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이 오사무를 닮은 작가님께
얼마 전 동료 작가님의 연락을 받았다. 반갑게도 오랜 방황을 끝내고 다시 글 작업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많은 작가님들이 그렇겠지만 그 작가님도 상당한 히스토리가 있는 분이었다. 주목받는 신인으로 데뷔해 여러 제작사에서 콜을 받았고, 그 중 한 곳을 골라 계약은 했는데 작품이 잘 풀리지 않아 수년을 고생했다. 그리고 그 후 다른 작품의 어시스트를 하며 다시 재기를 꿈꿨지만 이번에도 작품 중단.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의지가 많이 꺾인 상태였다.
다시 기운을 차려서 ‘이번이 마지막’ 이라는 심정으로 공모전에 낼 작품을 준비한다고 했다. 만나서 맛난 음식을 먹고 분위기 좋은 곳에서 기운 팍팍 내자며 좋은 말만 나눴다. 나 역시 다음 달을 기한으로 준비하고 있는 작품이 있고, 그 결과물로 데뷔냐, 백수냐가 결정되는 시점이기에 남일 같지 않았다. 서로 힘내자고 두 주먹 불끈 쥐고 파이팅 했더랬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 그 작가님에게 톡이 왔다. “전생에 죄를 지은 사람들이 작가라더니... 글 작업이란게 정말 힘드네요.”라는 내용이었다. 이 톡을 보는 순간 기운이 확 빠졌다. 사실 이 말을 그 작가님에게 여러 차례 들었었다. 일종의 자기 비하, 자기 푸념으로 중얼거리는 말이었는데 갑자기 나도 모르게 화가 불끈 나면서 “도대체 이 말 뜻이 뭐 길래 주문처럼 외우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전생에 죄를 지은 사람이 작가가 된다... 그럼 작가란 ‘벌을 받는 사람’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래서 죽도록 괴로운 게 당연하다는 소리 같기도 하다. 하지만 진짜 그런가? 글을 쓴다는 게 그 정도로 세상에서 제일 괴로운 일 중 하나인가? 그토록 괴로운 일이라면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작가를 꿈꿀까? 아니다, 글을 쓴다는 건 괴로운 일이 아니다. 물론 신나는 일만도 아니겠지만 그 정도로 괴로운 일은 아니라는 거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사실 글을 쓴다는 건 세상 어느 일보다도 쉽게 시작할 수 있는 일,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를 만족스럽게 하는 일이다.
하지만 괴롭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안다. 사실 글쓰기가 괴로운 것은 아니라 글로 평가받는 다는 것, 그것이 두렵고 괴로운 것이다. 내 글로 인정받고 싶으니까, 내 글을 세상에 알리고 싶으니까 괴롭다. 바로 욕심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고로 글쓰기라는 일과 작가라는 직업은 괴로움의 원인이 아니고 죄도 없다.
사실 전생에 죄로 작가가 된다는 말을 스스로가 한다는 건 ‘자기 연민’에 가깝다. 솔직히 전생에 죄를 지었다면 더 독하고 험한 벌을 받겠지, 책상위에서 키보드 치는 일을 벌로 주었을 리 없지 않은가? 세상에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 많은가? 그런데 그런 일을 하면서 전생의 죄를 지어서...라고 중얼거리는 건 좀 유치하다. 엄마가 자식들을 보며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별다른 의미 없는 말이다. 그나마 엄마들은 자식에게 ‘희생’이란 것을 한다. 그런데 작가가 무슨 희생을 한다고 전생까지 들먹이는가? 그저 자기가 좋아서 선택한 일일 뿐인데. (남들이 다 말려도 기어코 하겠다는 건 본인들이었다!)
게다가 나나 그 작가님은 사실 운이 좋은 편이다. 얼마나 많은 작가들, 그리고 작가 지망생들이 생계를 위한 일을 하면서도 글을 쓰겠다고 애쓰는가? 우리는 비록 불안정하더라도 생계를 위한 다른 일 하지 않고도 글을 쓸 수 있는 컨디션에 있다. 그런데 마지막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열심히 하겠다는 양반이 “전생의 죄를 지은 사람이 작가가 되는 것”이라는 뜻도 맞지 않는 말을 하고 있으니...
다자이 오사무의 에세이 <잎>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신주쿠 길가에 주먹만 한 돌멩이가 느릿느릿 기어가는 것을 보았다.
돌이 기어가네, 그렇게만 생각했다.
하지만 곧 앞서가던 추레한 아이가 실에 묶어 끌고 가던 것임을 눈치챘다.
아이에게 속은 것이 쓸쓸했던 게 아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던 스스로의 자포자기가 서글펐다.
일생을 이런 우울과 싸우다 죽겠구나.
그렇게 생각하자. 그는 제 신세가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푸른 논두렁에 안개가 확 밀려왔다.
눈물이었다. 그는 당황했다.
이런 값싼 감정에 휘둘려 눈물을 보인 것이 부끄러웠다.
그 작가님에게, 아니 사실 그와 똑같은 마음을 숨기고 있었던 나에게 말하고 싶다.
제발 말도 안 되는 말을 주문처럼 외우며 “괴롭다, 괴롭다” 그러지 말자.
조금만 이성적으로 상황을 보면, 생각만큼 괴로운 건 사실 별로 없다.
정말 안타까운 것은 지금 이 순간, 두려움 때문에 차라리 괴롭다고 믿고 싶은 나의 마음,
그 고여 있는 마음, 그 부끄러운 마음임을 이제는 좀 알아차리자.