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에 걸리면 방이 커진다.
나는 그 안에서 조금 줄어든다.
침대에서 의자로 옮겨 앉는 일이
하루의 일정이 된다.
이 일정은 취소되지 않는다.
시간은 성실하지 않다.
오전은 늘어지고
오후는 잠깐 머물다 간다.
해야 할 일들은 분명히 있는데
모두 방 바깥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방 안에 남는다.
불참을 알리지는 않는다.
벽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창틀도 그렇다.
바닥은 오래 닦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책꽂이는 늘 같은 자리에 있다.
그 점이 조금 불편하다.
그날, 책꽂이가 일을 했다.
책과 책 사이에
그림자를 하나 끼워 넣었다.
햇빛이 들어왔지만
열심히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 탓에 그림자는 길어졌다.
길어진 그림자가
보라색처럼 보였다.
정신을 차리면 사라지고
정신을 놓으면 남아 있는 색이었다.
눈을 비비면 없어지고
시선을 비켜 두면 다시 나타났다.
나는 정면으로 보지 않았다.
보면 달아날 것 같았다.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아무도 없는데
들키지 않으려는 자세로.
보라는 오래 머물지 않았다.
잡으려 하면 바로 나갔다.
오해받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나는 그 색을 붙잡는 대신
그때의 나를 바라보았다.
눈은 반쯤 감겨 있고
생각은 자리를 비운 상태.
몸과 마음이
오늘은 쉬자고 합의한 순간.
그때만
그림자는 색을 가졌다.
원래는 회색이었을 자리에
잠깐 다른 기척이 스쳤다.
나는 그 색을 그리지 않았다.
대신 책 사이의 간격을 기억했다.
그림자가 눌려 있던 위치와
공기가 잠시 멈춘 것 같은 느낌을
남겨 두었다.
색은 나중에 와도 괜찮을 것 같았다.
캔버스 위에서
그것은 앞에 나서지 않았다.
가장자리에 머물렀다.
신경 쓰면 사라지고
돌아서면 다시 있었다.
사람을 닮았다.
그 이후로
색을 고르기 전에
몸의 상태를 먼저 본다.
오늘은 어디까지 가능한지,
조금만 무리해도
금세 드러날지.
그 보라는 다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가끔
몸이 조금 고장 났을 때,
마음이 자리를 비웠을 때
그림자들이
아무 일도 없는 얼굴을 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생각한다.
사라진 색이 아니라
사라지기 직전의 나를
잠깐 남기고 싶었던 건 아닐까.
이 정도면
착시치고는
꽤 성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