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애리 Oct 01. 2015

아르세니예프 박물관

뜬금없이 블라디보스톡 4

러시아의 탐험가인 블라지미르 아르세니예프(Влади́мир Кла́вдиевич Арсе́ньев, 1872-1930)의 이름을 딴 지역 박물관이다. 


겉보기에는 시내 한가운데 무슨 아울렛 쇼핑몰처럼 생긴 입구로 들어가야 해서, 내심 지역 박물관이라 별 것 있겠느냐고 생각하고 있었다. 박물관은 자연사부터 시작해서 지역 역사를 담고 있어서, 들어가자마자 곰 박제를 비롯한 각종 자연박제물이 보였고 그 가운데 블라지미르 아르세니예프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것도 보인다. 


그때까지만해도 나는 그저 이 박물관은 이미 들어왔으니까 그냥 들렀다가야지, 하는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1층의 고대 석조유물과 선사시대의 유물들은 마치 백화점이나 갤러리처럼 커다란 창문이 난 전시실 안에 진열되어 있어서, 바깥에서 지나가던 관광객들이 손을 모으고 창문을 들여다보면서 이 건물이 대체 뭔가 궁금해하고 있다. 박물관 2층부터는 역사시대에 관한 것이었다. 



루쉐프 '조상들' / 엉망인 사진구도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사진을 늘 발로 찍는다.
2층으로 올라가는 입구에는 1916년 루쉐프라는 작가의 '조상들'이라는 조각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해골을 들여다보고 있는 두 사람(원시인류인지도)의 모습을 담고 있는 그 모습은 이 곳이 역사시대로 통하는 입구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나는 나중에 그 작품을 다시 지나쳐오면서 먼 시대 인류의 조상들에서 나에게까지 이어지는 어떤 끈을 느낄 수 있어서 아련한 그리움과 감동이 느껴졌다.


 2층부터는 연해주를 비롯하여 극동지방, 시베리아에 살던 민족들의 의상과 생활도구들, 생활상들이 디오라마와 유물로 전시되어 있다. 


재미있는 것은 전세계 박물관 업계 종사자들이 다들 비슷한 경향인 듯, 여기에도 문양에 색칠하기 코너 같은 게 마련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학예사인 나는 이걸 보면서, 여기 학예사도 이런 코너 만들어놓고 꽤나 뿌듯해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혼자 킬킬 웃었다. 


한층 한층 올라가자 재미있는 것들이 더 많이 나온다. 당시 연해주 지역을 탐험했던(혹은 파견되었던?) 탐험가와 군인들의 모습과 그들이 지니고 다니던 서류들이 전시되어 있다. 나는 그 당시에 대한 이야기를 좀 구상하고 있던 터라, 홀린 채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댔다. (여기는 들어갈 때 작품관리원이 사진을 찍어도 된다고 알려주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새로운 전시실을 들어가자, 어느덧 근대 시기가 나온다. 1800년대 말 시작된 러시아 내전의 이야기들과 그 때 당시의 의상들이 나온다. 그리고 학예사의 눈으로 볼 때, '오오, 여기가 이런 전시기법을?'하는 멀티미디어를 활용한 독특한 전시 디스플레이가 나와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건물은 비록 오래되어 낡았을 지라도, 그 속의 콘텐츠를 채우는 방식은 무척이나 현대적이었다. 


그렇게 1945년 대조국전쟁(제2차 세계대전의 러시아 참전에 대해서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러시아는 이 전쟁 참전으로 엄청난 인명을 희생했다) 시기를 지나 맨 윗층에는 현재 블라디보스톡 작가들의 작품들과, 전쟁영웅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나왔다.


 맨 윗층의 한 전시공간은 엘리노어 프레이라는 미국인 여성의 '블라디보스톡으로부터의 편지'라는 책을 주제로 꾸며져 있었다. 


사실 도시를 돌아다니다가 엘리노어 프레이라는 여성의 동상과 글귀를 만났던 터라 참 궁금했던 차였다. 심지어 그것을 사진을 찍고 있는 나이 지긋한 러시아인 할아버지 관광객들에게 이 여자가 누군지 물어봤는데, 그들도 '작가겠지...아마?'하면서 그냥 웃는다. 아마도 작가가 맞겠지, 하고 그때 생각하고는 전시실에 들어가보자 1900년대 초의 블라디보스톡 사진 속 인물과 그 인물에 대한 엘리노어 프레이의 묘사가 함께 전시되어 있다. 전시 기법 자체가 너무 아름다워서 사실 글귀를 읽어볼 생각을 하진 못했지만, 대강 읽어본 일부 글은 블라디보스톡에 사는 중국인이나 그 외에 어떤 인물들에 대해 독특한 묘사를 써놓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호텔에서를 비롯하여 대체로 와이파이가 잘 터지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집에 돌아와서야 엘리노어 프레이(Eleanor Prey,)가 누구인지 찾아볼 수 있었다. 그녀는 미국인으로 상인이었던 남편을 따라 블라디보스톡에 1894년부터 1930년까지 30년을 넘게 살면서 2000통이 넘는 편지를 써서 그 당시의 생활상을 묘사했다고 한다. 그녀의 편지를 담은 책이 워싱턴 대학 출판사에서 2013년에 출간되었던 것을 보았는데, 나는 그 책을 보자마자 주문해버렸지만 유감스럽게도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아르세니예프 박물관의 상주 고양이, 러시아어로 코쉬카라고 해야 할까? 


엘리노어 프레이의 전시를 보고 나와서 다른 전시실을 기웃거리는데, 바닥에 까맣고 하얀 털뭉치가 스스슥 지나가는 게 보인다. 깜짝 놀라 쳐다보니, 고양이었다. 


처음에는 관람객이 데리고 들어온 고양이인줄 알았다. 


'이 박물관은 애완동물도 입장 시키는구나'하는 게 처음 생각이었다. 그런데, 관람객의 고양이 치고는 지나치게 당당하고 전시실 지리를 잘 아는 것 같다. 마치 자기가 소유한 공간인 양 전시실을 뽐내며 걷고 있는 고양이에게 손을 내미니, 도도한 표정으로 다가와 머리를 스윽 들이민다. 머리를 쓰다듬었더니 고양이는 나를 한번 힐끔 쳐다보고는 털이 복술복슬한 꼬리로 나를 스치고 지나간다. 


박물관 안내원한테 물어봤더니 그 고양이는 여기에 사는 아이라고 한다. 박물관 안내원 할머니는 고양이에게 플라스틱 병뚜껑을 가지고 놀라고 던져주었는데, 이런 방식으로 고양이와 함께 무료한 시간을 보내시는 게 아닌가 싶었다. 예전에 에르미따쥬 박물관에도 몇 마리의 유명한 고양이들이 살고 있어서 관광객들의 인기를 독차지 한다는 말을 들었던 적이 있는데, 여기서도 고양이를 키우는 줄은 몰랐다. 고양이가 플라스틱 병뚜껑을 이리 차고 저리 차며 가지고 노는 것을 보면서 아르세니예프 박물관을 나왔다.


 나는 이 박물관을 나오면서, 며칠 뒤에 돌아가는 날 한 번 더 방문해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다시는 오지 못했다.  짧은 여행이라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여행을 싫어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다. 좋아하는 장소에 또 다시 갈 수가 없다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