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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애리 Jun 07. 2016

소로우의 월든 생활도 처음부터 완벽하진 않았을거야

무기력한 삶 개선 계획을 테스트하며

19세기 미국 사람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어느 날 월든 숲 속 오두막집에서 심플한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그는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그는 나무를 하고 물건을 직접 만들고 풍경을 관찰한 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는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여행보다는 은둔을 추천한다.  


도시에서 태어나서 마당이 있는 집에서 조차 살아본 적은 한 번도 없는데다가 모기기피제 없이는 절대로 숲에 들어가지 않는 나로서는 그의 이런 삶은 늘 동경만할 뿐이다. 내가 베어 그릴스를 동경한다고 해서 내일부터 당장 그가 차려주는 곤충을 곁들인 만찬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H.D.소로의 월든에서의 삶에 공감하지만 숲 속에 오두막집을 짓고 은둔할 생각은 눈꼽만치도 없다. 대신 나는 도시 안에서 나 자신의 삶을 바로잡을 나만의 '월든'을 실험하고자 하는 것이다.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나는 내 계획이 현실적인지 시험해보는 단계가 먼저 필요했다. 


나는 전에도 유사한 프로젝트를 거창하게 세웠던 적이 많은데,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듯 작심 3일로 전부 끝나버렸다. 운동을 하려는 계획은 지독한 미세먼지 때문에 좌절되었고, 밀가루 음식을 먹지 않겠다는 결심은 파스타 한 입에 흔들렸다. 새벽에 일어나서 공부를 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새벽에 일어나기는 했지만 첫 날부터 아침 식사만 거창하게 차려먹고 책상 앞에서 조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밤늦게 공부를 하겠다는 결심은 결국 수면부족으로 인한 지독한 감기를 불러왔다. 확실히 나에게는 실현을 위한 시험단계가 필요해 보였다.  


그리하여 햇볕이 유난히도 좋았던 5월의 네 번째 주에, 나는 세운 계획을 실천해보았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 아침에 회사에 일찍 가는 것(바꾸어 말하자면 회사 사무실이 아닌 어딘가에 숨어서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하겠다는 것)을 굳이 선택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1. 아침을 먹고 집에 가만히 앉아있으면 졸리는데, 결국 이 때문에 모든 게 흐지부지 되고 말 것이라는 것이 뻔하다는 것, 2. 최근에 회사에 가기 싫어서 늦잠을 자다가 결국 9시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하는 빈도가 위험수위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아침의 약간의 여유를, 회사에 얼른 가고 싶어할만한 이유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길게 잡으면 45분, 짧게 잡으면 30분가량의 이 어중간한 시간을 어떻게 즐거운 활동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인가는 아직도 고민중이지만, 우선 나는 좋아하는 책을 읽으며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그 첫 주의 첫번째 날, 아침에 서두르지 않아서 기분이 좋았다. 아침에 늦어서 급히 달리느라고 난폭운전을 하지도 않았고 노란불에 꼬박꼬박 서면서 여유있게 회사에 도착했다. 사무실에는 청소를 마치고 나가는 미화원들 밖에 없었다. 미화원들이 나가고 난 뒤 아침의 고요한 공기 속에 잠겨 있는 사무실은 평소 보다 더 견딜만하게 보였다. 사무실에 들어와서 제일 처음으로 컴퓨터를 켠 뒤, 나는 책을 한 권 들고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간다. 나는 8시 40분이 될 때까지 책을 읽고 조용히 책을 덮었다. 


2년 만에 맞이하는 여유있는 아침이다. 타인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유를 부렸던 것이 얼마만이던가. 사실 의지를 가지고 처음으로 뭔가를 시도하게 되면, 그 자체만으로도 즐거운 법이다. 


