머지 쉬고싶을 따름이었고, 사람들의 사소한 불친절에도 기분이 금방 상했다. 어쩌면 내일은 돌아가야 할 날이라서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이 짧은 여행에서 어제 하루 중 반나절은 동행인 눈치를 보느라 갈 곳을 못 갔고, 오늘은 아침에 루스키 섬에 간다고 허비했으니 그럴법도 하다.


어쨌건, 이 날은 루스키 섬과 etc, etc…    


바로 다음날, 돌아가는 날을 기다리며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오랜만에 푹 잘 수 있었다. 나는 블라디보스톡에 하루만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루 더 있었으면 몸이 좀 나아져서 열심히 돌아다닐텐데,


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소원을 빌때는 신중해야 한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진짜 하루 더 있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르세니예프 박물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