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없이 블라디보스톡 3
2012년 겨울, 나는 한달간의 파리 여행 중간에 런던을 간 적이 있다.
내 프랑스어는 형편없는 수준이었고, 따라서 대화다운 대화는 거의 해보지 못했던 터였다.그런데 런던에 딱 떨어지는 순간, 엄청나게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언어가 통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람들은 또 얼마나 친절한지. 그들은 관광객이 혹시나 길을 몰라서 서 있는가 싶어서(나는 그냥 시계를 본다고 서 있었던 것) 찾아와서 도와주려고 하고, 말을 걸어주고, 미소를 지어주고 지나간다.
나는 러시아에서는 이것이 정 반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러시아어를 하는 파리사람들 정도? (그들도 사실 시크하게 지나치긴 하지만, 말을 걸면 착하고 자상하다. 다만 수줍음이 많을 뿐) 혹은 온갖 미디어에서 양산하는 불친절하고 무뚝뚝한 러시아인에 대한 이미지들. 그리고 카작에서 겪은 무뚝뚝한 러시아어권 사람들.
그런데 블라디보스톡은 내 예상을 완전히 깬다.
(내가 러시아어를 해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너무 친절했다. 길을 물어보면 다가와서 친절하게 설명해주고(물론 러시아어로), 어떤 이는 내가 버스에서 어디로 갈지 몰라서 버스노선도를 보며 망설이는데, 근처에 후니쿨료르 전망대에 가보라고 안내해주기도 했다. 그녀는 러시아어와 영어를 써가면서 나에게 설명을 해주었는데, 마르슈르트까(버스와 비슷한 봉고차)를 타고 가다가 나에게 어디서 내리라고 설명을 해주었고, 그 전에는 후니쿨료르 전망대 버스타는 곳에서 유명관광지인 루스끼 섬에 가는 버스도 있다면서 한 번 가보라고 알려주기도 했다.
그녀는 내가 블라디보스톡 사람들이 너무 친절하다고 했더니 무척이나 좋아한다. 그런데 내가 한 말은 듣기좋으라고 한 말이 아니고, 사실이었다. 사실 전날 밤 1시에 혁명광장(주 정부청사 근처에 있다)에서 돌아다니고 있는데, 경찰 2명이 우리에게 다가오기도 했는데, 그들은 내 예상과는 달리 우리를 한번 쳐다보고는 그저 지나가버렸다. 대체로 경찰들이 나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 정말 고마웠다. 나는 러시아 사람들이 카자흐스탄과 다른 것인지, 아니면 블라디보스톡 사람들이 러시아 사람들치고는 친절한 것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실 첫날 공항에서 만난 여학생과 같이 동행했던 한나절은 진짜 별로였다. 나는 이상하게도 그녀의 관광 가이드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뻬르바야 레취까에서 나는 신한촌의 흔적을 찾아보려고 했는데, 그녀의 눈치를 보다가 그저 시장만 들렀다가 돌아왔다. 그런 다음에는 다시 버스를 타고 되돌아오다가 러시아 정교회에서 내려서 걸어다니다가 서점에 들러서 그녀가 엽서를 고르는 것을 구경했고, 다음에는 1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체르콥 근처에 있는 그녀의 숙소를 찾아주는데 시간을 허비했다. 그리고 숙소에 짐을 풀고 나와서 늦은 점심으로 보르쉬 정식을 먹은 뒤, 걷다보니 해양공원으로 갔다. 거기서 한 바퀴 돌다가 그녀의 제안으로 헤어졌다. 사실 그녀가 제안하지 않았더라면 내 여행은 최악이었을 것이었다.
나는 아직도 정신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나는 러시아어를 할 줄 알아서 지나치게 편안했고, 피곤했으며, 여행 마인드가 아닌 그저 고향에 돌아온(러시아는 태어나서 처음이었지만 러시아어는 그렇지 않다) 외국인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그 여학생과 헤어진 뒤, 나는 잠시 허전함과 외로움을 느꼈다가 다시 내가 갈 길을 찾아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걷다가 친절한 여자를 만나서 후니쿨료르에 갔다오게 되었던 것이다.
