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말이 되지 않은 상태

by 에티텔
8. Two and twos.jpg 이효연, Two and twos, oil on linen, 91x116.7cm, 2025

이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나는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다만 어떤 장면들이 반복해서 떠올랐다. 사람이 있지만 고독하지는 않고, 고독하지만 완전히 혼자는 아닌 상태. 말이 오가기 직전, 혹은 이미 지나간 뒤에 남아 있는 공기 같은 것. 이 그림들은 그 공기를 붙잡아 두려는 시도였다.


화면 속 인물들은 멈춰 있다. 그러나 그 멈춤은 정지가 아니라 보류에 가깝다. 그들은 결정을 내리지 않았고, 감정을 정리하지도 않았다. 대신 생각이 몸에 남아 있는 채로, 잠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나는 이 불완전한 상태를 신뢰한다. 완결된 서사보다, 방향을 잃은 감정이 더 많은 진실을 품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공간은 언제나 인물보다 먼저 말을 건다. 테이블 위에 놓인 정물, 창을 가로지르는 빛, 커튼 뒤의 바깥, 액자 속 또 다른 장면들은 현실을 재현하기 위한 배경이 아니라, 생각이 머무는 장소다. 내부와 외부는 명확히 나뉘지 않고, 하나는 다른 하나를 비추는 거울처럼 작동한다. 우리는 늘 어딘가를 바라보면서, 동시에 누군가에게 보여지고 있다.

색은 이 작업에서 언어에 가깝다. 그러나 그것은 명확한 뜻을 전달하는 언어가 아니라, 감정의 온도를 기록하는 언어다. 채도가 높은 색들은 환희보다는 긴장에 가깝고, 부드러운 색면들은 위로보다는 체념에 가까울 때가 많다. 색은 사물을 설명하지 않고, 그 사물 옆에 머무는 감정을 조용히 드러낸다.

14. Green Mask.jpg 이효연, green mask, oil on canvas, 50x40cm, 2025

새와 그림자, 가면과 반복되는 프레임들은 하나의 의미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직접 마주할 수 없는 것들이 선택한 우회로다. 우리가 말할 수 없을 때 바라보게 되는 것들, 감정이 얼굴을 갖기 전에 잠시 빌려 쓰는 형태들. 이 요소들은 화면 안에서 떠돌며, 보는 이의 시선을 분산시키고, 다시 되돌려 보낸다.


이 그림들은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지 않는다. 대신 서로를 부르지 않는 장면들이 나란히 놓여 있다. 그러나 그 사이를 걷다 보면, 일정한 감정의 흐름이 생긴다. 설명되지 않은 장면들이 쌓이면서 만들어지는 리듬, 말해지지 않았기에 더 오래 남는 시간. 관객은 그 틈에서 자신의 기억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혹은 아직 언어를 갖지 못한 감정을.

10. still lives 2.jpg 이효연, still lives 2, oil on linen, 72.7x60.6cm,

나는 이 작업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다는, 어떤 상태를 허락하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그림들 앞에서는 이해하지 않아도 괜찮고, 판단하지 않아도 괜찮다. 잠시 머물러도, 그냥 지나쳐도 된다. 다만, 아주 잠깐이라도 자신의 내면이 조용해지는 순간이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 장면들 속에서, 사실은 가장 많은 것이 이동하고 있다. 생각은 방향을 바꾸고, 감정은 이름을 찾지 못한 채 흘러가며, 기억은 현재와 섞인다. 나는 그 느린 이동을 그린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 우리가 살아가며 가장 자주 머무는 시간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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