나는 이 날 하루종일 즐거웠다. 회사 사람들에게도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되었고, 부당한 대우나 차별적인 발언에도 날을 세우지 않았다. 그리고 저녁 때 나는 내가 지난 토요일에 준비해놓은 식사 하나를 꺼내 먹고, 내가 운동이라고 부르는 산책을 나갔다.  단 하나 힘들었던 것은 저녁 때 2시간 동안 비워놓았던 '여유시간'을 무엇을 위해서 쓸 것인지 아직 생각해놓지 않았다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처음으로 쓸데없이 SNS를 들여다보며 빈둥대다가 새벽까지 깨어있는 일 없이 11시경에 제시간에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첫 번째 한 주는 계속해서 행복감이 이어졌다. 내가 (아직 목표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뭔가 계획한 것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행복했던 것이다. 표류하는 내 삶을 다잡기 위해서 필요했던 것은 바로 계획성 있는 삶이었고, 나는 그것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다는 것에 뿌듯했다. 그렇게 두 번째 주가 닥쳐왔다.  


두 번째 주는 생각보다 힘들었다. 기분이 너무 좋아진 나머지 주말에 인근 도시에 나가서 열심히 돌아다닌 탓도 있다. 아직도 '여유시간'에 무엇을 할 것인지 제대로 정해놓지 않았던 것도 이유다. 그런데 진짜 큰 이유는 야근이었다. 두 번째 주에 3일 연속으로 야근을 하자, 저녁 시간에 해야 할 운동을 놓치고, 아직 정해놓지는 않았지만 뭔가를 해야 할 2시간을 놓쳐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지나치게 피곤해진 나는 바로 그 다음날에 늦잠을 자버렸던 것이다.  


늦잠을 자 버린 날은 금요일이었다. 늦잠이라고 해봤자 7시에 일어날 것을 평소처럼 스누즈 알람을 계속 끄다가 결국 7시 40분에 일어나는 것이었지만, 3일간의 야근에 이어 결국은 아침 계획마저 틀어졌다는 충격이 더 컸다. 그리고 곧 이어진 3일간의 연휴에는 날씨 핑계를 대면서 낮 2시, 3시까지 늦잠자다가 밤 늦게까지 깨어있는 평소의 생활로 되돌아오고야 말았다.  



스스로와의 약속을 어겼다는 죄책감, 무절제한 삶을 허락해버린 자신에 대한 실망감과 같은 감정이 들었다고 하면 너무 과장하는 걸까? 나도 평소에 거짓말을 하고, 이따금 윤리적으로 아슬아슬한 줄타기도 한다. 나는 대체로 일반적인 사람들에 비해서 자유롭게 발언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내가 세운 계획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을 때에는 커다란 도덕적 죄책감이 드는걸까?  하지만, 생각해보면 내가 이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유는 실패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고자 한 것은 아니다.  나는 무미건조하고 재미없는 삶을 다시 열정이 넘치는 삶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 이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이다. 


나에게는 직장이 있고, 발전시켜나가야 할 커리어가 있고, 나를 사랑하는(그래서 내가 남들처럼 평범하게 애 낳고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 내 프로젝트는 이 중 어느 하나에도 딱히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열정없고 무미건조하게 사는 것이 어쩌면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굳이 죄책감이나 의미를 갖다대며 스스로를 힘들게 하기 보다 이런 프로젝트 따윈 다 때려치우고 그냥 마음 편하게 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소로는, 월든 숲 속에서 살아보는 실험을 통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뛰어넘고 새롭고 자유로운 법칙으로 삶을 도약시킬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자신있게 말하는 그 역시 처음에는 시행착오를 겪었을 것이다. 자신만만한 도시 양반이 숲 속에 들어와서 장작이나 제대로 팼을까? 전부 때려치우고 도시로 나가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자신에게 실망감을 느끼기도 했겠지. 그렇다고해서, 그가 겪었던 월든에서의 2년간이 바보같은 헛짓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시도했고, 이따금씩 실패도 했다. 


그렇지만 그는 실패하고 좌절하는 데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시도했고, 그렇게 2년 넘게 살았다. 그것 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행위가 아닐까. 내 삶을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 끊임없이 시도한다는 것 자체로 말이다. 비록 중간에 끊임없이 실패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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