여행은 새로운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다.
여학생과의 동행이 즐겁긴 했지만, 나와 맞지 않아서 버거웠고, 그녀와의 헤어짐이 섭섭하기는 했지만 다음에 만날 인연을 생각하면 또 오히려 긍정적이다. 버스 정류소에서 만난 이름모를 아가씨의 친절이 너무 고마웠지만 나는 그녀에게 이름 조차 듣지 못했다. 이렇게 낯선 사람들과의 지속적인 만남과 헤어짐이 바로 여행이다. 여행자에게 긴 우정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는 그저 혼자이며, 혼자서 모든 것을 이겨나가고 헤쳐나가다가, 우연히 친절과 우정을 짧게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버스정류소에서 만난 아가씨는, 블라디보스톡이 샌프란시스코같다는 내 말에, 사실은 이스탄불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다. 외국인도 많고, 여러 문화가 섞여있는 도시가 바로 그녀가 말하는 것일게다. 영어와 러시아어를 하는 친절한 그녀를 통해서 나는 블라디보스톡이 좋아졌다. 저녁 때는 호텔로 돌아와서 땀에 젖은 옷을 벗어버리고, 샤워를 하고 새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저녁을 어디서 먹을 지를 한참을 고민하다가, 로비에 있던 한국 남자 여행객 둘에게 식사 할 만한 곳이 있는가를 물어보고(그들은 언어 문제로 인해 피자와 스시를 주로 먹은 모양이었다) 결국에는 호텔 경비아저씨한테 물어보았는데, 그가 추천해준 식당에 가서 맛있게 식사를 할수 있었다.
처음에 나는 러시아에서 먹을 것들의 리스트를 써왔었는데, 그 리스트는 거의 체크하지 못했다.
공항에서 먹은 돈까스와 오믈렛이 아직도 위장에 걸려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첫날부터는 주로 생선과 수프로 연명할 수 밖에 없었다. 레스토랑은 해물전문인 것 같아서, 나는 주문을 하면서 점원에게 추천해달라고 했다. 처음에 외국인이 들어와서 엄청나게 긴장한 나머지 무뚝뚝해졌던 제부쉬까는, 내가 러시아어를 하자 안도의 미소를 지었고, 그런 다음에는 예상치못하게 친절하기까지 했다.
외국인 울렁증이 있는 러시아 사람들이 참 귀엽다. 마치 파리지앵들이 외국인을 만나면 지나치게 긴장한 나머지 콧대 세우며 시크하게 모른체 하고 지나가지만, 프랑스어를 쓰면 엄청나게 수다스럽고 친절해지는 것과 비슷하다.
테이블 앞에는 'Stop Thinking Start Drinking'이라는 티셔츠를 입은-곰같이 생긴-러시아 아저씨가 친구들과 앉아서 생선요리를 먹으며 맥주를 마시고 있다. 그 티셔츠와 술을 마시는 그 아저씨의 모습이 어찌나 러시아인처럼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다. 그 아저씨는 내가 중국인인지, 일본인인지, 한국인인지 계속 궁금해한다. 나는 대답해주고 싶었지만, 러시아어를 모르는 체 하면서 그냥 식사만 한다. 내가 먹은 생선요리는 환상적이었다~! 팔투스Палтус란 생선으로 만든 '갈루바야 라구나Голубая Лагуна'라는 요리였는데,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구운 흰살 생선 밑에 밥이 깔려져 있고, 그 옆에 오이와 토마토 샐러드가 있는 요리다. 쉽게 말하자면 생선구이 정식이다. 그걸 먹고 났더니 위장이 좀 돌아가기 시작하는게 다행스러웠다. 호텔에 돌아와서 잠을 잤다. 러시아 사람들이 친절하다는 포스팅을 페이스북에 하고 나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