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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애리 Oct 01. 2015

내가 블라디보스톡을 간 이유

뜬금없이 블라디보스톡 1

요새 블라디보스톡이 뉴스 등에 나오고 있다. 푸틴이 러시아 극동지역을 개발하겠다는 굳은 의지로 자유항을 만들겠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동방포럼 이야기도 나온다. 블라디보스톡에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니 괜시리 관심이 가게 된다. 물론 단언컨대 내가 블라디보스톡에 가게 된 것은 이런 이유는 절대 아니다.


블라디보스톡행을 결심하게 된 사유는 엄청나게 우연의 연속이고, 또 매우 충동적이다.


모든 일의 시작은 갑자기 가게 된 휴가였다.

 

2주전 주말이 다되어가는 7월 말. 내 휴가는 8월 초로 정해졌다. 나는 2주더 안되는 그 시기, 부랴부랴 해외여행 계획을 세웠다.


문제가 있었다. 여권을 갱신하지 않아서 만료된지가 꽤 된 것이다.


그래서 2주전 7월 25일 토요일, 나는 얼른 회사 근처 어딘가에 있는 시골 사진관에 가서 여권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주 월요일 여권을 새로 발급하러 점심시간에 시청(여기는 구청이 따로 없으므로, 시청에서만 여권발급이 된다!)을 갔었고, 그동안 오랜만에 러시아어를 쓰고 싶기도 하고해서 러시아쪽으로 여행을 결심하여 여행상품을 찾기 시작했다. 사실 귀찮은 나머지 호텔팩 같은 걸로 갈 생각이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같은 도시?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늘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에르미따쥬 박물관 때문이다. 그런데 상트 페테르부르크 여행상품은(호텔과 항공권만 있는) 지나치게 비싸고,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함께 돌게되어 있어서 가뜩이나 이동을 싫어하는 나에게 최악의 코스였다. 자칫하면 두 도시 전부 제대로 보지 못할 게 뻔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행 싼 여행상품은 일요일 오전에 인천에서 출발하는 상품 밖에 없었는데(그 뒤의 것은 휴가기간을 훨씬 지나서 돌아오게 되어있다)


그런데,


나중에 알아보니 하필이면 회사에서 매년하는 행사가 그 전날 토요일까지 있었던 것이다. 항공편, 기차편, 버스편 모두 따져봤지만, 행사를 마치고 그 시각까지 인천에 갈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러다가 블라디보스톡을 보았다. 러시아이고, 2시간 항공이고, 찾아보니 심지어 지방에서 출발하는 것도 있었다.  아무래도 에어팩보다는 따로 예약하는 것이 낫지 싶어서 항공권을 사려고 하는데, 러시아 항공은 여권번호가 정확하지 않으면 안 된단다. 내 여권은 당시에 신규 발급중이었다. 그래서 7월 29일 수요일, 나는 시청에 연락을 하고, 또 찾아가기까지 해서 여권 번호와 만료일을 받아왔는데, 이번에는 항공권이 계좌이체 결제밖에 안 되는 것이다! 결국 포기하고 다음 날 여권을 새로 발급받은 다음에 다시 구입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약 37만원 가량. 호텔은 19만원 정도 하는 (3일에) 젬츄지나(진주) 호텔을 예약해놓았다.  그리고 그 주 토요일은 도시에 나가서 쇼핑.  


그렇게 7월의 마지막 주를 숨가쁘게 보내고, 8월이 되자 이제 여행준비를 하고 기다리는 것 밖에는 없었다.


나는 러시아의 역사를 비롯하여, 블라디보스톡의 독립운동 관련 서적을 찾아읽고, 왜 샀는지는 모르겠지만 엄청 재미있게 읽은 가린-미하일롭스키의 1900년대 초 조선 여행기를 찾아서 읽고, 그 외에 필요한 책을 사서(혹은 빌려서) 읽었다. 게다가 중앙아시아에서 지겹도록 겪은 구 소비에트권 경찰들이 겁나서 비자 관련 협정서 내용을 찾아보고, 거주지등록 관련 법규를 잔뜩 출력해놓은 뒤 잔뜩 불안해하고 있었다. 여행 직전에 삼일동안 걸쳐져 열리는 회사 행사는 또 얼마나 힘들었던지.


그렇게 무리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잠을 자지 못했다.


열대야가 계속 되기도 하고, 도서반납을 계속 미루고 있어서 쫓기는 꿈을 꾸었다. 어쨌거나, 8월 8일 토요일 회사 행사를 드디어 끝내고 밤 11시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도서반납까지 모두 마치고, 집에서 짐을 싸놓고 모든 것을 정리한 뒤 잠들었다.  사실 나는 환전을 미리 하려고 했지만 내가 살고 있는 시골에서는 루블로 환전할 곳을 찾지를 못했었다. 달러로 굳이 환전을 해놓을 정도로 많이 가져갈 이유도 없었고(특히 점심시간에 줄을 잔뜩 서 있는데 그걸 기다려서 환전해야 할 정도로 많은 돈을 환전하진 않는다) 정작 환전이 필요한 이유는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들어갈 때 루블화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공항에서 루블화로 환전을 하기로 결심했지만, 내가 출발하는 날이 휴일이고 또 그날 그날 사정이 어떻게 될지 모르므로 불안해서 일찍 가기로 마음 먹었다. 안되면 공항이 있는 도시 시내 쪽에 불법 환전상에 가서 루블로 얼마라도 환전을 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아침에 출발할 때 어영부영 차를 한대 놓치고, 다음에 가는 공항행 버스에 올라탔을 때는 옷은 이미 땀으로 젖을 대로 다 젖었고, 기력은 쇠진해버린 터였다. 공항에 느긋하게 도착하여보니 겨우 한 두 시가 되었을 뿐이었다. 환전을 하고 공항을 한바퀴 돌고나서도, 시간이 무려 체크인까지만해도 2시간이 남는다. 그렇게 지리한 기다림, 그리고 겨우 체크인을 하러 갔는데 블라디보스톡행은 러시아인들이 굉장히 많다.  면세점에서 필요한 것들(사람들이 부탁한 것을 포함하여)을 사고, 앉아있는데 저녁 때 급히 먹은 돈까쓰와 오므라이스가 내 위장과 동의를 안 한다.


대체 나는 왜 여기 공항에 와서 돈까스와 차가운 오므라이스를 먹은 걸까. 그렇게 비행기를 타니 이번에는 에어로스비트(우크라이나) 항공사처럼 차갑고 딱딱한 샌드위치를 서빙한다. 에어로플로트로 코드쉐어하는 오로라 항공-이 항공사는 결국 돌아오는 날도 나를 엿먹인다.  2시간 동안의 비행. 사실 기억은 잘 안 난다. 별로 떨리지도 않았고, 별 생각이 없었지만, 내심 긴장하고 설레였던 것은 분명하다.


어쨌거나 나는 이렇게 준비없이 혹은 엉뚱하게 쓸데없는 것만 준비해서 블라디보스톡에 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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